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프린스에드워드 아일랜드, 애틀랜타, 아바나…
그녀들의 도시에서 다시 써내려간 나의 이야기
“실재하는 책 속 세계를 만난다는 건 문학이 말하는
인간의 위대함, 선의, 낭만을 확인하는 과정이다.”
유년 시절 머리맡을 지켜주던 책 속 친구들이 있었다. 나와 다른 머리색을 한 그들은 부푼 소매의 드레스를 입고 ‘초록색 지붕의 집’으로 향하는 마차를 타고 가면서 끊임없이 재잘대거나, 요정과 함께 네버랜드로 모험을 떠나 해적과 한판 승부를 펼쳤다. 때로는 전쟁과 굶주림을 이겨내고 삶을 쟁취했으며, 살인 사건 현장에서 냉철한 판단력과 추리력으로 사건을 해결했다. ‘책 속 친구들이 사는 곳은 어떤 모습일까? 그들을 만날 수 있다면, 그들이 있는 그곳에 가볼 수 있다면!’
『나와 그녀들의 도시』는 책과 현실 세계의 경계에서 살아가는 독서 여행자 곽아람이 안식년으로 주어진 1년간 심상으로만 존재하던 책 속 세계가 실재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떠난 여행을 한 권의 책으로 엮은 에세이다. 뉴욕을 근거지로 하면서 『빨강 머리 앤』의 배경인 캐나다 프린스에드워드 아일랜드를 시작으로『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속 도시들을 찾아가는 미국 남부 여행, 『작은 아씨들』이 쓰인 매사추세츠주 콩코드, 톰 소여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미시시피강을 탐험했다. 또 ‘디즈니 그림 명작’의 추억을 떠올리며 올랜도 디즈니월드를 누비고, 애거사 크리스티의 『카리브해의 미스터리』를 환기하며 서인도제도의 세인트마틴을 찾기까지. 지은이는 자신이 사랑하는 문학작품의 배경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 그 땅을 직접 밟아보기 위해 길을 나섰다.
“2D로 그려왔던 그 세계가 3D로 실존한다는 것을 확인하는 과정은 내게 소중했다. 책 속 세계가 실재한다는 건 문학이 단지 허구만은 아니라는 것, 문학이 말하는 인간의 위대함과 선의, 그리고 낭만이 실재한다는 것과 동의어여서 그간 내가 책에서 받은 위안이 한 꺼풀짜리 당의정만은 아니라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_9쪽
세상의 모든 꿈꾸는 자를 위한 여행기
지은이는 미국으로 떠나기 직전 파리 센 강변의 영문 서적 전문 서점 셰익스피어&컴퍼니(Shakespeare & Company) 앞에 붙은 칠판의 글귀를 읽다가 울었다고 고백한다. 사라질 뻔한 이 서점을 인수해 키워내어 딸에게 물려준 조지 휘트먼의 말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나를 라탱 지구의 돈키호테라 부른다…….” 지은이는 이웃보다 책 속 인물들을 훨씬 친숙하게 여겼던 휘트먼과 책벌레로 살아온 자신이 무척 닮아 있음을 느낀다.
“이웃보다 책 속 인물들을 더 친구처럼 느끼는 사람, 그게 바로 나였다. (……) 내가 사랑하는 문학작품 속 주인공들이 살았던 도시를 찾아간 이야기를 담은 이 책은 나나 휘트먼과 마찬가지로 문학과 현실의 경계에 살고 있는 ‘꿈꾸는 자들’을 위한 여행기다.”_10쪽
성인이 되어서도 한쪽 발은 여전히 이야기의 세상에 걸치고 있다고 말하는 지은이는 자신이 사랑하는 문학작품의 배경을 두 눈으로 직접 보기 위해 수없이 여행했다. 이야기를 먹고 자라던 어린 시절, 책 속 주인공들이 어딘가에 실제로 살고 있을 것만 같았던 그 마음. 그 믿음을 품고, 독서 여행자가 되어 미국과 캐나다, 쿠바 등 문학의 무대, 작가의 생이 살아 숨 쉬는 곳으로 향한 것이다.
지은이가 걸은 길은 단순한 여행지가 아니라, 문학이 만든 ‘실재하는 풍경’이다. 책과 함께 떠난 ‘그 시절 그녀들’의 도시 말이다. 지은이는 뉴욕, 콩코드, 보스턴 등 어린 시절 마음속에 그려온 장면들이 살아 움직이는 도시를 찾아가 문학의 향취를 느끼며 작품과 깊이 공명한다.
아메리카대륙 위에 그리는 문학의 지도
책은 『빨강 머리 앤』의 배경이 된 캐나다 프린스에드워드 아일랜드를 시작으로, 헨리 워즈워스 롱펠로의 서사시 「에반젤린」의 태곳적 자연이 떠오르는 아카디아 국립공원, 너새니얼 호손의 어두운 상상력이 깃든 세일럼, 루이자 메이 올컷이 네 자매의 우정을 길어 올린 콩코드, 그리고 『위대한 개츠비』의 화려함과 허망함이 교차하는 뉴욕 근교의 부촌들까지, 한 시대와 한 작가를 규정한 장소들을 직접 찾아가며 작품 속 문장이 어떻게 현실의 풍경과 겹치는지를 탐험한다. 또한 마거릿 미첼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탄생한 애틀랜타와 서배너, 헤밍웨이가 생애와 작품을 쌓아 올린 쿠바와 키웨스트, 그리고 마크 트웨인과 오 헨리가 머물며 작품 활동을 했던 문학의 요람까지. 지은이는 아메리카 문학사의 결정적 순간들을 길 위에서 되살려낸다.
2018년에 출간한 『바람과 함께, 스칼렛』의 원고를 현재의 시점으로 다시 쓰다시피 개정증보한 『나와 그녀들의 도시』는 이전의 여정에 새로운 이야기와 한층 깊어진 시선을 더해 다듬어 펴낸 것이다. 책에는 월트 디즈니의 세계와 미스 마플의 미스터리한 현장, 그리고 에필로그에서 『빙점』 속 눈 내리는 설원을 여행한 이야기도 들려준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책에는 여행의 시점에 어울리는 문장을 작품의 원문과 함께 지은이가 직접 번역해 실었다. 원문을 음미하는 것 또한 문학작품을 읽어가는 또하나의 재미라고 생각한 지은이의 의도가 담겼기 때문이다.
문학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나와 그녀들의 도시』는 단지 ‘책 속 장소’를 찾아가는 여행기가 아니다. 우리가 오래도록 사랑해온 문학작품들이 현실의 장소와 어떻게 맞닿아 있는지, 또 그곳이 작가들에게 어떤 영감을 주었는지를 보여주는, 문학과 삶을 잇는 하나의 ‘지도’다. 또한 이 책은 책장을 덮은 뒤에도 책 속 인물들과 이별하지 못하는 독자에게 ‘지금, 여기’에서 다시 살아 숨 쉬는 문학과 마주할 수 있는 장소로 이끄는 ‘초대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