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정러시아와 소비에트 체제 모두에 맞선 혁명가, 사빈코프
모두가 적이 된 시대 한복판에서
그가 남긴 거짓 없는 고백
“나는 어쩌다 악마의 농간질에
러시아인으로 태어나고 말았다.” (본문)
보리스 사빈코프는 러시아 역사상 가장 극단적인 삶을 산 인물 중 하나였다. 그는 왕정 타도를 위해 폭력을 주저하지 않았던 무정부주의적 사회혁명당 테러조직의 핵심 인물이자, 플레베 내무장관과 세르게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 암살을 성공시킨 테러계획의 설계자였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도스토옙스키와 니체의 영향을 깊이 받은 문학가이기도 했다. 망명지 파리에서 그는 "롭신"이라는 가명으로 글을 쓰며, 혁명가의 냉혹한 현실과 도덕적 고뇌를 문학의 언어로 형상화했다. 사빈코프의 작품은 혁명의 열정과 피, 윤리적 질문과 인간 내면의 균열을 직시하는 독특한 깊이를 지녔다. 그가 묘사하는 테러는 단지 정치적 행위가 아니라, 인간 존재를 시험하는 실존의 무대였다. 이처럼 직접 무장투쟁에 몸을 던졌던 경험을 토대로 문학을 쓴 작가는 세계적으로도 드물며, 그의 글은 단순한 ‘혁명 문학’을 넘어선 심리적·철학적 깊이를 지닌다.
이 작품 『검은 말』은 이렇듯 독특한 삶을 산 사빈코프의 한 격정적 시기를 조명하고 있다. 러시아 2월 혁명의 주역 중 하나였던 그는 임시정부의 군사 총지휘관이자 국방차관으로서 혁명 정부를 이끌었지만, 곧이어 볼셰비키가 정권을 장악하자 즉각 무기를 들고 그들에 맞섰다. 혁명의 한복판에서 시작된 이 반혁명의 길은 역설적이면서도 필연적인 선택이었다. 그는 자유를 믿었고, 그 자유를 또 다른 독재로 삼킨 이들을 단호히 거부했다. 사빈코프의 궁극적인 투쟁 목표는 ‘민중 혁명의 완수’였으며, 그는 구체제뿐 아니라 볼셰비키의 일당독재에도 반대하며 ‘제3의 러시아’를 꿈꾸었다. 러시아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농민 계층에 주목한 그는 백군 세력이 쇠퇴하자 농민 반란 세력인 ‘녹색군’에 합류하여 마지막 투쟁을 이어나갔다. 『검은 말』은 바로 이 역사적 전환기의 소용돌이 속에서, 사빈코프 자신이 겪은 내면의 갈등과 윤리적 고뇌를 고스란히 담아낸 소설이다. 혁명의 이상과 현실, 신념과 회의, 기억과 책임 사이에서 흔들리는 인간의 초상이 이 작품 속에 생생히 살아 있다.
거대한 역사를 직조하는 작은 인간들의 이야기
“예고로프의 집은 불타고 그의 아들은 살해됐다.
브레제의 아버지도 살해됐다. 페쟈의 어머니도 살해됐다.
나는 그들이 왜 증오하는지 안다.
하지만 나는 무엇 때문에 증오하는가?”(본문)
『검은 말』은 사빈코프가 혁명가로서의 생애 후반기에 쓴 작품으로, 단순한 정치 소설이 아닌 내면의 드라마를 품은 독창적인 심리소설이다. 이 작품은 러시아 내전이라는 비극적 혼돈 속에서 살아남으려는 백군 장교들의 심리,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고뇌하고 흔들리는 주인공 ‘유리 니콜라예비치’의 내면을 밀도 높게 그려낸다. 특히 본문은 주인공의 활동 공간에 따라 3부로 나뉜 일기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날것의 고백과 심리적 격동이 생생하게 드러난다. 혁명 전사로 활동했던 과거를 지닌 ‘유리’는 볼셰비키의 전제 권력에 맞서 백군 편에 서지만, 그 안에서도 회의와 살인하는 일의 윤리적 갈등에 끊임없이 시달린다. 그의 곁에는 이상과 충성 사이에서 갈등하는 청년 ‘페쟈’, 냉소적인 현실주의자 ‘브레제’, 그리고 과거의 연인이자 정반대의 신념을 지닌 ‘올가’가 등장해 유리의 내면에 계속해서 균열을 일으킨다. 이들은 어떤 신념도 온전히 믿지 못한 채 과거의 권위와 미래의 공허 사이에서 방황하며, 독자는 단순히 ‘누가 옳은가’라는 도식을 넘어서 ‘무엇이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가’라는 깊은 질문과 마주하게 된다.
비슷한 제목, 일기 형식, 반복되는 인용문과 공통 인물의 등장 등으로 인해 『검은 말』은 1909년 발표된 사빈코프의 전작 『창백한 말』의 연작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작품이 돋보이는 진정한 지점은, 사빈코프 특유의 응축된 문장과 극단적 상황 속에서의 인간 심리를 정밀하게 파고드는 통찰에 있다. 그는 전투 장면보다 인물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가는 감정의 그늘과 순간의 망설임을 통해 정치적 투쟁을 인간 내면의 문제로 확장시키며 독자에게 진정한 의미의 ‘혁명’이란 무엇인가를 되묻는다. 이로써 『검은 말』은 적군, 백군, 녹색군 등 당대 러시아 민중 앞에 놓인 혼란한 교차로와 그에 따른 실존적 갈등을 문학적으로 가장 정교하게 형상화한 문제작으로 평가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