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궐 안 암살 음모를 막기 위한 7일간의 사투
마지막까지 예측할 수 없는 반전 속
조선과 한 여인의 비극
2025년은 광복 80주년인 동시에 명성황후 민비 시해사건인 을미사변 130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이 시의적절한 순간에 연합뉴스 기자로 오래 활약한 권영석 작가가 『작전명 여우사냥』을 내놓았다. 『작전명 여우사냥』은 숨가쁘게 흘러간 을미사변의 일주일간을 소설로 재구성한 작품이다. 기자답게 역사적 사실 수집에 꼼꼼하고, 현장감 있는 인물과 사건 묘사 역시 일품이다.
소설의 주인공은 이명재라는 가상의 캐릭터로, 민씨 척족의 대표 격인 인물로 온건 개화파의 수장이었던 민영익의 가솔이라는 설정이다. 이명재는 중전 민씨의 경호대장을 맡았지만 민씨에 대해서는 이중적인 감정을 품고 있다. 그는 청일전쟁 직후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일본의 조선 침략 야욕을 직시하며, 국권을 수호하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다한다.
이명재의 라이벌로 등장하는 인물은 실존 인물인, 아다치 겐조다. 제국주의 침략의 ‘특수부대’ 역할을 담당하는 조선 주재 일본인 신문, 《한성신보》 사장을 역임하고 있다. 그 역시 제국주의자로, 신념형과 출세형이 혼합된 위험한 인간이다. 조선 측의 전략을 역이용, 민비 암살사건을 성공시킬 책략을 입안한다. 실제 역사에서 아다치는 암살 직후 일본으로 도피한 다음, 일본 정계의 거물로 승승장구한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은 일본의 조직적 은폐로 이제까지 전모가 잘 파악되지 않고 있지만, 드러난 사실들만 살펴봐도 최소한 이 아다치 겐조가 암살 조직 구성을 맡았다는 것이 확인된다. 실제 암살범들 가운데는 아예 《한성신보》 기자들이 다수 포진해 있었으며, 아다치가 소속된 ‘구마모토 국권당’이라는 조직 역시 을미사변과 매우 밀접한 연관성을 가졌다. 국권당 또는 현양사 등으로 대표되는 일본의 비밀결사조직들은 이후 조선 ‘진출’은 물론 중일전쟁에까지 이어지는 일본의 제국주의 침략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고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 역시 비밀조직의 특성상 아직까지 전모가 명확히 파악되지는 않고 있는 상태다. 저자는 소설에서 이 신념형 테러리스트들의 사상, 정치적 의도, 조직적 행태들을 문학적으로 복원하는 데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소설은 주인공 이명재와 그 라이벌 아다치의 치열한 지략 대결과 서울 시내를 연이어 뒤흔드는 초대형 사건들의 연속으로 독자들을 사로잡은 긴장의 끈을 놓치지 않는다. 한편으로 조선 정계의 주요 인물들, 고종, 흥선대원군, 안경수, 러시아 공사인 베베르와 왕실 고문 리젠더(프랑스어명 르장드르), 그리고 갑신정변의 소용돌이 속에서 간신히 제정신을 갖추고 생존한 몇 안 남은 급진 개화파이자 내각 서기장인 유길준 역시 이야기 속에서 등장한다. 특히 유길준은 이명재의 친구라는 설정으로, 역사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은 자신의 속내를 문학의 힘을 빌려 허심탄회하게 토로하고 있다.
소설의 실질적인 주인공이자 일주일간의 격변에서 중심을 지키고 있는 인물은 명성황후 민씨다. 소녀적인 감수성과 물질적 탐욕, 날카로운 지성과 무모한 권력욕, 한편으로는 수구 기득권의 상징이면서 다른 한편의 인식으로는 문명개화의 선각자라는, 실로 복합적 개성을 갖추었다. 그런 그의 모순적 자질은 이명재가 햄릿적으로 갈팡질팡하는 원인이 되는 동시에, 민씨 그 자신의 운명적 파멸을 촉발하는 계기가 된다. 저자는 명성황후의 여러 실정을 비판적으로 조감하는 한편으로, 그간 일방적으로 찬양 또는 비난의 대상이 되었던 한 여성의 인물됨을 종합적으로 분석하려는 노력을 소설 안에서 지속적으로 기울여, 매력적인 한 인간을 구현하는 데 어느 정도 성공하고 있다.
기로에 선 1895년의 한반도,
마치 오늘의 현실을 맨몸으로 마주하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한국인들의 인식 속 초강대국이 명백한 퇴조를 보이고, 일본이 그 틈을 파고들어 군사적 굴기를 꾀하는 양상은 19세기 후반과 지금이 놀랄 정도의 유사성을 보인다. 꼭 일본과 한국의 관계만이 아닌, 한 나라가 다른 한 나라의 정세에 영향을 끼치고 더 나아가 그 나라의 주권을 일부 강탈하려는 행태는 앞으로 충분히 자주 벌어질 것이다. 아다치 겐조와 구마모토 국권당의 물밑 행각은 먼 옛날의 것이 아닌 셈이다.
팍스 아메리카나 시대가 가고, 이전의 제국들이 세계 곳곳에서 기지개를 켜는 오늘날의 상황에서, 제국주의 침략의 실상을 소설적 형식으로 잘 드러내 주는 『작전명 여우사냥』의 가치는 단순한 역사소설 그 이상이라고 할 만하다. 특히 특파기자들이 제국주의의 첨병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이토 히로부미와 아다치 겐조의 대화는 오늘날의 우리에게 적지 않은 인상을 준다.
소설적 재미, 등장인물들의 인간적 매력, 역사적 디테일, 시의성 그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는 『작전명 여우사냥』. 지금의 교양 독자들에게 안성맞춤인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