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탄과 권총과 펜’으로 요약된 삶
카뮈에게 영감을 준 작가이자 격동의 삶을 살아간 혁명가,
보리스 사빈코프의 상징적 작품 『창백한 말』
장동건, 이준호, 김상중 주연의 영화 〈아나키스트〉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너 제2의 사빈코프가 되고 싶다고 했지?” 사빈코프는 당시 많은 혁명가들의 목표이자 이상이었다. 수많은 권력자들을 공포에 떨게 한 절정의 암살 능력과 카뮈를 비롯하여 많은 문인들에게 영감을 준 그의 탁월한 글들을 보면 그럴 만도 하다. 하지만 사빈코프가 진정 혁명가들의 마음을 훔칠 수 있었던 이유는 따로 있다. 위계적 권력에 대한 그치지 않는 투쟁, 민중의 자유를 믿고 그것을 위해 온몸을 불살랐던 삶. 민중의 이름으로 혁명에 성공한 볼셰비키가 점차 권력 그 자체만을 탐하는 괴물이 되어가는 와중에도 사빈코프는 약자의 편에, 민중의 편에 서길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바위보단 계란이 되길 택했고, 그래서 그의 삶은 숱한 고난과 고초로 가득했다.
보리스 사빈코프의 『창백한 말』은 작가의 생애와 문학적 지향이 극적으로 교차하는 작품이다. 사회혁명당의 무장투쟁 조직에서 황제 직속 인사 암살을 주도했던 혁명가 사빈코프는 이 소설을 통해 자신의 테러리스트로서의 경험과 내면적 갈등을 깊이 성찰했다. 작품에 등장하는 하인리히, 표도르, 에르나는 그가 혁명 운동에서 실제로 함께했던 동지들을 모델로 하였으며, 특히 등장인물 이반(바냐)은 작가 자신의 분신으로 그려진다. 이반과 에르나의 인간적인 고뇌, 조지가 겪는 윤리적 모순과 고통은 사빈코프가 현실에서 경험한 심리적 충돌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사빈코프는 숭고한 관념과 폭력의 모순을 도스토옙스키적인 방식으로 대비시켜, 『창백한 말』이 단순한 정치 소설을 넘어 러시아 문학의 깊이 있는 고전으로 평가받는 데 기여했다.
폭력과 구원의 경계에서 길을 잃은 혁명가의 고백
혁명과 암살, 사랑과 죄의식 사이에서 탄생한 걸작, 『창백한 말』
“사랑도 없고 평화도 없고 생명도 없다.
오직 죽음이 있을 뿐이다.
죽음은 왕관이고, 죽음은 가시관이다.“ (본문)
『창백한 말』은 1900년대 초 러시아제국을 배경으로, 암살과 혁명이라는 긴박한 사건들 속에 인물들이 얽히며 펼쳐지는 흥미로운 소설이다. 주인공 조지와 그를 둘러싼 두 가지 삼각관계(에르나-조지-옐레나, 조지-옐레나-그녀의 남편)는 소설의 긴장감을 높이는 동시에 독자의 흥미를 자극한다. 빠르고 직설적인 문체로 전개되는 암살 계획과 첩보 작전의 디테일은 미스터리 스릴러로서의 재미를 충분히 선사하며, 동시에 인물들이 마주하는 고뇌와 윤리적 질문을 통해 철학적 깊이까지 제공한다. 더불어 요한계시록에서 모티브를 가져온 종말과 파멸의 어두운 이미지들이 작품 전체에 드리워져 있어, 강렬한 분위기와 높은 문학성을 함께 경험할 수 있는 작품이다.
『창백한 말』은 오늘날 독자들에게도 여전히 깊은 울림을 전한다. 현대 사회 역시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 그리고 윤리와 폭력이라는 상반된 개념의 충돌을 끊임없이 경험하고 있다. 사빈코프가 생생히 묘사한 내적 갈등과 고뇌는 시대를 넘어 오늘날의 독자들이 겪는 도덕적 혼란과 실존적 질문에 직결된다. 특히 이 소설은 ‘정의’를 위한 폭력이 과연 정당화될 수 있는지, 숭고한 이상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개인의 내면이 어떻게 파괴될 수 있는지를 냉정하게 성찰하게 만든다. 빠른 템포의 서사, 치밀한 인물 묘사, 그리고 강렬한 철학적 질문까지 함께 담고 있는 『창백한 말』은 단순히 러시아 혁명기를 다룬 역사소설의 영역을 넘어, 현대를 살아가는 독자들이 각자의 내면을 되돌아보도록 하는 문학적 거울과도 같은 역할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