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조합원에 대한 보호를 포기한 조직은 노동조합이 아니다.“
1998년 민주노총은 정리해고제를 수용하기로 결정한다. 민주노총을 합법화해 정치세력화하려는 방편이었다고는 하지만, 그 결과는 너무나 혹독했다. 구조조정이 일상화되었고, 비정규직은 늘어만 갔다. 노동자가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갈렸고, 노동조합 조직률은 10퍼센트로 반토막이 났다. 그리고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이 시작됐다. 노동조합의 활동은 정규직 중심이 되었고, 비정규직은 노동조합에 가입하는 일조차 쉽지 않았다. 정규직 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의 임금 격차는 2배 넘게 벌어졌고, 심지어 정규직 노조가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반대하고 비정규직을 자신들의 방패막이로 삼는 일까지 벌어졌다.
게다가 1995년 창립 이후 민주노총은 민주당과의 연대를 통해 노동자의 권리를 확장하고, 사회를 개량할 수 있다는 희망으로 민주당을 지지했었다. 하지만 노동법이 노동자들에게 가장 불리하게 개악된 시기가 바로 김대중ㆍ노무현 정권 때였다. 이들은 정리해고제를 도입해 수많은 노동자를 거리로 내쫓았고, 근로자파견법ㆍ기간제법 등으로 노동자의 60퍼센트를 비정규직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운동을 발판 삼아 국회로 입성한 소위 운동권 출신의 국회의원들이 있었다. 한때는 우리 편이었고, 그래서 금배지를 달았어도 우리 편이 되어줄 거라 믿었던 사람들에게 말 그대로 뒤통수를 맞은 꼴이었다.
“기존 노조들은 마음이 콩밭에 가 있지만, MZ세대가 주축이 된 노조는 정치운동이 아닌 노조원의 이익을 위해 활동하겠다.”
최근에 ‘새로고침’, ‘올바른’이라는 이름을 달고 생겨난 이른바 MZ 노조들. 이들은 ‘기존 노조들은 마음이 콩밭에 가 있지만, MZ세대가 주축이 된 노조는 정치운동이 아닌 노조원의 이익을 위해 활동’하겠다고 말한다.
MZ들을 보는 여느 어른들이 그렇듯, 지금 노동조합의 주력 활동가들도 이들을 보면서 혀를 찬다. ‘요즘 애들 개인주의적이라더니 자기 이익만 챙기려고 하면 쓰나, 노동조합은 그래서는 안 된다. 노동조합은 그런 일만 하는 데가 아니다.’ 틀린 말은 아니다. 노동조합 활동에서 정치활동을 배제하면 조합원의 기본적인 이익조차 지키기 어렵다는 건 역사를 통해 수없이 경험해왔고, 지금도 날마다 겪고 있다. 바로 얼마 전 확정된 내년도 최저임금 인상안(시급 10,030원, 월급으로 치면 215만 6880원. 2024년 2인 가구 최저생계비는 220만 9565원이었다)이 그렇고, 수많은 노동자의 끔찍한 죽음 이후 어렵사리 만들어진 〈중대재해처벌법〉이 제대로 시행되지 않아 여전히 노동자들의 산재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고 있는 현실이 그렇다. 전부 노동자들의 이익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절실한 문제들이지만, 정부를 상대로 하지 않으면, 정치투쟁을 하지 않으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다. 상황이 이런데도 MZ들이 정치투쟁을 무작정 거부한다면 그건 진짜 문제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최저임금 인상투쟁의 출발점에, 그리고 윤석열 탄핵의 현장엔 MZ들이 있었다.”
2013년 우리나라에서 ‘최저임금 1만 원’을 요구하며 최저임금 인상투쟁의 중요한 출발점을 만든 건 민주노총이 아니라 MZ들이 만든 알바노조와 청년유니온이었다. 최저임금 인상이라는 사회적 공감대를 만들어내고, 정치권에서마저 이 문제를 공약으로 내걸지 않으면 안 되게 만든 건 이들의 활동이었다.
지난 겨울 장장 4개월을 매일 같이 광화문에, 한남동에 모여 응원봉을 흔들며 윤석열 탄핵을 외치고, 한겨울 남태령에서 온몸으로 밤새 눈을 맞아가며 민주주의를 지켰던 수많은 사람들. 거기에도 ‘소중한 내 가족ㆍ내 친구들을 지키기 위해, 정치적 발언을 해도 탄압받지 않는 나를 위해 바람이 불어도 꺼지지 않는 불빛을 들고 나왔다’고 말하는 MZ들이 있었다.
“구조조정과 정리해고의 직접적 피해자에는 MZ세대도 포함되어 있었다.”
지금 우리가 MZ세대라고 부르는 이들은 1998년 정리해고제가 도입되었을 때 고작해야 초등학교ㆍ중학교ㆍ고등학교를 다니던 아이들이었다. 넉넉하지는 않았어도 부모의 그늘 밑에서 보호받고 자라던 이 아이들은 정리해고제가 도입되자마자 하루아침에 자기 부모와 함께 길거리로 내몰려 어른들이 겪는 현실을 고스란히 같이 겪어야 했다. 언제 회사에서 짤릴지 모른다는 불안감, 반으로 동강 난 월급 때문에 투잡ㆍ쓰리잡을 뛰어야 하는 고단함, 생활고에 시달리다 어쩔 수 없이 빌린 돈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참함. 어른들만이 겪는 일이 아니었다.
