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목간은 1975년 월지 발굴에서 61점이 출토된 것이 시초이다. 월지 유적처럼 관등과 관직이 적게 나오는 유적도 드물 것이다. 세택(洗宅) 3점이 61점의 목간 가운데 관직의 전부이고, 관등을 가진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월지 목간에서 ‘辛’자가 나오는데, 이는 신라에서 만들어진 것 중 최초로 연유를 알 수 있는 신라 국자이며 ‘대간(大干)’이란 뜻이다. 또 월성해자 유적에서는 목간 33점이 출토되었다. 논어 목간은 부여 쌍북리 유적, 인천 계양산성 유적, 김해 봉황동 유적에서 출토되었다. 1m 이상으로 그 길이가 길기 때문에 그 용도에 대해서는 신라의 소경이나 지방의 학교에서 행한 석전 의식에 사용되었다는 가설이 제기되고 있다.
신라의 지방목간으로는 우선 대구 팔거산성 목간을 들 수 있는데 목간 자체로 볼 때, 6세기로 보면 초축 때에는 목간이 없고, 60년이 지나 목조 집수지를 만든 것이다. 금석문으로 볼 때, 팔거산성 목간은 480년대 것으로 보았다.
함안 성산산성의 목간은 수가 253점에 달해 백제나 고신라의 어느 유적보다 많다. 그 제작 연대와 사용용도 등은 학계도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는데, 저자는 7쌍의 쌍둥이 목간 글씨체가 다 달라서 하찰로 사용된 것 외에 1부를 도착지인 성산산성에서 더 만들었고, 역역용과 하찰용 모두를 장부로 사용했다고 보았다. 여기서 나온 ‘노인(奴人)’ 목간은 12점이나 된다. 이 노인은 구리벌에서만 나오고 있다. 그것도 짐꾼(종)을 거느리고 짐을 운반하고 있다. 이렇게 짐꾼(종)이 주인인 노인을 대신해서 짐을 져서 운반하는 짐은 함안 성산산성 근처의 바닷가에서 오는 것이라고 판단된다. 따라서 저자는 노인을 소금생산자로 본다.
저자는 울주 천전리서석 원명에 나오는 ‘沙喙部葛文王’의 벗인 ‘於史鄒安郞’을 반절로 읽어서 ‘엇추안랑’으로 읽고 화랑 이름으로 보았고, 화랑의 시작을 525년으로 올려 잡았다. 또한 30명 정도 나오는 울주 천전리서석의 화랑 이름을 조사하였다.
신라 금석문 연구에서 또다른 큰 문제로 냉수리비의 ‘沙喙部至都盧葛文王’에 근거해 신라 중고대의 왕 가운데 실성왕과 눌지왕은 탁부, 법흥왕도 탁부로 보면서 지증왕은 사탁부로 보는 점을 들고 있는데, 왕이 갈문왕을 칭한 유일한 예이다. 탁부는 왕족, 사탁부는 왕비족이다. 종래 문헌사학자들은 모량부를 왕비족으로 보아 왔다. 지증왕이 사탁부 출신이라면 그의 아들인 법흥왕도 사탁부 출신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봉평비에는 탁부 출신이라고 나온다. 봉평비에는 법흥왕의 동생인 입종갈문왕까지 사탁부로 나온다. 봉평비의 사부지갈문왕은 울주 천전리서석 추명에서 입종갈문왕이 아님이 밝혀져 지증왕의 사탁부 출신설은 문제가 있다는 것이 결론이다. 이 문제는 새로운 자료의 출현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
아울러 저자는 ‘好太王’명동령명문의 호태왕이 시호인 ‘平安好太王’의 약칭으로 그 시기가 광개토태왕 즉위 60주년이 되는 신묘년을 451년이라고 보았다. 광주 선리기와명에 대해서는 「삼국사기」 지명 비정에서 고구려 지명은 13곳이고, 통일신라의 지명은 6곳인데, 군의 지명이 11곳, 현의 지명이 8곳이다. 선리기와의 제작 시기는 고려 건국초의 반란과 관련지어서 918년이나 가까운 시기로 보았다. 선리기와가 해구나 각 지명이 있는 곳에 있지 않고, 선리에 있는 이유는 반란, 전쟁 등으로 지붕에 올라가지 못하고, 선리에 남아있었다고 보았다.
저자는 목간과 금석문 연구의 가장 큰 장점은 문헌자료 비판의 잣대가 된다는 점을 들고 있다. 실제로 광개토왕비, 냉수리비, 적성비, 진흥왕순수비 등에 대해서는 문헌자료 어디에도 언급이 없다. 문헌자료의 한계로 여기저기 틈이 나 있는 한국 고대의 역사상을 금석문과 목간과 같은 당시의 자료가 보완해서 새롭게 맞추는 데 이 책이 기여할 것이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