엉기고 얽히며 망가지는 삶 속에서
비로소 완성되는 매혹적인 아이러니
“자고로 음식은 나눌수록 더 맛있어지는 법이죠.
이 황홀한 맛을 저 혼자만 알기 아까워 당신을 불렀답니다.”(33쪽)
표제작이자 첫번째 수록작인 「치즈 이야기」 속 화자의 천연덕스러운 초대에 이끌려 도착한 방에는, 병든 엄마가 악취를 풍기며 누워 있다. 그 냄새는 과거에 바로 그 방에서 부모로부터 방치된 채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었던 ‘나’의 유년을 불러낸다. 그때 ‘나’가 꾸었던, 치즈로 변한 부모님을 황홀하게 맛보는 악몽은 혹여 무의식적으로 품게 된 강렬한 염원은 아니었을까. 소설이 이러한 의심을 심어주는 순간, 제대로 된 처치 없이 썩어가는 엄마에게서 풍기는 지독한 악취는 먹음직스러운, “잘 숙성된 치즈의 냄새”(20쪽)처럼 감각되기 시작한다. 증오와 복수심이 서린 환상 속의 맛을 끈덕지게 그리워해온 ‘나’는 드디어 꿈에 그리던 치즈에 한 발짝 가까이 다가설 수 있게 된다.
소설집의 전반부에 펼쳐지는 기이하고 잔혹한 이미지들의 밑바탕에는 이처럼 지극히 일상적인 공포가 자리하고 있다. 「보증금 돌려받기」에서 그 공포는 주거지 문제를 겪는 여성 청년 화자의 불안과 연결된다. 작가의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쓰인 이 소설은 전세 보증금을 두고 집주인과 세입자 ‘성아’가 벌이는 공방전을 그린다. 실랑이가 길어지는 사이 성아는 무고한 사람을 공격하며 몰려다니는 기괴한 존재들을 반복적으로 목격한다. 입이 찢어지도록 웃고, 창자에서 온갖 쓰레기를 쏟아내는 그것이 곧 도시라는 공간에 오래도록 자리해온 섭리 그 자체임을 알게 된 성아는 가장 기초적인 안전조차 보장받기 어려운 이 도시에서 자신이 받은 위협과 공포를 그대로 돌려주겠다고 마음먹는다.
안전을 위협받고 사회로부터 소외될 위기에 처한 이들을 조명하려는 작가의 시도는 「수선화에 스치는 바람」에서도 이어진다. 물질적 사랑과 정신적 사랑을 완전히 구별해 한 사람에게 하나씩만 베풀겠다는 엄마의 강압적인 규칙 아래, ‘나’는 엄마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대신 쌍둥이 동생 ‘선희’에게 모든 것을 양보하는 역할을 선택했다. 똑같은 모습으로 태어났지만 점차 땅속으로 파고드는 뿌리처럼 초라해진 ‘나’와, ‘나’가 포기한 자원들을 흡수하며 꽃송이처럼 아름다워진 선희. 선희가 인플루언서로 활동하며 많은 이들의 관심과 사랑을 독차지하는 동안, ‘나’는 자신이 희생으로 선희를 키워왔음을 주장하며 선희의 삶을 자기 뜻대로 조종하려 한다. 하지만 과연 선희가 잃은 것 하나 없이 온전하다고 할 수 있을까. 숨겨져 있던 진실이 수면 위로 드러나면서 아슬아슬하게 유지되어왔던 두 사람의 관계는 전혀 다른 국면을 맞게 된다.
「반쪽머리의 천사」는 마찬가지로 주인공 자리에서 물러난 두 청춘의 만남을 그린다. 다리를 다쳐 육상 선수의 꿈을 접고 소도시의 영화관에서 일하는 ‘나’는 어느 날 상영중이던 영화 속에서 불쑥 튀어나온 엑스트라 캐릭터 ‘기주영’을 만나게 된다.
늘 가장 빨랐던 나는 그만큼 세게, 우스꽝스럽게 넘어졌다. 고작 겁에 질려 스스로를 옭아매는 방식으로. 내 뒤에 있던 친구들은 이미 저 앞으로 나아가 멀어져 있었다. 사실, 가장 견딜 수 없던 것은 바로 그 점이었다. 내가 더이상 트랙 위의 주인공이 아니라는 사실. (……) 원래 세계에서 떨어져 나왔다는 점에서, 그리고 뒤늦게 스스로가 조연임을 깨달았다는 점에서 나와 기주영은 꽤 닮았다. (148~150쪽)
영화 속에서 사망한 모습 그대로 후두부가 완전히 뭉개진 채 피를 뚝뚝 흘리는 기주영의 모습이 ‘나’에게 징그럽거나 끔찍하다기보다는 안쓰럽고 애처롭게 느껴지는 이유는, 목적지를 잃은 채 이승과 저승의 경계에 걸쳐 있는 그의 모습에서 자신을 보았기 때문이다. 기주영의 등장에 얽힌 비밀을 풀어가는 과정에서, ‘나’는 오랜만에 넘어질 걱정 없이 있는 힘껏 달리며 해방감을 만끽한다.
