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벌-입시 체제,
“집단적 거부와 저항만이 우리의 길이다”
경쟁 입시 체제가 없는 세상은 가능할까?
이 야만적인 학벌-입시 체제에서 어떻게 빠져나올까?
악순환의 악순환, 한국의 학벌-입시 체제
살인적인 입시지옥, 시험능력주의가 지배하는 사회, 대학 서열의 신분제를 쟁취하기 위한 과열 경쟁, 출신 대학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사회, ‘스카이’·‘인서울’과 ‘지잡대’ 사이의 차별, 열패감과 소외감에 비틀거리는 아이들, 결국 좌절해 자살을 선택하는 아이들, 한 해 사교육비만 29.2조 원(공식 통계에 잡히지 않는 금액까지 합치면 약 40조 원)을 쓰는 사회, 자신의 노후를 포기해서라도 아이들의 사교육만큼은 챙기는 부모들, 심지어는 이를 위해 입시 부정에 가담하는 부모들, 악순환에 악순환을 거듭하는 사회, 그런데도 지난 100년간 절대 변하지 않은 이 학벌-입시 체제……
일제강점기 때부터 시작된 이 학벌-입시 체제의 모순은 지금도 해결되지 않은 채 한국사회를 병들게 하고 있다. 한국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땅의 교육 현실에 큰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안다. 초중고 모든 교육이 대입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는 한국의 학벌-입시 체제가 타당성, 정당성, 상식에도 맞지 않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이 학벌-입시 체제는 왜 바뀌지 않을까? 왜 절대다수가 이 학벌-입시 체제를 맹목적으로 따라야만 하는 것으로 믿는 걸까? 왜 이 체제를 바꿀 수 없다고 믿는 걸까? 왜 이 체제의 승리자인 소수의 엘리트계층이 지배하는 사회를 그대로 놔두는 걸까?
학벌-입시 문제는 가장 급박히 해결해야 할 정치적 문제
숭실대 철학과 교수 박준상은 이 학벌-입시 체제를 타파하는 강력한 주장을 제기한다. 그는 한국 교육이 “상위 10%만을 위한 교육” “단적인 경쟁과 이기심의 각축장이자 학습장이 되어온 지 오래”이고, “노예성과 천박성”을 키우는 장치에 불과하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한국사회 모든 문제의 핵심’에 이 학벌-입시 체제가 자리하고 있다고 말한다. 즉 분단 문제, 재벌 문제, 빈부격차 문제, 노동 문제, 부동산 문제, 수도와 지방의 격차 문제나 남녀 불평등 문제와 밀접하게 맞물려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학벌-입시 문제는 우리 사회의 구성원이라면 거의 모두가 겪는 문제이며, 그래서 “무엇보다 먼저 강력하지만 악한 어떤 권력의 문제, 즉 정치적인 문제”라고 주장한다.
저자가 말하는 ‘정치적인 문제’란 그 사회의 절대다수가 실제로 문제라고 느끼고 확인한 것, 그것 때문에 절대다수가 참기 힘든 고통을 실제로 겪는 것, 고통을 겪고 있음에도 곧이곧대로 폭로하지 못하게 막는 것을 말한다. 곧 한국 사람이라면 거의 모두가 겪는 문제인 학벌-입시 문제야말로 진정한 정치적인 문제라는 것이다.
그동안 모든 정부에서는 ‘공정성’, ‘교육 현장에 대한 고려’, ‘공교육 정상화’, ‘사교육비 절감’, ‘학생들의 학업 부담 완화’ 같은 명목으로 대입 정책(대입 개편안, 대학 구조조정안)들을 펼쳐왔지만, 그때마다 정치적 선택이었을 뿐 근본적인 변화는 가져오지 못했다. 일제강점기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각 정부는 각자 자신의 정치적 계산과 이익에 따라 이런저런 정책들을 펼쳐왔을 뿐, ‘교육 현장’에 감금되어 있는 아이들의 고통과 좌절,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느끼고 느껴왔던 고통과 좌절을 외면해왔다. 오히려 지배 엘리트계층을 위해 이 학벌-입시 체제를 유지ㆍ강화해오기만 했다. 그리고 이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학벌-입시 문제는 “무의식적인 아버지의 법”처럼 정부의 정책에 따라 지켜야만 하는 것, 견뎌야만 하는 것으로 인식되었고, 입시 경쟁에서 실패하는 것은 각 학생과 각 가정이 져야 할 ‘사적인’ 것으로 여겨져왔다(각자도생의 초-자본주의).
