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로 3: OMA』를 엮으며
1974년, 막 서른이 된 렘 콜하스는 『오포지션스』(Oppositions) 3호에 1931년 미국 보자르 아카데미가 개최한 건축가들을 위한 가장무도회에 대한 짧은 글을 실었다. 크라이슬러 빌딩 등 당시 뉴욕의 하늘에서 경쟁하던 건물을 지은 건축가들이 자신의 건물처럼 생긴 옷을 입고 연회에 오르는 이벤트였다. 렘 콜하스는 본질적으로는 같지만 경쟁 때문에 아무런 의미도 없는 개성을 뽐내고 있다고 진단한다. 이 글은 뉴욕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다섯 건축가들(피터 아이젠만, 마이클 그레이브스, 찰스 과스미, 존 헤이덕, 리처드 마이어로 『오포지션스』를 주도하는 구성원이기도 했다)이 2년 전 1972년 개최한 전시 《다섯 건축가들》(Five Architects)를 겨냥하고 있었다. 1931년과 1972년 40년의 시차를 두고 벌어진 두 이벤트는 평행을 이룬다. 1931년, 유럽의 모더니즘이 절정 또는 파국에 달했던 그 때, 뉴욕에서는 (모더니즘이 극복하고자 했던 바로 그) ‘보자르’ 아카데미에서 가장무도회를 열었다. 1972년 뉴욕의 젊은 건축가들은 (불과 몇 년 전 냉혹한 비평의 대상이 되었던) 유럽의 전성기 모더니즘 건축을 뒤따르고 있었다. 뉴욕은 ‘지나간’ 유럽을 흠모하고 있었고, 렘 콜하스는 눈길을 받지 못한 뉴욕의 특징을 편집증적으로 뒤지고 있었다. 만프레도 타푸리는 렘 콜하스의 이 시절을 ‘농담’이라고 평했다. 50년이 지난 지금 렘 콜하스의 언어는 가장 진지한 말, 현실적 힘을 행사하는 농담이 되었다. 그 농담이 시의적절함과 위트, 날카로움을 여전히 지니고 있는지는 별개의 문제이지만 말이다. 다시 20여 년이 흐른 1996년 뉴욕의 건축가들은 자신들의 건축물을 본뜬 옷을 입고 『베니티 페어』(Vanity Fair)를 위해 카메라 앞에 섰고, 렘 콜하스는 전설 속의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처럼 전 지구를 헤매고 있었다. 아시아는 뉴욕에서 벼린 이론을 실험해볼 좋은 기회로 부상했다.
바로 이 시점부터 한국도 저 속으로 얽혀 들어간다.
인적 교류, 한국 프로젝트, 담론 등 모든 면에서 한국은 OMA 시대의 당사자다. 김중업이 예외와 우연을 힘겹게 이어붙인 뒤에야 르 코르뷔지에의 파리 아틀리에 초인종을 누른 사건이나, 예외적인 행운을 누릴 수 있었던 김종성이 미스의 제자가 될 수 있었던 것과는 다른 국면이다. 이전에 모더니즘 거장과 한국 건축의 관계는 일방적이었고 시차의 낙차 속에 작동했다면, 1990년대 후반부터 세계 건축계와 한국의 관계는 쌍방향적이며 동시대적이었다. 그 관계의 강도와 밀도가 동등하지는 않았고, 동시대성 안에서 일어난 오해와 억측이 난무했다 하더라도 말이다.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의 경제 성장이 없었다면 스타키텍트(starchitect)라는 조어는 분명 지금과 사뭇 다른 뉘앙스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이 맥락에서 한국에서 렘 콜하스와 OMA를 바라보고자 하는 것이 이번 호의 목표다. OMA를 한국과 서울이라는 렌즈를 통해 바라보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