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보적인 한국현대사 연구자 정병준의 필생 노작
“김규식의 일생을 다룬다는 것은 한국 근현대사, 한국 독립운동사의 주요 쟁점과 활동을 다루는 것과 같았다. 한마디로 평생 공부한 바를 총정리하는 것이다. 김규식의 평전을 쓴다는 것은 일생의 도전과 같은 일이었다. 그만큼의 연구와 공부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저자의 글〉 중에서)
그리고 마침내 한국출판문화상 학술 저술 부문을 두 차례 수상한(2006년 『한국전쟁』, 2015년 『현앨리스와 그의 시대』) 정병준 교수가 해방 80주년을 맞아 『김규식과 그의 시대』(전 3권)를 출간했다. “한 장의 사진과 조각난 글자의 흔적을 찾아 세계를 떠돌고, 역사의 편린과 모자이크를 맞추기 위해 온종일 촬영하고 복사하고 스캐닝하고 사람을 만나고 책을 읽는” 역사학자의 커다란 정성과 수고와 노동을 담아낸 필생의 노작(勞作)이다. 총 1872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 치밀하고 촘촘하게 구성된 본문, 각 권에 빼곡하게 실린 부록, 참고문헌, 표ㆍ그림, 색인을 보면 이 책을 만들기 위해 저자가 흘린 땀과 발품의 폭과 깊이를 여실히 알 수 있다(이 책의 백미인 3권 말미의 〈남은 말: 김규식 자료 추적기〉에서 저자는 마치 ‘역사 탐정’처럼 자료들을 집요하게 수집한 경위와 이를 접한 후의 감동과 함께 1~3권의 핵심 내용들을 정리했다).
고아 소년 “존”이 3·1운동을 촉발하고
전 세계를 누비는 독립운동가가 되기까지,
처음으로 발굴된 자료들로 다시 쓴 인간 김규식의 모든 이야기
각 권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권: 미국인 선교사의 고아원에서 자란 유년기, 조선 역사상 거의 최초의 미국대학 유학생이자 장학생, 조선 복귀 후 YMCA 등에서의 선교 활동과 전방위적 학문 활동, 중국 망명과 독립운동 투신
2권: 3.1운동의 하나의 기폭제가 된 〈파리강화회의〉 참석(친미 외교), ‘한국통신국’의 1인 외교 투쟁, 구미위원부에서의 이승만과의 만남과 큰 갈등, 뇌종양 수술
3권: 러시아에서의 〈극동민족대회〉 활동과 좌절(친소 외교), 임정 탈퇴, 중국인들과의 연대 반일 운동, 중국대학 교수 생활, 방미 독립운동 자금 모금, 민족혁명당 가입과 임정 복귀 및 부주석 역임
불우한 가정환경 속에서 미국 선교사의 고아원학교에서 “존” 또는 “본갑이”로 불렸던 한 소년이 탁월한 어학 능력을 바탕으로 미국으로 유학을 가고,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한국으로 돌아와 사회의 중견 리더로 자리를 잡다가 시대의 흐름을 타고 큰 뜻을 품어 중국으로 망명해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을 시작한다. 일본의 방해에도 전 세계로 진출해 한국의 독립을 부르짖고 설득한다. 특히 1919년의 〈파리강화회의〉에서 단기필마 1인 외교로 한국통신국을 설립하고 운영함으로써 3·1운동의 하나의 기폭제가 되었던 그의 행보는 한국근현대사 속 ‘외교’의 빛나는 순간이었다.
또한 중국인들과 연대하여 반일 운동을 전개하고, 사상·이념·정파에 유연하게 대응하며 독립운동의 대의를 중심으로 통일전선적 활동을 이어 나간다. 극단으로 기울지 않았기에(단 하나의 예외적인 경우는 1920년대 초반의 ‘극동민족대회’일 것이다) 때로는 ‘중심’에서 배제되었고, 활동에 제약이 생기기도 했지만(예를 들어, 화려한 직함과는 달리 1940년대 그의 ‘임정 부주석’ 지위에는 그만한 실권이 따르지 못했다), 투쟁의 길에서는 결코 이탈하지 않았다.
이러한 독특한 특성으로 인해 명성에 비해 그의 진면목과 활동들은 제대로 발굴되지 못한 부분들이 많았다. 해방 이후 5년간의 활동은 그나마 알려져 있지만, 그의 출생과 성장, 간고한 독립운동가로서의 삶에 관한 이야기들은 많은 부분 제대로 알려지지 못했다. 『김규식과 그의 시대』는 단순한 기존 문헌 연구 분석을 훨씬 뛰어넘어 ‘인간 김규식의 모든 것’을 담았다고 할 수 있을 만큼 다양하게 새로운 자료들을 발굴하여 공개하고, ‘그의 시대’에 관해서도 종합적으로 정리함으로써, ‘그’와 ‘그의 시대’의 성취와 한계, 명과 암을 가감 없이 드러내고 온전한 역사의 진실을 채워냈으며 수많은 추후 연구 과제들을 파생시켰다. 말 그대로 인간 김규식에 관한 기록 평전이자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관한 역사 논픽션이며, 한국근현대사의 여러 쟁점과 연구 과제를 정면으로 다루고 제시하는 묵직한 학술서인 것이다.
