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사 산책’ 시리즈, 1940년대편 개정증보판 출간!
1945년 해방 이후의 정국은 그 어느 쪽도 양보할 수 없는 전쟁터였다. 타협과 화합은 정상적인 시절을 살고 정상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나 가능한 일이었다. 자기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한 극단적인 전투성만 돋보였고, 중간은 허용되지 않았다. 6·25 전쟁 중 저질러진 학살의 예비 연습은 이미 1940년대 후반에 충분히 이루어졌다. 규모의 차이만 있었을 뿐, 그 잔인성에서 다를 건 없었다. 당시는 일본 제국주의의 잔재라 할 폭력국가의 유산에 길들여진 대중들의 복종적인 의식과 행동이 별로 극복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그런 양극의 충돌이 해방정국이라는 새로운 무대에 펼쳐졌다.
물론 1945년 해방 이후의 극단적인 정국은 타협을 거부한 좌우(左右) 양쪽의 책임이랄 수 있다. 하지만, 아무래도 ‘욕망’에 더 치우쳤던 우익에 더 큰 책임이 있을 것이다. 우익은 일제와는 타협했어도 좌익과는 타협을 하지 않았다. 온건 우익은 소수였고 아무런 힘을 쓰지 못했다. 강경 우익에게 일제와의 타협은 자신들에게 권력과 금력을 가져다줄 수 있었지만, 좌익과의 타협은 권력과 금력을 차지하는 데에 위협이 되거나 그걸 나눠먹어야 하는 타협이었다. 바로 이런 이해관계가 이데올로기에 우선했거나 이데올로기와 혼재되었을 것이다. 민중들은 쌀밥 한 숟가락을 위해, 어떤 이들은 더 잘 먹고 출세하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카오스의 도가니’ 속으로 뛰어들었다.
『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편: 8ㆍ15 해방에서 6ㆍ25 전야까지』 개정증보판은 모두 2권으로 구성되었다. 제1권은 1945년과 1946년, 제2권은 1947년과 1948년과 1949년의 역사를 담아냈다. 강준만은 한국처럼 현대사가 끊임없이 다시 쓰거나 수정하거나 보완해야 할 필요성이 큰 나라는 없을 것이며, 한국의 운명에 큰 영향을 미친 나라들의 비밀문서가 해제되고, 비극적인 과거에 대한 진상이 뒤늦게 밝혀지면서 배상과 보상이 논의되는 상황에서 21년 전에 출간된 『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편』의 개정증보판을 펴낸다고 말한다.
여운형 암살과 ‘테러 정치’
1947년 7월 19일 여운형은 미국으로 돌아가는 재미 조선사정협의회 회장 김용중과 작별인사를 나누고 자택으로 돌아가던 중에 저격을 받고 사망했다. 여운형은 1945년 8월 18일부터 테러를 당하기 시작해 그간 10번의 테러를 당했는데, 11번째 테러에 목숨을 잃은 것이다. 참으로 기구한 운명이었다. 여운형의 암살범은 김두한이 고문으로 있던 백의사의 멤버인 극우 청년 한지근이었다. 여운형의 암살은 어느 정도 예고된 것이었다. 여운형은 1946년 2월 9일 북한을 방문한 이래 다섯 차례에 걸쳐 방문했으며, 매번 김일성을 만났다. 바로 이 점이 훗날 남한에서 여운형에 대한 평가를 어렵게 만들고 여운형에 대한 언급을 조심하게 만드는 이유가 되었지만, 오히려 그 점이야말로 여운형의 장점이요 강점이었다는 평가도 나온다. 결국 좌우합작위원회의 좌측 수석이었던 여운형이 암살당함으로써 좌우합작운동은 사실상 활동 정지에 들어가고 말았다.
여운형에 대한 테러는 중간파와 좌익 지도자들을 크게 위축시켰으며, 그들의 활동을 제약하는 효과를 낳았다. 좌익 지도자들은 더욱 심각했다. 여운형 암살 사건이 일어난 1947년 여름은 해방정국을 내내 강타했던 테러가 유난히 기승을 부린 시절이었다. 7월 한 달 동안 모두 128건의 테러가 발생해 36명이 사망하고 385명이 부상을 입었다. 8월에는 68건의 테러로 17명이 죽고 158명이 부상을 당했는데, 68건 중 37건은 우익에서 저질렀고 16건은 좌익에서, 나머지 15건은 불명이었다. 또한 좌익 청년단체보다는 우익 청년단체의 폭력과 테러가 더 심했는데, 이는 우익 청년단체가 경찰의 비호를 받는 동시에 좌익 청년단체와는 달리 중앙과 지방의 명령 계통이 확립되지 않은 탓이었다. 가장 왕성한 테러 활동을 벌인 게 바로 서북청년회였으며, 이승만은 테러리스트들의 좌익 공격을 금지할 수도 없고, 금지하는 것을 원하지도 않는다고 말했다.
제주 4·3 항쟁의 비극
제주 4·3 항쟁은 30여 만 명의 도민이 연루된 가운데 3만 명 이상의 희생자를 냈다. 3만 명은 당시 제주도 인구의 10분의 1이었다. 게다가 전체 희생자 가운데 여성이 21.1%, 10세 이하의 어린이가 5.6%, 61세 이상 노인이 6.2%나 차지하고 있었다. 1947년 3·1 발포 사건 이후 지역 주민과 경찰이 자주 충돌했는데, 1947년 3월 우도와 중문리 사건, 6월 종달리 사건, 8월 북촌리 사건 등이 대표적인 사건이었다. 그리고 1948년 3월 경찰에 연행되었던 청년 3명이 경찰의 고문으로 잇따라 숨지는 사건이 발생해 민심이 동요했다. 경찰과 서북청년단에 대한 도민들의 분노를 잘 알고 있던 제주 주둔 경비대 제9연대는 4월 3일의 무장대 습격 사건을 도민과 경찰·서북청년단 간의 충돌로 간주했다.
