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정끝별의 첫 산문집 『깨끗한 거절은 절반의 선물』이 민음사에서 출간되었다. 가족들과 함께한 추억 속 에피소드, 여느 문장으로도 요약되거나 정리되지 않는 아버지에 대한 마음, 아이들을 키우며 다시 배운 인생, 시와 문학 속에서 깨치는 앎에 대한 사색 등 『깨끗한 거절은 절반의 선물』은 시인이고 평론가이며 교수이자, 딸이고 엄마이고 아내인 한 사람이 자신의 인생을 기억하고 기록하며 기념하는 과정에서 얻어진 가장 순도 높은 이야기들이다.
살다 보면 이런 사람 한 명쯤 알아두고 싶을 때가 있다. 때로는 언니, 때로는 이모, 이따금 선생님이자 주로 친구 같은 사람이 내 옆에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할 때가 있다. 이런저런 이유로 남들에게는 털어놓지 못하는 비밀이 생길 때도 그렇지만, 스스로에게 기분 나쁘지 않은 잔소리를 해 줄 사람이 필요할 때도 그렇다. 이게 좋을까, 저게 좋을까, 갈팡질팡하며 선택하지 못하고 있을 때도 마찬가지다.
이 산문집은 우리가 삶의 잔잔한 방황 속에서 헤맬 때, 그러나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권태에 지쳐 있을 때, 친근한 듯 따끔하고 웃긴 듯 날카롭게 삶의 소중한 지침들을 들려준다. 때로는 강렬한 시구처럼, 때로는 흥미로운 소설처럼, 이따금 명쾌한 평론처럼 그 목소리도 다양하다. 예능 다큐처럼 가족들의 면면을 솔직하게 비추는가 하면 텅 빈 영화관에서 상영되는 작품처럼 내밀한 속엣말을 들려주기도 하는 이 책을 읽는 동안 우리가 스며들게 되는 정끝별식 인생관은 이런 것이다.
인생재난 방지대책 훈련요강
인생을 살아가면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어리석은 기대다. 가능하지도 않을 뿐더러 그런 인생이 좋은 인생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상처는, 그것을 잘 이해하고 수용할 수만 있다면 돈을 주면서까지 얻어야 하는 어떤 가치 있는 것보다 더, 어쩌면 그것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소중한 자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처를 이해하고 수용하려면 필요한 태도가 있다. 그것이 바로 시인이 말하는 ‘인생재난 방지대책 훈련요강’의 핵심이다. 가령 이런 것이다. “눅눅한 쿠키는 부드럽다. 쿠키 맛은 재료와 요리법에 따라 무한하다. 쿠키 아니어도 맛있는 건 많다.” 쿠키는 바삭해야 한다는 편견에서 벗어나면, 나아가 쿠키 아니라도 세상에 맛있는 건 많다는 걸 받아들이면, 쿠키 굽기에 실패란 없으며 실패조차 쿠키 아닌 다른 세상을 맛보기 위해 필요했던 길이 될 수 있다.
거절의 기술
낙법에 도통할수록 삶을 가볍게 살아갈 수 있다.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깨끗한 거절은 절반의 선물’은 시인 아버지의 입말에서 포착된 표현이다. 깨끗한 거절이야말로 청탁할 수밖에 없는 상대를 덜 비루하게 하고 덜 상처받게 하려는 배려이기도 하다. 우리가 거절해야 할 때 거절하지 못하는 건 거기서 기대하는 게 있거나 의지하는 게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거절하는 것은 거래 혹은 권력으로부터의 자유이고 거절할 수 있다는 게 또 다른 자유이자 권력이기도 하다.
가로등 점등인
이 책을 읽은 뒤 우리는 자신의 롤모델로 하나의 직업을 추가할 수 있다. 바로 ‘가로등 점등인’이다. 가로등 점등인이란 이 책에서 시인이 어릴 적 동화책에서 읽었던 것으로 추억하는 단어이다. 가로등지기라고도 불리는 이 일은 석유나 가스를 이용해 거리를 밝히는 가로등에 저녁에는 점등을, 아침에는 소등을 했던 사람을 일컫는다. 삶의 어두운 길목에 환한 불을 비추듯 이 책에 수록된 편편의 글은 그때 그 사람들과 그때 그 시절들, 그리고 지금 우리 곁에 있는 사람과 지금 이 순간에 불을 밝혀 준다. 한 권의 ‘가로등지기’ 같은 이 책이 우리 삶의 어둠을 명랑하게 조율해 줄 것이다. 우리를 말갛게 해 주는 이 책과 함께라면 불행도 노래할 수 있다. 생활도 예술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