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태어났을까, 아무튼 이 세계에 주어졌으니..
공空에게 끊임없이 묻는 한 수행자의 고백
저자는 ‘공(空)’이라는 추상적 개념에 구체성을 부여하기 위해 수학, 철학, 예술 등 다양한 학문의 개념을 종횡무진 넘나든다. 요소가 없는 집합인 ‘공집합(空集合)’을 통해 ‘없는 것의 있음’을 사유하고, 가로와 세로의 틀로는 셈할 수 없는 ‘대각선(對角線)’을 통해 존재의 나머지 부분을 탐색한다. 또한 모든 것이 사라지지만 동시에 모든 것을 위치 짓는 ‘소실점(消失点)’을 통해 세계를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이러한 독창적인 개념들은 하이데거, 사르트르, 들뢰즈 등 서양 철학자들의 사유와 만나고, 노장사상과 주역 등 동양 철학의 지혜와 겹쳐지며 지금껏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차원의 존재론을 펼쳐 보인다. 『無偶 (무우)』는 익숙한 개념들을 낯설게 보고, 낯선 개념들을 통해 익숙한 세계를 새롭게 보도록 이끄는 지적 자극으로 가득하다.
공空이 색色이 되고 색色이 공空이 되는 길
그 물음의 사막에서 마침내 무와 조우하다
이 책은 단순한 철학적 담론에 그치지 않는다. 저자는 “나는 21세기 한국 불교의 중이다”라고 자신의 위치를 분명히 하며, 한국 불교가 ‘본성론’이라는 틀에 갇혀 있음을 날카롭게 비판한다. 그는 신적인 초월이나 관념의 유희에 기대지 않고, 이 땅에 발 딛고 선 수행자로서 과학적 사고와 유신론적 태도가 지배하는 현대 사회에서 나아가야 할 길을 모색한다. “신이 없이도 살 수 있다는 것을 한 번쯤은 보여주고 싶었다”는 저자의 말처럼, 이 책은 모든 주어진 이념과 믿음을 넘어, 스스로의 힘으로 존재의 의미를 구성하고자 하는 모든 이들에게 깊은 울림과 용기를 선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