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좋아서,
조금은 더 잘하고도 싶어서
계속하는 마음에 대하여
어릴 때 바이올린을 배운 후 늘 음악과 함께하는 삶을 꿈꿨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꿈과 멀어지고 의학을 전공으로 택한 저자는, 성인이 되고 나서 몇 년 만에 다시 활을 잡았을 때 바이올린이라는 악기와 생각보다 더 멀어졌다고 느낀다. 그렇게 오랜만에 내본 소리에 절망을 느끼기도 잠시, 곧 악기 연습에 점차 많은 시간을 쏟아가며 압박감으로 가득한 현실에서 위로와 활기를 얻어나간다.
레슨을 통해 기초부터 다시 갈고닦으면서 서서히 연주의 감을 찾아가는 저자는 악기를 통해 맛보는 변화를 점점 즐기게 된다. 어느덧 시간이 날 때만 취미 활동을 즐기는 단계를 지나, 시간이 없을 때도 손가락이 굳지 않게 뭐라도 하고 싶어 하는 지경에 이른다. 급기야 집에서 한밤중에도 할 수 있는 연습을 계속하는가 하면, 시험이 끝나는 대로 연습실로 직행하며 손가락의 움직임을 되살려나가기도 한다. 때로는 피아노를 배우면서 오히려 바이올린에 대한 애정을 다시 절감하기도 한다. 아마추어에게도 넘치게 가르쳐주는 선생님 덕에 값진 테크닉을 익히면서 좌절과 환희 사이를 넘나들 때도 있다.
연주력만 달라지는 게 아니다. 손가락 굳은살은 더 딱딱해지고 목에 자리 잡은 자국은 더 뚜렷해진다. 레슨 선생님의 권유대로 바꾼 손톱 모양은 앞으로도 유지할 작정이라 네일 아트 같은 건 꿈도 못 꾼다. 씀씀이마저 달라진다. 지출에서 레슨비나 연습실 비용이 생각보다 큰 부분을 차지하는 현실에 가끔씩 놀라면서도, 어느덧 악기 업그레이드를 위해 적금이 필요할지 헤아려본다. 산속에 지은 집에 살며 층간 소음 따위 걱정하지 않고 맘껏 활을 그어대며 살 수 있는 미래를 꿈꿔보는 순간도 있다. 이러한 저자의 생활상을 목격하다 보면 새삼 떠올리게 된다. 어떤 대상에 정신 못 차리게 빠져드는 이들에게는 시간과 돈의 개념도 달라진다는 진리를.
저자는 바이올린이나 피아노를 연습하면서 혼자서 실력 변화를 감지하는 순간도 물론 소중하게 생각하지만 앙상블이나 오케스트라에 속해 다른 연주자들과 함께 연주할 때, 혹은 노래에 맞춰 반주할 때 느끼는 즐거움 역시 각별하게 여긴다. 수험생 시절 오케스트라 활동을 할 수 있는 전공을 검색해본 것이 진학에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고 고백할 정도다. 그만큼 다른 사람들과 함께 연주할 수 있는 기회를 원했던 저자는 정신없이 돌아가는 학교생활에서도 오케스트라 활동을 통해 잊지 못할 시간을 만들어나간다. 음악에 대한 애정이나 합주 실력을 키우는 것은 물론이고 시험에 대한 스트레스를 극복할 힘도 얻는다. 다른 연주자들과 무대에 오르기까지의 여정을 함께하며 동지애나 리더십과 같은, 예상하지 않았던 가치까지도 발견한다. 이러한 저자의 체험담은 아마추어 오케스트라나 밴드에서 연주해본 독자들에게 좋았던 어느 때를 상기시킬 것이다. 그리고 무엇이든 좋아서 하는 것을 좀 더 잘하고도 싶다는 바람을 가진 모든 이들에게 신선한 동력을 전해줄 것이다.