소설집을 읽어나갈수록 장르적 쾌감은 점차 강렬해지고, 소설의 무대 역시 일상에서 좀더 낯선 세계를 향해 나아가기 시작한다. SF적 상상력이 빛나는 소설 「소라는 영원히」 속 ‘소라’는 아버지가 다니던 공장에서 손이 절단되는 끔찍한 사고를 겪는다. 접합 수술 이후 사이코메트리 능력을 얻은 소라는 물건을 만질 때마다 밀물처럼 몰려오는 온갖 추잡한 기억을 받아들이는 데 지쳐 결국 스스로 자신의 팔을 자르기에 이른다. 이후 정신병원에 갇힌 소라는 그곳에서 ‘기계 팔’을 이식하게 되는데, 사라진 줄 알았던 능력이 되레 더욱 강력해져 돌아오자 차라리 이 세상의 모든 기억들을 받아들이겠다고 결심한다. 인간은 죽지만 물건에 남은 그 인간의 기억은 사라지지 않는다. 버려진 물건들에 새겨진 무수한 기억들을 수집하면서, 소라는 자신만의 거대한 요새의 몸집을 불려간다.
기억에 관한 고찰은 남은 두 소설 「두번째 해연」과 「안락의 섬」을 통해 구체화된다. 「두번째 해연」의 ‘백연’은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는데, 그의 곁을 지키는 것은 죽은 딸 ‘해연’을 복제한 인조인간 해연뿐이다. 새로이 정립된 딸의 존재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는 백연과는 달리, 정작 해연은 원본 해연의 기억을 온전히 지니고 있기에 자신이 해연이라는 사실에 이질감을 느끼지 못한다. 자신을 딸로 여기지 않으려 안간힘 쓰는 백연을 보면서도 어찌할 도리 없이 애정을 느끼는 해연. 두 사람이 갖는 감정의 격차가 벌어지는 가운데, 소설은 찬찬히 관계의 변화를 좇아나간다. 우연한 기회로 떠난 우주여행에서 예기치 못한 사고로 낯선 행성에 불시착하게 된 둘은, 구조를 기다리며 백연이 살아온 삶에 관해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눈다. 점차 자신이 누구인지를 잃어가는 백연에게 해연은 말한다.
“전 계속 당신의 딸이었고, 당신의 이야기는 여전히 제 안에 있어요. 사라지지 않아요.”(280쪽)
기억하는 한 사라지지 않는다는 믿음은 「안락의 섬」에서도 유효하다. 2100년 지구, 외계인 ‘카르인’의 갑작스러운 방문으로 인류는 혼란에 빠진다. 외계 생명체를 수집, 연구하기 위한 목적으로 인체를 인도받는 대신 인간에게 안락한 죽음을 제공하겠다는 그들의 제안에 따라 ‘나’는 죽음을 앞둔 반려견 ‘플루’와 함께 ‘뉴데스 아일랜드’로 이주한다. 그곳에서 기억을 잃는 병에 걸렸지만 소중한 기억을 그러모아 잡아두려 애쓰는 ‘라미’와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플루가 떠난 후의 삶은 무의미하다고 여기며 죽음만을 바라던 ‘나’의 의식에 조금씩 변화가 찾아들기 시작한다. 무용하게만 느껴졌던 자신의 삶이, 추억이라는 익숙하고도 값진 양분으로 가득차 있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 것이다.
“모든 걸 없는 셈 치고 무로 돌아가는 건 너무 슬프지 않아? 기억이란 쇠퇴하지. 그리고 소중한 것은 다시 생겨나.”(324쪽)
조예은은 설 곳을 잃고 위태롭게 비틀거리는 인물들에게 자신만의 삶을 꾸릴 수 있는 강렬한 동기 하나씩을 쥐여준다. 그것이 주로 낯설고 괴기스러운 형상을 지니고 있음에도 끔찍하게만 읽히지 않는 이유는, 인물들이 안전하게 존립하기를 바라는 작가의 사려 깊은 마음이 서려 있기 때문일 것이다. 외부와 차단된 가장 어둡고 음습한 곳에서 세상에서 제일 완벽한 치즈가 완성되는 것처럼, 상처 입은 자들은 자신만의 공간에서 저마다의 방식으로 벼르며 새로운 존재로 거듭날 준비를 마쳤다. 조예은이 마법처럼 부려놓는 회복기를 거친 인물들은 어떤 운명에도 쉬이 굴복하지 않고 맞받아칠 수 있는 힘을 갖추게 된다. 그들은 죽음의 유혹을 뿌리치고 삶으로 돌아온다. “혼자 감당해야 할 외로움이 어느 정도인지 충분히 체감했음에도”, 생은 도저히 “거절할 수 없”(327쪽)는 것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