저자는 단순히 ‘교육제도 공학적인’ 차원에서 대입의 소소한 형태들만 이리저리 ‘다람쥐 쳇바퀴 돌리듯’ 바꾸는 정책들은 학벌-입시 체제의 본질을 가리고, 이 문제가 ‘정치적’ 문제라는 걸을 가로막는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이 학벌-입시의 문제야말로 사회의 지배·피지배 관계를 재생산하기에 ‘진정한 정치적 문제’라고 주장하며 ‘정치적’으로 해결해야 하고, 또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 문제를 방치하게 되면 “한국이라는 국가에 미래도 발전도 평화ㆍ안정도 공동체의 행복도 없”고, 소수의 승자가 지배하는 사회로만 머물게 되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분명한 사실을 확인해보자. 현재 이곳의 학벌 문제는 교육의 문제도, 사회적 문제도, 도덕적 문제도 아니고, 가장 심각하고 가장 급박한 정치적 문제들 가운데 하나이다. 즉 집단적 억압-피억압의, 전면적 지배-피지배, 차별-피차별의, 서열화의 문제, 그 문제를 정면으로 직시할 필요가 있다.”(59쪽)
불가능해 보이는 것을 요구하자,
대항 권력의 구축
너무 오랫동안 유지되고 강화되어 극복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이 학벌-입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까? 저자는 한국사회에 학벌-입시가 사라졌다고 한번 상상해보자고 제안하면서, 다음과 같은 지향점 세 가지를 제시한다. 바로 ‘경쟁 입시 철폐’, ‘대학평준화’를 위한 ‘대입 자격고사’ 도입, ‘대학무상화’이다. 이 세 가지는 결코 실현될 수 없는 이상적인 정책이 아니라, 그동안 여러 교육감, 대학 총장들이 주장한 것이기도 하고, 여러 시민단체가 참여해 구성된 대학무상화평준화국민운동본부(대무평)와 진보 진영에서 지속적으로 주장해왔던 것들이다.
그렇다면 이를 어떻게 실행시킬 수 있을까? 저자는 정부를 제어할 강력한 대항 권력, 아래로부터의 움직임을 구축해 “집단적 거부와 저항”으로 “점차적으로가 아니라, 한 번에 바꿔야 한다”고 주장한다. ‘혁명 정부’라 불리던 문재인 정부처럼 통치자가 바뀐다고 해서 결코 해결될 수 없는 일이며, “이 억압·피억압의, 즉 집단적인 지배·피지배의, 전면적인 차별·피차별과 서열화의 정치적 구조를 무너뜨릴 수 있는 권력을 먼저 우리가, 이곳의 민중이, 국민들이 확보해서” 실행해야만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만큼 한 세기가 넘도록 유지돼온 학벌-입시 체제는 강고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의 가장 큰 혁명을 하자는 것입니다. 솔직히 말해봅시다. 교육혁명을 넘어서 ‘정치적’ 혁명을 하자는 것입니다.” “이런 표현이 어떨지 모르겠지만, 이곳을 어느 정도 ‘히피화’하자는 것입니다. …… 즉 삶·일상 각각의 생명의 자연스러운 순환과 주체적인 표출·표현을 위해 모두의 눈에 너무나 명백히 보이는 현 체제의 암과 같은 환부를 도려내자는 것입니다.”(302쪽)
이재명 정부의 공약 ‘서울대 10개 만들기’의 문제점
저자는 한국의 학벌-입시 문제는 정치적 문제이지 ‘교육제도 공학적’ 문제가 아니라고 말한다. 즉 대입 시험의 이상적인 개편안 또는 ‘서울대 10개 만들기’ 같은 대학 구조조정안으로는 이 체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다. 가령 2000년대 초반 정진상 교수가 제안한 국립대통합네트워크 플랜(서울대와 9개 지방거점국립대의 네트워크를 구성해서 대학 상향평준화를 도모하려는 계획)은 문재인 정부의 대선 공약으로도 채택된 적이 있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20여 년간 단 한 걸음의 진척도 보지 못했다.
