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의 역사, 역사의 사람들을 품어낸 높이 2.7m 길이 17m 벽그림
본디 억새와 관목으로 이루어진 개활지였으나 세월이 흘러 울창한 숲이 된 그곳을 그림책 작가 김영화가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그 숲의 현재와 과거의 이야기를 그렸습니다. 2023년 겨울부터 2024년 초여름까지 꼬박 7개월 동안 작가는 수십 차례 현장 답사를 하고 작업실로 돌아와, 3면 벽에 온장 한지를 이어붙이고 하루 16시간씩 사다리를 타고 오르내리며 오직 세필 붓 하나로만 수십만 번의 선을 그었습니다. 그렇게 130개의 붓펜을 닳아 없앤 끝에 높이 2.7미터 길이 17미 터의 벽화를 완성했습니다.
27폭 4.2미터 병풍책에 담은 북받친밭, 오늘의 풍경과 77년 전의 이야기들
이 책은 그 그림과 그 이야기를 담은 병풍 형태의 그림책입니다. 병풍의 앞면은 오늘날 숲의 겨 울부터 초여름까지의 시간을 왼쪽에서부터 오른쪽으로 이어 한 공간에 담았고, 뒷면은 4·3 당시 겨울부터 초여름까지 그곳에서 피란생활을 하던 사람들과, 항쟁 끝에 스러져간 사람들의 이야기 를 시간순으로 펼쳐놓았습니다. 울창한 숲으로 변한 오늘의 북받친밭은 눈이 내려쌓이고 복수초가 그 눈을 녹이고 우람한 팥배 나무가 봄잎을 내며 종낭꽃 하얗게 떨어지는 심상해서 아름다운 자연의 모습입니다. 그 속에서 오래전 슬픈 이야기를 기억하는 듯 신령스런 눈빛의 까마귀들이 수시로 찾아오는 화가를 맞이하 지요.
억새와 관목이 자라는 과거의 북받친밭은 그곳에 들었던 사람들의 신산난고가 이어지는 역사의 현장입니다. 작가는 그 아픈 역사를 주관적으로 해석하지 않습니다. 그곳을 찾았던 사람들 - 피 란민과 무장대, 토벌대들의 증언들 그대로 옮겨놓음으로써 독자들에게 해석의 공간을 마련해 놓 을 뿐입니다.
기억과 기록으로 잇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죽은 자와 산 자의 시간과 공간
이 책은 오늘을 담은 앞면과 과거를 담은 뒷면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각각의 표지로부터 시작 하는 앞면의 이야기와 뒷면의 이야기는 그곳에서 스러진 사람들의 발자국과 그곳을 찾은 작가의 발자국으로 연결되어 과거의 그들과 오늘의 우리를 단절시키지 않겠다는 작가의 의지를 표현하 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역사가 평화와 공존의 길로 한 발짝씩 나아가기 위해서는 ’과 거가 현재를 돕고, 죽은 자가 산 자를 살릴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며, 그럴 수 있는 전제는 ’기 억과 기록‘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추천평]
울창한 나무숲인 북받친밭은 제주공동체의 마지막 장두 이덕구의 마지막 투쟁에 대한 이야기가 깃들어 있는 곳이다. 화가 김영화는 그 숲의 기억을 전수받기를 갈망했다.
그리하여 간절한 세필 로 그 숲을 묘사한 그의 그림들은 4.3의 기억을 새롭게 일깨워 주는 역사화가 되었다.
- 현기영
김영화는 홀로 하얀 숲으로 간다. 숲 깊은 곳에는 비애의 기운이 짙게 서려 있는 작은 빈터가 있다.
머언 어느 한 때, 헐벗고 굶주리고 두려웁고, 통한으로 사무치던 사람들이 여기 잠시 머물다 갔다. 그들을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사각사각 선들을 무수히 긋고 또 긋는다. 마침내 큰 품으로 그 모두 를 안으려 한다. 봄으로 가는 숲이 그러하듯이.
- 강요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