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전미도서상 최종 후보, BBC “세계를 바꾼 12명의 예술가”
시인 일리야 카민스키의 가장 현재적인 전쟁 서사시
“마술적인 문체를 쓰는 카민스키의 시는 회화로 말하자면 중력의 법칙을 무시하고 색을 새로 부여하지만 오히려 일상의 현실을 더더욱 잊을 수 없게 하는 샤갈의 그림과도 같다. 그의 상상력은 너무도 강렬해서 우리도 그만큼의 비탄과 환희로 답하게 된다.” -미국예술문학아카데미 메트캐프상 심사평
★ “이 공화국에 방문한 이상, 당신은 변하지 않을 수 없다” -《뉴욕 타임스》
★ BBC 선정 2019 ‘세계를 바꾼 12명의 예술가’ 일리야 카민스키 국내 첫 출간
《듣지 않는 자들의 공화국》은 전쟁이 일상과 인간성에 미치는 영향을 심오하게 그려내는 서사시집이다. 시의 초점은 폭력과 파괴 자체가 아닌 그 소용돌이에 휩쓸린 삶의 변화에 맞춰진다. 이야기를 여는 것은 소년의 죽음으로 촉발된 바센카 마을 사람들의 ‘듣지 않는’ 봉기이고, 그들의 용기와 연대는 단연 빛난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다. 봉기의 결과로 죽음의 위협이 가해질 때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선택을 하고, 서로 다른 국면에 처한다. 더 강렬히 저항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살아남기 위해 숨죽이는 이가 있다. 예기치 않은 갈등이 일어난다. 갈라지고 흩어지는 이야기의 갈래 사이를 오가며, 시의 질문은 점점 더 통렬해진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 결국 자신의 생존을 위해 행동한 이를 악인이라고 할 수 있는가. 신이 있다면 왜 인간에게 이런 시련을 주는가. 도대체 전쟁은 인간에게 무슨 일을 하는가.
이 시집의 가장 독창적인 지점은 듣지/들리지 않고 말하지 않는 청각장애(혹은 농聾)의 상태가 전쟁 중의 인간성, 그리고 우리가 가장 마지막에 지닌 무언가의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군과 폭력, 복종에의 요구에 저항하는 의지이자 태도이면서 때로는 개인의 내면과 통제를 벗어나 작동하는 사건 혹은 문화로 등장하며 인간성의 본질을 탐색하도록 이끈다. 중간중간 삽입된 수어 일러스트는 언어를 넘어선 소통의 힘을 웅변한다. 사람들은 입으로 떠드는 대신 자리를 지키고, 똑똑히 지켜본다. 목격함으로써 알고, 존재로서 증언한다.
이는 청각장애인인 시인 자신이 소리 없는 세계에서 시를 익힌 덕분이다. 네 살 때 유행성이하선염에 걸려 청력을 잃은 카민스키는 “소리가 사라진 후 목소리를 보게 됐다”고 회고한다. 사람들이 말로 하지 않은 것들, 몸과 몸짓, 미묘한 표정 변화 사이에서 빚어진 그의 시어는 말이 없기에 더욱 선연하고, 불려 나온 감각들은 허상 없이 풍성하다. 더 중요한 것은 농의 상태가 고립된 경험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시인은 몸의 가능성을 주고받아 이루는 농문화를 통해 “언어의 부재가 우리에게 힘을 준다”는 사실을 깨쳤다. 청력 상실은 카민스키에게 인간과 말, 언어와 사회의 관계를 미세하게 포착하는 특별한 재능이 되었다. 그가 아니라면, 어느 누가 정치적 행위로서의 침묵과 목격을 이토록 강렬하게 표현할 수 있었을까.
★ “정치적 혼란의 시대에 침묵과 청각장애에 대한 명상” -《엔터테인먼트 위클리》
★ “‘평화로운 나라’에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그려 보이는 지도” -《뉴요커》
시의 배경인 바센카는 가상의 마을이지만 온전히 상상된 곳은 아니다. 그곳은 시인이 자신의 경험을 투영한 전쟁의 무대다. 카민스키는 옛 소비에트연방(소련)의 영토였고 지금은 우크라이나의 일부인 오데사에서 1977년 태어났다. 그리고 소련 해체 직후인 16세 때 고향의 반유대주의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했다. 소련이 붕괴되는 과정 내내 겪은 크고 작은 전쟁들, 난민으로 떠돌아야 했던 시절이 그의 몸 깊숙이 각인되어 있으므로 공포와 혼란 속 인간성이 카민스키의 주된 주제가 된 것은 자연스럽다.