김종영 교수가 제안한 ‘서울대 10개 만들기’ 또한 학벌-입시 문제와 관련해 하나의 전망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중요하지만, 한계가 명백하다. 서울대 10개 만들기는 부산대·경북대·전남대 같은 전국의 지방거점국립대들을 각각 해당 지역의 다른 국립대나 사립대를 통합하게 해서 서울대와 규모 수준과 질적 수준에서 버금갈 만한 대학들로 성장시키자는 계획이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전체 대학 대비 사립대 비율이 85%로 과도하게 높고, 전국 전체 대학생의 75%가 사립대에 다닌다. 특히 전국 인구의 절반이 몰려 있는 수도권 지역에서 국공립대에 다니는 대학생 비율은 5% 미만이다. 이러한 현실에서, 연고대 등 ‘인서울’의 사립대들은 그대로 놔두고 국립대 10개만 통합시켜봐야 심각한 입시 경쟁, 대학 서열화, 과도한 사교육, 수도권과 지방의 격차 같은 폐단들은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설사 통합이 성공한다 하더라도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한국의 모든 영역(정치·경제·문화·교육과 인구)의 인프라가 서울·수도권에 과도하게 쏠려 있는 상황에서 지방의 몇몇 국립대들에 큰 투자를 한다고 해서 서울·수도권과 지방의 격차와 불평등이 근본적으로 해소되지는 않는 것이다.
원래 대입 시험은 국가 소관이다,
대학평준화와 대입 자격고사
국공립통합네트워크나 서울대 10개 만들기 같은 제안의 핵심은 바로 대학들 사이의 인프라 평준화를 위한 대학 구조조정안이다. 그러나 이 제안들의 한계는 명확하다. 이 제안들이 이루어진다 해도 근본적인 입시 경쟁은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저자가 지향점의 하나로 말하고 있는 대학평준화와 대입 자격고사는 무엇인가?
한국의 사교육비 지출은 2024년 기준 한 해에 29.2조 원(공식적 통계에 잡히지 않는 금액까지 합치면 약 40조 원)에 달한다. 이는 1년 국방비 예산 총액(2025년 예산안 61.2조 원)의 거의 3분의 2에 육박할 정도다. 이 사교육비는 모두 대입 점수를 잘 받기 위해 지불하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대입 점수가 아이·부모의 관계, 가정(아이·부모)과 학교의 관계, 학교와 사회의 관계, 그리고 자본과 권력의 관계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학벌-입시의 근본적인 폐해를 없애기 위해서는 대학평준화 정책이 실현되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입시제도가 개편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즉 대입 시험을 없애고 대입 자격고사를 도입하자는 주장이다. “현재의 수능, 즉 ‘대학수학능력시험’이라는 전 국민이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듣는 말 자체가 뻔한 거짓말이며, 이 말이 학벌-입시를 둘러싸고 펼쳐지는 모든 거짓말들을 대변한다.” 그 가짜 ‘수능’을 진짜 ‘수능’으로, “대학에서 수학능력이 있다고 판정되는 모든 학생들을 합격시키는 가부 판단 시험으로”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스카이’나 ‘인서울’ 대학들의 입구에 학생들이 과도하게 몰려 경쟁하는 현상”, 학벌 차별과 과도한 사교육 시장은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대입 자격고사는 결코 새로운 것도, 매우 혁신적인 것도 아니다. 2007년 정동영 후보가 대선 공약으로 제시한 바 있으며, 2017년 6월 전국 시도 교육감들은 진보와 보수를 불문하고 한목소리로 문재인 정부의 인수위원회에 2021년까지 도입되어야 하는 대입 형태로 제안했던 것이고, 2023년에도 전국 4년제 대학 총장 86명의 과반수(53.3%)가 가장 바람직한 대입제도로 선택한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단순한 가부 판단으로 대학 입학을 결정하는 이 제도가 실현 가능할까? 그 실현 가능성의 예는 다른 나라에서가 아니라 바로 한국에서 찾을 수 있다. 즉 이미 중학교평준화와 고교평준화가 국가 주도로 시행된 적이 있기 때문이다. “1969년의 중학교 입시제도 철폐(중학교 입학 추첨제)와 그 결과인 중학교평준화, 그리고 1974년의 고등학교 입시제도 개선(고교 입학 자격시험인 ‘연합고사’로의 전환, 즉 ‘줄 세우기’ 시험으로부터 합격·불합격 판정의 자격고사로의 전환)과 그 결과인 고교평준화이다.”(170쪽) 이 개혁의 공통 목적은, 과도한 입시 경쟁을 없애고, 해당 각급 학교의 교육을 정상화하고, “사회 경제적인 병리현상의 치유”에 있었다. 이 방법들은 교육 현장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에 충격을 준 일종의 ‘쇼크 요법’이었고 소기의 성과를 올렸다. 이렇게 해서 중학교 입시를 준비하는 초등학교 아이들에게 주입됐던 ‘사당오락(四當五落)’, 즉 ‘하루에 네 시간 자면 붙고 다섯 시간 자면 떨어진다’는 유명한 이 말도 점차 사라지게 됐다.
