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멸의 교육 철학을 완성한 교육자이자 사상가
어린이들에게 고통과 희생의 시기
1700년대 어린이의 삶과 사회적 인식은 어린이는 ‘작은 어른’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아동은 보호의 대상이기보다는 가정 경제의 구성원, 특히 하층 계층에서는 노동력을 제공하는 존재로 여겨졌다. 귀족·부유층 자녀는 가정교사나 사립학교를 통해 교육받았지만, 서민·빈민층 자녀는 교육 기회가 거의 없었던 탓에 대부분의 어린이는 문맹 상태였고, 일찍부터 노동에 동원되었다.
1746년 스위스 취리히에서 태어난 페스탈로치는 어린 시절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와 외할머니 슬하에서 가난하게 자라났다. 루소의 『에밀』을 읽고 자연주의 교육에 감화된 그는 모든 아이는 교육받을 권리가 있다는 생각으로 특히 빈민 아동에게 사랑과 존중을 바탕으로 한 교육을 강조했다.
그는 교육이 단순한 지식 전달이 아니라, 아이가 경험과 감각을 통해 배우도록 유도하고 ‘머리(이해)·가슴(도덕)·손(실천)’의 전인교육을 실천했다.
1774년에는 ‘노이호프 농장학교’를 세워 빈민 아동에게 노동과 교육을 병행했으나 실패했다. 그러나 그의 실천은 많은 교육사상가에게 영향을 주었다.
페스탈로치는 가정의 애정 어린 돌봄이 아동 교육의 기초임을 주장하고 가정은 사랑과 도덕 교육의 중심이어야 함을 주장했다.
페스탈로치는 1700년대 후반 교육 소외와 불평등이 극심했던 시기에, 가난한 아동의 인간다운 삶과 교육의 가능성을 열어 주려 노력했다. 그의 사상은 아동 중심 교육, 보편적 교육권, 공감과 사랑의 교육이라는 현대 교육의 핵심 개념으로 이어지고 있다.
페스탈로치는 아동 인권이 터널 속처럼 어두운 시기에 아동을 존엄한 존재로 보고, 사랑과 이해를 바탕으로 한 교육 실천을 통해 교육의 인간화에 크게 이바지했다.
그의 사상은 이후 유럽 전역은 물론, 현대 교육철학에도 깊은 영향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