‘더 이상 이래서는 안 된다’는 절박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이 분신으로, 투신으로, 고공농성으로 이어졌지만 사회는 냉혹했고, 노동자를 위한 조직이라는 민주노총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정치권은 말할 것도 없었다. 사회의 어느 누구도 내 부모를, 나를 지켜주지 않았다.
지금의 MZ세대가 겪었던 세상은 이런 곳이었다. 한창 갖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것도 많을 나이에 투정 한번 제대로 부리지 못하고 지친 부모님의 눈치를 봐가며 자기가 원하는 걸 참고 또 포기해야만 했던 아이들. 이제는 어른이 되었지만 세상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고, 그래서 여전히 최저생계비에도 미치지 못하는 월급을 받으며 어렸을 적 겪었던 일을 어른으로서 또다시 겪고 있는 MZ들에게 세상이 내 편으로 보일 리 없을 것이다. ‘기존 노조의 마음이 콩밭에’ 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 건 어쩌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고, 세상을 그렇게 만들어온 어른들이 이제 와서 자기네들을 비난하는 건 더더군다나 억울한 일일지 모른다.
“지금의 MZ세대는 조직이 조합원을 보호하기 포기한 시대의 산물이고, 우리 87세대가 뿌린 씨앗이다. 우리는 그들에게 빚을 졌다.”
이 책의 저자들은 30년, 40년이 넘게 현장에서 노동조합 활동을 해왔다. 그러니 이 두 사람이 MZ들이 말하는 바로 그 기존 노조의 대표자 격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들은 민주노총과 같을 길을 걷지 않았다. 이 두 활동가는 민주노총에 대한 기대를 일찌감치 접고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일반노조를 만들고 활동해왔다. 노동자라면 정규직이건 비정규직이건 누구라도 가입할 수 있는 노동조합을 만든 것이다.
그래서일 테다. 이들이 MZ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는 여느 어른들과 같지 않다. 자신들의 경험을 내세우며 ‘라떼는 말이야’라는 어설픈 훈계를 늘어놓지도 않는다. 도리어 이들은 자신들이 MZ들에게 진 빚이 있다고 고백한다. 지금의 MZ세대를 표현하는 개인주의ㆍ실리주의는 “조직이 조합원의 보호를 포기한 시대의 산물”이고, “우리 87세대가 뿌린 씨앗이자 이들에게 진 빚이기도 하다”고. 그래서 한국노총이건 민주노총이건 다 싫다며 새로운 쟁의 방식을 만들어 노조 본연의 활동에 주력하겠다는 MZ들의 이야기가 이 두 사람에게는 그저 허무맹랑하게만 들리지 않는다. 그건 자신들이 봐왔던 어른들처럼은 하지 않겠다는 일종의 선언이고, 어른들이 뼈아프게 들어야 할 비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누군가 깃발이라도 쥐고 있어야 뒤에 시작한 사람들이 방향 찾는다고 우왕좌왕하는 시간을 줄여주지 않겠나”
“민주 노조건 어용 노조건 노동조합의 조합원이 늘어나는 건 무조건 좋은 일이다.” 자칫하다 욕먹기 십상인 이런 이야기를 이 두 저자는 주저 없이 말한다. 이유가 있다. “시작이야 어쨌든 일단 조직이 생기고 나면, 그 내부에서 민주적인 투쟁이 일어나 결국은 노동자의 이익에 부합하는 조직으로 변화하고 발전했던 게 노동자운동의 역사”라는 걸, 늘 노동자는, 노동운동은 그래왔다는 걸 믿기 때문이다. 그러니 지금은 개인주의ㆍ실리주의라는 껍데기를 쓰고 있지만, 머지않아 이 MZ세대들도 “현재의 노동운동 세력을 대체할 새로운 세력으로 발전할 것”이고, 지금의 노동운동도 “언젠가는 침체기를 벗어나 확장기를 맞을 것”이라고 이 두 활동가는 확신한다.
그렇다고 우려가 없는 건 아니다. 쓰다가 필요 없어지면 내팽개쳐져서 망가지기 일쑤인 도구처럼 노동조합도 그렇게 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그러다 생긴 게 ‘자판기 노조’다). 만들기는 쉽지만 유지하는 게 훨씬 어려운 게 노동조합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두 사람은 그건 걱정거리가 아니라 함께 고민하고 풀어가야 할 문제라고, 그러니 함께 풀어보자고 말한다.
‘다 자라서 자기 일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 어른의 사전적 정의다. 이 두 저자는 그런 어른으로서 이 책을 썼다. 자신들이 겪었던 오류를 솔직하게 털어놓고 바로잡기 위해, 그래서 청년들은 그런 오류를 겪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책을 썼다. 그리고 쉽지 않을 그 길을 이제는 함께 가보자고 뜻을 같이하는 동지(同志)로서 말한다.
“어떤 이가 내게 ‘왜 아직도 노동운동을 하고 있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누군가 깃발이라도 쥐고 있어야 뒤에 시작한 사람들이 방향 찾는다고 우왕좌왕하는 시간을 줄여주지 않겠냐‘고 답했던 기억이 난다. 나는 이 책이 MZ세대에게 그런 깃발 중 하나가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