서울시향 악장이던 스베틀린 루세브의 바이올린 소리는 촉촉한 흙처럼 부드러웠지만 카리스마가 넘쳤다. 나는 맨 앞 좌석에 앉아 피아노, 첼로, 바이올린이 만들어내는, 말도 안 되게 아름다운 음들을 정신없이 삼켰다. 동시에 애써 눌러두었던 어떤 감정이 점점 터져 나오려는 것을 느꼈다. 듣는 것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직접 연주를 하고 싶었다. 내 맘대로 연주하는 것 말고, 제대로 연주하는 법을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언젠가 내가 상상하는 아름다운 음들을 밖으로 꺼낼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1부 ‘하필이면 악기에 빠져버려서’ 중에서
프로 연주자를 동경하는 의대생이
공부보다 악기에 마음을 기울이다 생각한 것들
바쁘고 또 바쁘게 돌아가는 생활 속에서 악기 연습을 해본 사람들은 안다. 뭔가를 잘해보겠다고 없는 시간을 쥐어짜는 게 얼마나 만만찮은 일인지. 그러나 다행히도 만사가 늘 비정하지만은 않다. 어렵사리 시간을 내서 연습을 거듭하다 보면, 쳐보고 싶었던 곡을 흉내 내는 식으로라도 연주하게 되는 기쁨을 가끔은 누릴 수 있다. 저자 역시 그러한 순간의 짜릿함을 잘 아는 터라 여기저기 악기를 메고 다니며 짬을 내서 연습을 이어간다. 집 화장실에서부터 동아리 방, 동네 음악학원, 악기 연습실 등을 분주히 오간다. 그렇게 조금 나은 단계에 닿아보려는 저자의 노력은, 어쩌면 정작 ‘해야 할 다른 일’을 당면한 처지라 오히려 더 끈질기게 이어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저자의 눈앞에는 공부해야 할 것들이 늘 쌓여 있다. 배우고 외우고 시험 보는 일을 반복해야 하는 의대생에게 공부 시간을 확보하는 것은 당연히 중요하다. 그런데 공부할 것들을 쌓아두고 사는 저자는 악기와 함께하는 시간도 최대한 확보하고 싶어 한다. 좀 더 만족스러운 연주를 목표로 하는 이에게 중요한 건 무엇보다 연습 시간이기 때문이다. 시험을 보고 돌아서면 또 다른 시험이 닥치는 생활을 해나가면서도 악기 실력을 키우고 싶어 하는 건 저자에게 꽤나 난감한 문제다. 전공 공부와 음악 사이를 오가다 보면 시간뿐만 아니라 체력도 모자라다. 그렇게 ‘아무도 강요하지 않은’ 고생길에 들어서 딜레마를 겪으면서도, 활을 잡은 손이 어쩌다 정말 마음에 드는 소리를 만들어낸 날에는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귀가한다.
이렇게 공부보다 악기로부터 특별한 힘을 충전하며 사는 저자의 글은 이른바 ‘이과 사람’에게 어필할 색채도 담고 있다. 책에는 저자가 의대생이라는 캐릭터로서 악기를 떠올리는 대목도 자주 나온다. 예컨대 근골격계 해부 실습을 하는 순간에도 저자는 카데바(기증된 시신)에서 바이올린 연주와 관련된 신체 부위를 다른 어느 곳보다 유심히 살펴보고 싶어 한다. 해부학 교과서의 팔 챕터를 밤새 정독한 저자는 실습에서 비브라토를 할 때 중요한 근육, 지판을 누르는 손가락의 움직임과 관련된 관절 등을 유달리 날카롭게 관찰한다. 한편 산과학 수업에서는 태아의 발달에 관한 ‘크리티컬 피리어드’에 대해 배우며 자신이 바이올린 연주자로 성장할 수 있는 시점을 지나쳐버린 것에 대해 진한 아쉬움을 느낀다. 어느 날엔 신경과나 재활의학과에서 환자의 근력 정도를 평가하는 방법을 외우다가 이상적인 활 쓰기가 가능한 근력 상태를 떠올리고는 또 다시 바이올린을 꺼내 들기도 한다.
읽는 이에 따라서는 소위 ‘덕후 취향’이라고 느낄 수도 있을 에피소드가 군데군데 녹아 있지만, 저자의 기록은 의과대학 생활에 관심을 지닌 독자들에게도 매력적인 텍스트가 될 만하다. 학기 중에는 다양한 과목의 시험이 어떤 식으로 이어지는지, 실습에는 어떤 마음으로 임하는지, 마음이 맞는 친구들과 어떤 식으로 시험 스트레스를 이겨내는지, 또 의대 오케스트라는 또 어떤 식으로 공연을 준비하는지 등에 대해 저자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다른 전공에 대해 단순히 호기심을 가져본 이들부터 진로에 대해 고민하는 청소년 및 학부모들에까지 흥미롭게 다가갈 것이다.
해부 실습에서 내가 가장 고대하던 수업 중 하나는 근육과 뼈에 대해 배우는 근골격계 파트였다. 나는 그중에서도 팔 부분에 관심이 많았는데, 악기를 연주할 때 쓰이는 근육을 제대로 이해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특히 레슨 때마다 선생님이 강조하시던 새끼손가락 근육, 정확히 말하면 새끼두덩근만큼은 꼭 직접 보고 싶었다.
-2부 ‘할 일이 산더미 같을수록 악기는 더 건드려보고 싶다’ 중에서
어찌 보면 뼛속까지 이과 체질이면서도 때로는 공연장에서도 눈물을 참기 힘들어하는 저자의 솔직한 이야기를 읽으며 누군가는 취미를 대하는 마음에 공감할 것이다. 누군가는 브람스, 베토벤, 브루흐, 드보르작 등의 작품이 언급될 때마다 반가워하며 책장을 넘길 수도 있겠다. 짐작하건대 방구석에 방치했던 악기를 몇 년 만에 다시 꺼내 들 독자도 더러 있을 것 같다. 어떤 이의 열의는 다른 이들에게 그런 식으로도 전파되는 법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