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줍은 소년이 미 연방하원의원이 되기까지
불안과 가난의 시대에 미국으로 건너가 누구도 꿔보지 못한 꿈을 꾸고 그 열정으로 미 연방하원의원이 된 최초의 한국인. 가난한 유학생에서 성공한 기업가로, 또다시 정치가로 변신한 김창준의 드라마같은 인생스토리가 한 권의 책으로 묶여 나왔다. 70년 동안 저자가 어떻게 자신을 변화시키며 꿈을 키워나갔는지를 고스란히 담아냈다.
꿈이 없던 청년 미국에 가다
소년 김창준은 될성부른 떡잎은 아니었다. 남 앞에 나서는 것을 두려워하는 평범한 소년이었다. 학창시절 연극반 활동으로 자기 속에 숨어있는 또다른 에너지와 만나고 대학입시에 실패하자 양복을 맞춰 입고 지르박을 추러다녔던 요즘 말로 꽤나 노는 아이였다. 당시 그에게는 꿈이 없었기 때문에 자신의 삶에 무책임한 시기를 보냈다고 한다. 미래에 대한 소망이나 도전정신을 찾아볼 수 없었던 스무 살 시절이었다.
그는 한참을 방황하다 1961년 미국으로 갔다. 캘리포니아의 채피대학 입학허가서와 200달러가 그가 가진 전부였다. 식당에서 설거지를 하고 신문배달을 하면서 그는 처음으로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되었다. 그때부터 그는 인생을 스스로 설계하는 리더가 된 것이다. 미래에 대한 소망을 갖게 되니 일 분 일 초도 허투루 흘려보낼 수 없었다고 그는 회상한다. 수업 내용을 통째로 외우고 화장실에 앉아 영어잡지를 큰소리로 읽었다.
채피대학을 거쳐 남가주대학에서 토목공학을, 대학원에서 환경공학을 전공한 후 도시계획을 전문으로 하는 회사에 입사해 미국에 간 지 8년 만에 드디어 밥은 먹고 살게 되었다. 1977년 직장을 나와 하수처리를 전문으로 하는 도시계획사업을 시작했다. 중소기업 지원 자금을 받아 파트타임 여직원 한 명을 채용해서 시작했던 제이킴 엔지니어스JayKim Engineers는 15년 만에 직원 130명에 연 매출 1,000만 달러의 큰 회사로 성장했다. 캘리포니아 주 500 대 설계회사로 꼽혔다. 성공한 사업가의 삶에 만족할 만했지만 그는 세월이 흘러가는 대로 자신의 삶을 내버려두지 않았다.
0퍼센트의 확률에 도전하다
그는 꿈이 없다고 해서 정말 꿈이 없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마음속에 무언가는 있는데 그게 무엇인지 실체가 명확하지 않을 뿐, 다그치지 말아야 한다. 자기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몰라 거리를 헤매고 다니는 시간도 결국 마음속의 욕망을 확고하게 만드는 준비기간일 수 있기 때문이다.
김창준 역시 다이아몬드 바 시의 시의원 출마 기회가 오기 전까지 자신의 꿈이 정치에 있는지 전혀 몰랐다. 그 당시 그가 당선될 확률은 0퍼센트였지만 그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라면 떨어지더라도 도전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마음의 소리를 듣고 망설임 없이 결심했다.
그는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시의원에 당선되었고 이제 그의 성공은 곧 한국인의 성공이 되었다. 시의 일거리를 민간회사에 위탁하는 과감한 방식을 도입, 다이아몬드 바 시의 예산을 100만 달러 절감하는 성공을 거둔 그는 시장에 도전해서도 성공을 이뤄냈다. 역시 한국인 최초의 시장이었다. 그의 마음속에는 더 큰 소망이 자라고 있었다.
아메리칸 드림의 상징이 되다
그의 꿈은 미국 정치의 중앙무대에 서는 것이었다. 이민 1세대가 연방 정치 무대에 선다는 것. 그것이 과연 가능할까. 너무도 갑작스레 기회는 찾아왔다. 마침 그가 일하는 지역에 새로운 선거구가 생긴 것이다.
한마디로 무모한 도전이었다. 60만 명이 넘는 백인지역구에서 그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6%에 불과했다. 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그는 1992년 11월, 미 연방하원의원이 되었다.
최초의 한국인 연방의원이면서 유일한 아시아계 공화당 의원이었다. 그가 하는 일마다 ‘최초의’, ‘유일한’이란 수식어가 붙고 미국 고등학교 역사 교과서에 아메리칸 드림의 상징적인 인물로 소개되었다.
