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상에 단 한 점인 세종대왕 친필을 추적한 "세종대왕 어필(御筆) 탈취사건과
600년 수난사"
-세종 친필 사연이 600년 동안 켜켜이 쌓인 "어사희우정효령대군방문(御賜喜雨亭孝寧大君房文)"-
이상주 작가는 2014년 봄에 이 서첩을 처음 접했다. 문화재에 밝은 한 원로스님의 주선 덕분이었다. 그는 600년 동안 세상에 공개되지 않은 세종대왕 어필을 보는 순간의 감흥을 잊지 못한다.
"황금색 비단 보자기가 풀어졌다. 찰나, 경외심(敬畏心)에 온 몸이 전율한다. 600년 동안 잠 잔 세종대왕의 친필(이하 추정)이다. ‘御賜喜雨亭(어사희우정)!’ 첫 문장이 펼쳐지는 데 숨이 콱 막힌다. 혹여, 글이 손상될까, 혹여 예에 어긋날까 머리칼이 쭈볏선다. 정성을 다해 한 장씩 조심스럽게 넘겼다. 모두 10매에 쓰인 528자의 글. 손에 낀 면장갑 위로 대왕의 따스함이 전해져온다." 〈13쪽〉
그는 이날 이후 10년 이상 세종 어필 추적을 계속해왔다. 왕의 글인 열성어제를 연구하고, 세종이 쓴 글로 거론되는 전의이씨 가훈(가전충효세수인경)과 세종의 어명으로 출간된 설원서첩의 병외삼 등의 배경연구와 함께 취재에 몰두했다.
이상주 작가는 이 기간에 세종대왕 어필로 유력시되는 어사희우정문 실물을 10여 차례 깊이 관찰했다. 또 서지학자, 서예가, 왕실문화를 연구하는 학자들과 대화하며 세종 어필에 대해 다양한 접근을 했다. 긴 시간의 추적을 통해 세종이 효령대군에게 하사한 어사희우정문에서 600년에 걸친 대서사시와 같은 깊은 스토리를 발굴했다. 세종의 어사희우정문과 백성사랑, 세종과 효령대군의 형제애, 효령대군이 세종의 어필이라고 기록한 전문 사연을 찾아냈다.
특히 영조, 정조, 문조(효명세자)의 어사희우정문과 이를 보관한 정자를 보존하려는 노력, 조선 후기 모리배들에 의한 어사희우정문 탈취 사건, 이에 대해 엄정 수사를 촉구한 전국 유림의 사발통문, 철종대왕의 세종 어필 확인서인 내사완문 발급과 보존 대책 등 조선시대 내내 켜켜이 쌓인 사연을 확인했다.
"세종대왕 어필(御筆) 탈취 사건과 600년 수난사"에는 어사희우정문이 세종의 어제(御製) 어필(御筆)임을 보여주는 여러 자료가 제시돼 있다. 효령대군친필전문, 헌종(재위1834~1849년) 때 형조에서 어사희우정문 소유자로부터 받은 글, 철종(재위 1849~1863년) 때 효령대군 종친회에서 쓴 탄원서, 충청도 화양서원 통문, 경상도 상주 흥암서원 통문, 경상도 함창도회 통문, 철종의 격쟁 비답, 철종의 내사완문, 철종이 형조와 한성부에 내린 정부여형한양사게판절목(政府與刑漢兩司揭板節目) 등이다.
이 같은 귀중한 역사자료가 화보로도 구성돼 있다. 어사희우정효령대군방문(御賜喜雨亭孝寧大君房文), 철종의 내사완문(內賜完文), 정부여형한량사게판절목(政府與刑漢兩司揭板節目), 효령대군친필전문(孝寧大君親筆傳文), 고종 7년에 어사희우정문 등을 인쇄한 목활자(木活字) 사진 70여장이다. 이 자료들은 왕과 왕실의 고급문화 감상과 함께 연구자들에게는 소중한 자료가 될 수 있다.
조선사를 관통하는 왕실문화의 핵심 키워드인 어사희우정효령대군방문은 2005년 한글날 SBS의 보도로 세상에 알려졌다. 문화재전문위원을 지낸 천혜봉박사가 1년여의 연구 끝에 세종대왕 친필이라는 논문을 발표하고, 한국고미술협회에서도 2017년에 세종친필로 감정했다. 그러나 국가 차원의 진위 감정이 이뤄지지 않는 가운데 관리 사각지대에 놓이기도 했다. 이에 2018년 국정감사에서는 어사희우정문 도난 사건과 관리 문제가 도마위에 오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