모스크바, 뉴욕, 중경을 넘나든 김규식의 항일운동
그리고 파란만장 한국독립운동사의 빛과 그림자
3권은 1921년말부터 1945년까지에 이르는 김규식의 중국에서의 활동을 다루었다. 1921~1922년 모스크바 극동민족대회와 1923년 국민대표회의의 실패, 온축과 정돈의 시기 이후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 결성, 1933년 도미 외교, 1935년 민족혁명당 참가, 중국 대학교수 생활, 1943~1945년 임시정부 부주석 등 중국 내 한국 독립운동과 관련된 김규식의 활동을 다룬 것이다. 김규식은 조직을 이끄는 성향의 인물은 아니었지만 (1919년을 전후해서는 신규식 및 동제사, 여운형 및 신한청년당과 연계했고) 1920년대 초반에 소련 및 사회주의 운동 세력과 연계(특히 고려공산당 이르쿠츠크파)했고, 1930~1940년대에는 우여곡절 속에서 임시정부〔한국독립당(김구)과 민족혁명당(김원봉), 이 시기 김규식은 민혁당 소속〕와 연계하였으며, (앞 시기 중한호조사부터) 중한민중대동맹 등을 통해 중국 항일 세력과도 꾸준히 관계를 이어왔다. 그렇기에 긴 시기의 다양한 활동, 조직, 인물들을 다루게 되었고, 사실상 중국 내 한국독립운동사를 쓰게 된 셈이 되었다.
특히 제3권은 김규식뿐만 아니라 그를 이끈 시대, 시대정신, 사람들의 이야기를 함께 다뤘다. 이 시기를 다루는 데 있어서 김구·한독당·임정 중심, 김원봉·민혁당·조선의용대 중심, 연안 독립동맹·조선의용군 중심의 설명 구도가 병립하는 기성의 연구와는 다른 접근을 시도하려고 노력했다. 이들의 연합과 갈등, 중국국민당과의 연계, 그리고 세계정세와의 연동 등을 포괄하여 ‘빛’과 ‘그림자’를 아우르는 임시정부의 전체적이고 진실된 상을 그려보고자 하였다. 또한 1920년대 초반 김규식이 외교독립노선의 방향타를 소련(러시아)으로 돌리고 모스크바 극동민족대회와 블라디보스토크 국민위원회에서 활동했던 일들이나, 1930년대 초반 ‘문제적 인물’ 한길수(리한)에게 준 위임장과 그와의 관계 등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주목받아야 할 사실들 역시 구체적으로 살펴보았다.
또한 3권에는 『김규식과 그의 시대』 1~3권 전체를 총괄하는 역사학자의 분투기, 〈남은 말: 김규식 자료 추적기〉와 4권을 예비하는 논문(「버치 문서를 통해 본 1946~1947년 김규식의 정치 활동」)도 수록되어 있다.
해방 80년, 들리지 않았던 역사의 목소리에서 미래를 조망한다
“정치적 성패로 따지자면 성공하지 못한 사람의 역사이지만 그 삶 속에 담겨 있던 진정성과 불꽃 같은 열정의 순간들이 마음을 사로잡았다.” (〈저자의 글〉 중에서)
올해는 해방 80주년이다. 제국주의, 파시즘,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 민족해방운동이 교차했던 2차 세계대전의 향방 속에서 우리 민족의 독립도 위치 지어졌다. 하지만 불과 수개월 전의 내란·외환 쿠데타가 보여주듯, 미완의 해방은 전쟁과 사대, 독재의 이름으로 긴 시간 여전히 우리를 옥죄어 왔다. 그리고 2025년, 미국 일극체제의 종말과 다극화라는 전후 80년 질서의 변동 양상은 또다시 우리를 거대한 시험대에 올리고 있다.
80년이 지났지만 우리는 여전히 ‘미완의 해방’을 말한다. 그럴수록 현재 우리의 좌표를 확인하고 역사에서 배우고자 한다면, 그동안 ‘들리지 않았던 목소리’에 더욱 귀 기울여야 한다. ‘새로운 세상’에 대한 전망이 그 어느 때보다 절박한 시기, 지금까지 한국의 정치-역사 현실에서 충분히 조망 받지 못하고 배제되거나 무시당했던 김규식의 헌신적이면서도 합리적이고, 독립이라는 기치 아래 국내외 모든 진영에 개방적으로 합작을 도모했으며, 세계정세의 흐름 속에서 독립운동의 위치를 연결 지어 고민했던 독특한 행보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다양한 발현 가능성을 지녔던 역사의 교훈에 귀를 기울일 때, 들리지 않았던 목소리는 비로소 커다란 울림이 되고, 미래를 조망하는 지도로서 새로운 상상력의 출발점이 된다. 좌우합작과 민족단합을 통해 자주독립과 해방을 꿈꾼 동시에 동양과 서양,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미국과 중국과 소련(러시아)을 넘나들었던 진정한 세계인, 김규식에 지금 우리가 주목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