대학평준화 또한 중학교평준화ㆍ고교평준화처럼 국가가 정치적으로 결단을 내리기만 하면 되는 문제라고 저자는 말한다. “대입 시험은, 대입 시험의 형태·방법은 국민들이 국가·정부와 직접 협상(‘딜’)할 수 있는, 국민들의 뜻에 따라 국가·정부가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이기 때문이다.
대학에 대한 획기적으로 투자하자,
대학무상화
한국의 교육은 모두 대학입시에만 초점이 맞춰진 채 돌아가며, 대학 입학 이후의 과정에 대해서는 사실상 방기한다. 대학 입학 이후의 과정에서는 어떠한 평가·경쟁·상벌의 제대로 된 제도적(공식적) 기준도 설정해놓지 않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대학 입학 이후의 고등교육에 대한, 즉 대학 인프라 일반과 고등교육을 이수하는 학생들에 대한 국가의 투자가 획기적으로 늘어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출발은 고등교육재정교부금법 제정이다. 이 법은 안정적인 정부 재정 확보를 통해 대학에 대한 투자를 제고하고 대학의 공공성을 확보하는 동시에 대학의 균형 잡힌 발전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다. 그렇지만 국회에서 13번 발의되었으나 매번 폐기되었다.
고등교육재정교부금법이 중요한 이유는 이 법이 통과돼야 대학무상화를 실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이 법의 제정에 따라 확보될 대학 재정 지원금으로 현재 각 가정이 떠맡을 수밖에 없는 대학등록금을 국가가 부담하는 것이다. 2022년 기준 전국 국공립대학과 사립대학(4년제 대학과 전문대학 포함) 등록금 총액은 11조 992억 원이다. 이 금액은 현재 한국의 연간 사교육비 총액 약 40조 원의 약 4분의 1밖에 되지 않는다. 이 금액만 확보하면 대학 무상교육은 진행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대학평준화와 더불어 대학무상화가 실현된다면, 대학 서열 해소에도 도움이 되고, 사교육비와 대학등록금의 이중 부담에서도 벗어날 수 있다.
학벌-입시 체제가 사라진 세상 상상해보기
“학벌-입시 문제가 주는 수많은 폐해는 이미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고, 이제 참을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우리는 너무 위험한 상황에 빠져 있고, 국가는 망하게 생겼다. 지방은 오래전부터 식민지화되었다. 가만히 있어서는 결코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281쪽)
‘한국사회 모든 문제의 핵심’인 학벌-입시 체제는 진정 해결할 수 없는 것일까? 저자는 학벌-입시 문제는 해결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해결 ‘불가능’하다고 믿고 있기에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학벌-입시의 문제는 전형적인 정치적 문제, 기득권(권력)의 문제이며,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기득권에 대한 타격과 해체가 반드시 요구된다”고 다시 한번 강조한다.
이 책이 주장하는 학벌-입시 체제가 사라진 세상은 가능할까? 가능하다면 어떤 모습일까? 우리 모두 그 이후의 세상이 어떤 모습일지 상상해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