연방하원의원은 지역구를 관리해야 하기 때문에 정말 일이 많았다. 주중에는 회의에 빠짐없이 참석하고 금요일에는 LA행 밤 비행기에 올랐다. 지역구에서 올린 안건들을 공부하느라 비행기에서조차 눈 붙일 새가 없었다. 주말에 그를 기다리고 있던 수많은 지역구민들을 만나 지역구 문제를 해결하고 다시 밤 비행기에 올라 워싱턴에서 아침을 맞는 나날들이었다.
함께 있는 줄 몰랐던 성공과 실패
본래 백인들의 정당인 공화당에서 김창준은 ‘아메리칸 드림’의 표상으로 급부상했다. 그는 거의 매일 매스컴에 등장해 공화당의 정책을 이야기했다. 초선의원으로는 드물게 이름이 널리 알려졌고 주변에서는 정치인으로 완벽하게 성공했다고 부러워했다. 저자도 우쭐한 마음이 들었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정치판 새내기였던 그는 자신이 유일한 아시아계 공화당 의원이란 것이 표적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민주당 지지성향의 LA타임스는 그가 한국 기업의 돈을 선거자금으로 쓴 의혹이 있다고 보도했다. 물론 사실이 아니었다. 또 자신이 운영하는 회사에서 월급을 받고 회사사무실을 임대료를 내지 않고 선거사무실로 사용한 것을 부정한 행위로 몰았다.
그는 지역신문을 비롯해 한인신문, 한국 신문에 이르기까지 만신창이가 되도록 두들겨맞았고 그를 도운 참모들이며 한인교포들까지 수사를 받았다. 연일 정치자금 의혹에 휘말리면서도 그는 3선에 성공했지만 결국 4선은 포기해야 했다.
미국에서 입법을 다루는 국회의원의 부정은 거의 감옥형의 가혹한 처벌을 받는다. 그리고 다시는 ‘존경하는 의원님(Honorable Congressman)’으로 불리지 못한다. 물론 저자는 지금도 3선 이상 의원만 받을 수 있는 의원연금을 받는 ‘존경하는 의원님’이다.
그렇게 그는 의회를 떠났다. 5년 동안 변호사 비용을 대느라 재산을 잃었고 회사도 망해버렸다. 유학시절의 가난 속에서도 3남매를 낳아 기르며 키워간 가정도 파탄이 났고 친구들도 모두 떠나가고 홀로 남았다. 피땀 흘려 이룩한 모든 것이 일순간에 무너졌다. 그의 가슴 속에는 아무런 희망도 남아 있지 않았다.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았고 살아야 할 이유도 없었다.
그 막막한 어둠 속에서 저자를 일으켜 세우는 것이 있었다. 그가 연방하원의원 선거에 출마했을 때,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이 주머니를 털어 후원금을 보내주었다. 자식들한테 받은 용돈을 보내준 할머니도 있었고 세뱃돈을 모은 저금통을 깨뜨린 어린이도 있었다. 그의 얼굴을 본 적도 없고 손 한 번 잡아본 적도 없는 이들이었지만, 그가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기꺼이 도와주었던 것이다.
김창준은 그분들의 따뜻한 응원을 떠올리며 죽음 직전의 좌절을 딛고 다시 일어섰다. 이제는 자신이 받은 것을 되돌려주어야 할 때가 된 것이다.
실패한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다
이제 김창준의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 그는 미국의 국회의사당에서 활동한 유일한 한국인으로서 자신의 경험을 아낌없이 나누려 한다. 미국국회를 속속들이 내보임으로써 미국사회를 훨씬 깊이 이해할 수 있도록 돕겠다고 나섰다. 날로 복잡하게 얽혀가는 국제관계 속에서 우리나라와 가장 밀접한 미국의 속내를 아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저는 조국에 빚이 많은 사람입니다. 아무리 애를 써도 그동안 받아온 사랑의 절반도 돌려드릴 수 없는 줄 잘 알지만 힘닿는 대로 미국국회의 속내를 알리고 미국국회와 한국국회를 비교하는 일을 계속해나갈 것입니다. 그것만이 제가 조국의 고마움에 보답하는 길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는 한국정치가 발전하고 대한민국 국민이 행복해지는 8가지 제언을 내놓는데도 망설임이 없다. 국민투표를 활용하고, 국민발의제를 실시하자, 공천권을 국민에게 돌려주고, 비례대표제를 없애라, 국회의원의 윤리를 강화하고, 집회는 평화롭게 운영하라, 부통령제를 도입하고, 국회의원의 장관 겸직을 없애자는 게 그것이다.
정치계를 떠난 지 10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그는 아직도 유일한 한국계 미 연방하원의원이다. 그래서 그는 하루빨리 하원의원, 상원의원 그리고 주지사와 장관도 나와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 책의 수익금으로 인재양성 프로젝트를 운용할 계획을 갖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은퇴한 정치인의 인생정리프로젝트가 아니라 끊임없이 인생을 변화시켜온 김창준의 제2의 인생의 시작을 알리는 서막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