미군정 보고서는 군대, 경찰, 우익 청년단체의 토벌을 ‘레드 헌트’로 명명했다. 민중을 ‘사냥’해야 할 인간 이하의 ‘동물적 대상’으로 격하시켰다. 이러한 ‘인간 사냥’으로 인해 빚어진 가장 참혹한 희생은 1948년 11월 중순부터 1949년 3월까지 약 4개월 동안에 발생했다. 10월 11일 제주도 경비사령부가 설치되었고, 10월 17일 제9연대장 송요찬은 포고문을 발표했다. 그 핵심은 “포고에 위반하는 자에 대하여서는 그 이유 여하를 불구하고 폭도배로 인정하여 총살에 처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이게 바로 그 악명 높은 ‘초토화 작전’이라는 것이었는데, 이는 사실상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살해하겠다는 작전이었다. 2003년 10월 15일 제주4·3사건위원회는 유혈 사태를 초래한 초토화 작전과 집단 인명피해의 최종 책임은 당시 군통수권자인 이승만에게 있다고 지적했으며, 10월 31일 노무현은 사건 발생 55년 만에 국가권력의 잘못에 대해 대국민 사과를 했다.
국가보안법 공포
1948년 9월 29일 내란행위특별조치법안이 다시 등장해 국회 본회의에 제출되었다. 이 법은 곧 ‘국가보안법’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사회적으로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이 법은 공산주의를 불법화하고, 공산주의에 대한 정의와 처벌 규정이 아주 모호해서 정권이 정적을 제거하는 데에 얼마든지 악용할 수 있었다. 국회에서도 찬반 논쟁이 벌어졌다. 그러나 국가보안법은 한민당과 이승만 지지 세력의 연합에 의해 11월 20일 국회를 통과해 12월 1일 공포되었다. 이제 통일 논의 자체가 어렵게 되었다. 북측에 무엇을 제안한다거나 남북회담을 하자거나 합작을 하자는 것도 국가보안법에 따라 처단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국가보안법을 가장 원한 사람은 이승만이었다. 이승만은 당시 법무부 검찰국 초대 검찰과장 겸 고검 검사로서 ‘빨갱이 잡는 검사’로 이름을 날린 선우종원에게 “빨갱이는 무조건 포살해야 돼”라고 격려했다.
외무부 장관 장택상이 유엔위원단에 제시한 통계에 따르면, 1949년 4월까지 국가보안법으로만 체포된 인원은 8만 9,700여 명이었다. 1949년 한 해에만 체포된 인원은 11만 명 이상이었다. 국가보안법이 조장한 사회적 분위기에 자극되어 군 내부의 숙군 작업은 더욱 거세졌다. 1949년 1월 2일 육군 정보국에 특별수사과와 그 예하의 15개 지역파견대를 설치하고, 1949년 10월 21일에는 육군특무부대를 창설했다. 기존의 군과 경찰력 강화 프로그램은 더욱 강화되었다. 1947년 말 경비대는 1만 7,000명 수준이었으나 1948년 여름에는 5만 명, 1949년 초에는 6만 5,000명으로 증강되었다. 1948년 9월 1일 조선경비대와 조선해안경비대가 국군에 편입되었고, 9월 5일에 각기 육군과 해군으로 개칭되었으며, 11월 30일 국군조직법이 공포된 뒤 12월 15일 국군이 정식 법제화되었다. 경찰력도 1948년 초 3만 명, 1949년 3월에는 4만 5,000명으로 증강되었다.
이승만 우상화
1949년부터 이승만의 귀환일과 생일은 국경일처럼 경축되었다. 이승만의 생일에는 중앙청 광장에서 정부 주도로 공식적인 ‘대통령 탄신 경축대회’를 열었다. 그의 생일은 탄신일로 불렸으며 군경 합동의 육해공군 삼군 사열까지 받았다. 모든 국민은 집집마다 국기를 달아야 했다. 신문들의 아첨도 지극했다. 학교마다 이승만의 초상화가 내걸리고, 이승만의 생일에 집집마다 태극기를 게양해야 했다는 건 결코 가볍게 넘겨도 좋을 문제가 아니다. 제왕주의와 영웅주의에 사로잡힌 지도자를 섬기지 않으면 안 되었던 이승만 체제는 이조 왕정시대가 여전히 끝나지 않았다는 걸 웅변해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승만은 한민당 인사들과 평안도 출신 반공 세력 등 많은 우익 세력의 지원을 받아 권력을 장악한 이후 그들을 정치적으로 제거하고 자신의 ‘친위 그룹’ 또는 ‘가신 그룹’으로 대체시켜 나갔다.
이승만의 전통은 지극히 한국적인 것으로서 그건 지금까지도 살아 있다. 이른바 ‘승자 독식주의’라는 것이다. 일단 절대 승자가 탄생하면 절대 복종하고 승자를 우상화하는 문화는 이후 반세기 이상 한국 정치를 지배하게 되었다. 그게 거쳐야 할 과정을 거치지 않은 채 도약한 역사의 업보라는 것이다. 이승만의 시계는 구한말에 멈춰져 있었다. 이승만은 평생을 복고적 투쟁을 위해 바친 인물이었다. 그래서 이승만은 대한민국을 세우고 초대 대통령이 되었으며 향후 12년간 남한 사회를 왕처럼 군림하면서 지배하게 된다. 이런 우상화 또는 지도자 숭배증은 강압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통제와 조작은 가해졌을망정, 왕조 시대처럼 지도자를 숭배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민중의 강렬한 정서의 토대 위에서 구축된 것임을 부인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