카민스키의 경험에 세계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의 상들이 더해져 응축된 바센카의 사건들은 최근 격화되어 온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 분쟁 상황과 겹쳐 더욱 생생히 읽힌다. 이는 카민스키에게 온전히 남아 있는 전쟁의 기억 때문만은 아니다. 시는 그곳과 이곳, 즉 우크라이나와 미국 간 이격에서 쓰인다. 어디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하는 시인 자신의 존재의 이물감이 도저하다.
“우크라이나에서 수백 마일 떨어진 곳, 그 전쟁에서 멀리 떨어진 미국에 사는 나에게 전쟁에 대해 쓸 자격이 있을까? 이 평화로운 뒷마당에서?” 카민스키 자신이 고백하듯이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에서 온갖 미디어를 통해 전쟁의 소식을 접하는 그의 위치는 역설적이다. 자신의 삶이 끔찍한 것은 그곳에 친지가 남아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지금 이곳의 풍요가 그곳의 고통에 기대어 있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강대국은 판돈을 대고, 산업은 무기를 팔고, 자본은 재건을 노린다. 내 주변의 번영은 어딘가의 붕괴를 딛고 있으며, 핏자국을 감춘 평화는 태연하다.
카민스키의 작품은 바로 그 지점, 기이하고 으스스한 현실의 공중에 있기에, 인간으로서의 슬픔과 부끄러움을 공유하는 세계 시민들에게 더 묵직하게 다가간다. 그 감각이 유독 절실한 〈우리는 전쟁 통에서도 행복하게 살았네〉와 〈평화의 시절에〉, 두 편의 시는 전쟁의 소식이 들려올 때마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널리 퍼뜨려졌다.
★ “세상이 무너져 가고 있다면, 나는 진실을 말해야 한다. 하지만 세상에 대한 사랑을 멈출 수는 없다” -일리야 카민스키
★ 폭력과 분열의 소용돌이 속 인간이 쥔 가장 고요한 것들의 시, 끝내 희망을 향한 질문
전쟁이란 무엇인가.
카민스키의 시에서 전쟁에 처한 인간은, 선명하지 않다. 단순히 선하거나 악하지 않고, 늘 너그럽거나 잔인하지도 않으며, 일관되게 확신하지 못하고, 신에게 묻고, 결국 돌아선다. 그런 인간상의 파노라마 속에서 서서히 질문은 바뀌어 간다. 전쟁이란 무엇인가, 에서 전쟁은 인간에게 무슨 일을 하는가, 로. 시인 역시, 독자 역시, 우크라이나인 역시, 전쟁으로부터 멀리 있다는 환상에 빠진 사람들 역시 자유롭지 않은 풍경들. 되돌아보면, 모두 슬픈 풍경일지언정, 벌거벗었기에 진실하고 애틋하다.
전쟁이 인간을 이토록 침범할지언정 그는 인간에 대해 끝까지 미워하거나 절망하지 못한다. 깊은 어둠 속에서도 자신을 살린 것은 “이야기, 작은 기쁨, 서로를 붙잡으려는 사람들, 사랑하고 위로하려는 노력들”, 그토록 인간적인 것들이었으므로. 그러므로 그는 쓰지 않을 수 없고, 진실을 직시하면서도 사랑을 멈출 수는 없다고 고백한다. 이 전쟁에 대해, 이 인간에 대해.
카민스키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시작된 이후 자신의 트위터에 우크라이나에 있는 친지, 시인과 작가 들로부터 받은 메시지를 전해 왔고, 그것은 그에게 시를 쓰는 행위와 다르지 않았다. 도시가 폭격당하는 동안 대피소에서 바들바들 떨었던 친구가 기억나는 시를 암송하고 번역하며 그 시간을 버텼다는 이야기를 하며 그는 되묻는다. “도대체 누가 나에게 시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겠어요?”
그가 살아가는 불길하고 평화로운 나라에서, 그가 전하는 이격의 사태와 이방인의 감각은 얼마나 내밀하고도 보편적인지. 이 치열한 시인과, 대표작 《듣지 않는 자들의 공화국》이 끝나지 않는 폭력과 분열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희망을 찾고자 노력하는 한국 독자들에게 정확히 닿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