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있는 나다. Ego sum qui sum.” - 『고백록』 7,10,16
이 문장은 고대 철학자의 고백만은 아니다. 어쩌면 오늘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여전히 유효한, 존재의 가장 깊은 차원에서 울려 나오는 물음이자 외침이다. 그 외침이 이제 고(故) 변종찬 마태오 신부의 유고를 통해 새롭게 되살아났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외침: 현대를 비추는 지혜』는 한 사제의 영성과 지성이 일생에 걸쳐 이룬 열매인 동시에 그가 후학에게 남긴 마지막 유산이다.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은 아우구스티누스라는 ‘위대한 영혼’을 단순히 연구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오늘의 동반자로 다시 만나게 된다.
동료 신학자들의 지성으로 재탄생한 유고
이 책은 특별한 방식으로 기획되었다. 변종찬 신부의 선종 이후, 유품으로 남은 컴퓨터에서 완성되지 않은 초고 원고들이 발견되었다. 변 신부는 생전, 한국 사회와 한국 가톨릭의 맥락 속에서 “왜 지금 아우구스티누스인가?”라는 물음을 던졌고, 그에 대한 응답으로 꾸준히 글을 쓰고 있었다. 단순히 성인의 사상을 정리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그를 오늘의 독자에게 어떻게 ‘현재화’할 수 있을지를 고심해 왔다. 이런 문제의식을 공감한 서울대교구와 수도회 소속의 여러 신학자는 변 신부의 유고를 분담하여 정독하고 보완하였으며,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의 정체성에 따라 책을 철학자, 신학자, 수도자, 사목자라는 네 부분으로 구성하였다.
그 결과, 한 저자의 글을 넘어 아우구스티누스를 향한 한국 가톨릭 신학 연구자들의 공동 결실로 이 책이 탄생했다. 학술적으로는 변 신부의 또 다른 논문집인 『혼돈 속의 질서』와 짝을 이루며 교부학의 초석이 되었고, 신앙적으로는 성인의 고백을 오늘의 언어로 되살려낸 새로운 통로가 마련되었다.
하느님을 찾는 삶의 여정
책의 첫 장은 성인의 생애를 따라가며, 그의 사상과 신앙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조망한다. 북아프리카 타가스테에서 태어난 아우구스티누스는 수사학을 공부하고 마니교를 거쳐 회의주의에 빠졌으며, 플라톤주의와 성경, 암브로시우스와의 만남을 통해 회심의 여정을 시작했다.
『고백록』에서 묘사되는 감동적인 오스티아의 환시, 카시치아쿰 공동체의 성찰, 타가스테에서의 은둔, 히포에서의 사목과 치열한 논쟁, 그리고 평화로운 선종에 이르기까지 그의 삶은 ‘하느님을 찾는 여정’이었다. 이 장은 단순한 연대기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성인의 체험과 회심, 그 속에서 발전한 사유와 믿음은, 오늘날의 독자에게도 영적 회심의 여운을 남긴다.
철학자이자 신학자, 깊이 있는 사유의 인간 아우구스티누스
변 신부는 아우구스티누스를 단순한 ‘신학자’로 다루는 데 그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아우구스티누스를 철학과 신학, 수사학과 설교, 고전과 성서가 한데 얽힌 복합적 인물로 이해하려 했다.
『호르텐시우스』를 통한 철학의 개종, 플라톤 학파의 서적을 통해 깨달은 감각과 지성의 이원성, 지혜(sapientia)를 향한 갈망은 모두 철학자로서의 아우구스티누스를 형성하는 핵심 요소다. 특히 하느님의 존재와 본성, 인간의 자유와 예지, 시간과 역사에 대한 관념 등의 철학적 주제는 성인의 사유 깊이를 보여준다. 그는 단순히 고대의 철학을 흡수한 것이 아니라, 신앙의 관점에서 이를 비판적으로 재구성하고, 신학의 언어로 통합했다.
저자는 또한 아우구스티누스가 삼위일체의 신비, 예정과 은총, 교회론과 종말론 등 수많은 주제에서 일관되게 ‘사랑’이라는 키워드를 놓지 않았음에 주목한다. 또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유 궤적을 따라가면서, 아우구스티누스가 ‘진리와 지혜’를 향해 어떻게 나아갔는지 풍성하게 드러내며, 신학자로서 중세 신학과 이후 교의 발전에 미친 영향을 고찰한다. 『신국론』, 『삼위일체론』, 펠라기우스주의에 대한 반론 등은 단순한 교의 정립이 아니라, 교회와 세상, 인간과 구원에 대한 존재론적 신학의 지평을 열어준다. 이러한 부분에서 저자는 단순한 해석을 넘어서, 아우구스티누스 사상의 통합성과 발전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수사학자의 언어로 철학을 말하고, 철학자의 정신으로 성경을 읽으며, 신학자의 겸손으로 사랑을 정의한 인간 아우구스티누스를 보여준다.
공동체의 영성과 삶
제4장에서 아우구스티누스를 수도자,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조명한다. 이 측면은 대부분의 아우구스티누스 연구서에서 간과되기 쉬운 부분이지만, 저자는 오히려 여기에 특별한 무게를 둔다. 왜냐하면 아우구스티누스의 모든 사상은 결국 ‘하느님을 찾고, 그분을 살며, 그분을 공동체 안에서 사랑하는 것’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수도자로서의 아우구스티누스는 초대교회의 예를 따라 공동체 중심의 삶을 선택했고, 청빈과 정결, 순명의 삶을 통해 하느님을 살아내고자 했다. 그래서 저자는 『수도 규칙』의 토대, 공동체의 영적 친교, 기도소와 절제의 윤리, 사랑과 용서의 실천은 성인에게 있어 단순한 이상이 아니라 실천적 진리였음을 강조한다. 성인이 “하느님을 찾는 것(interioritas)”을 수도 생활의 본질로 보고, 철학과 신학 역시 이 내향성에서 자양분을 얻는다고 보고 있음을 지적한다.
이런 시각에 따라 책에서는 수도원은 단순한 제도나 건물이 아니라, 사랑과 일치의 영성에서 탄생한 ‘살아 있는 교회’임을 되짚는다. 특히 순명의 개념을 장상에 대한 맹종이 아니라, 공동체의 일치를 위한 사랑의 실천이자 공동체 전체의 책임을 함께 짊어지는 형태로 재해석하고 있다.이는 오늘날 교회가 당면한 권위의 문제, 공동체의 책임과 위기 앞에서 아우구스티누스가 여전히 강력한 질문을 던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현재 독자를 향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외침
책의 마지막 장은 아우구스티누스를 사목자로서, 즉 사회와 정치에 발 딛고 선 신앙인으로 조명한다. 히포의 주교로서 그는 교히 안에 머물지 않고, 서로마제국의 혼란과 위기 속에서 하느님의 정의와 평화를 찾고자 했다. 그의 정치사상은 고전 철학과 교회의 가르침 사이에서 균형을 추구했고, 법과 정의, 전쟁과 평화, 국가와 교회의 관계에 대해 탁월한 통찰을 제시하였다.
“사랑하라. 그리고 네가 원하는 것을 행하라.” 이 말은 모든 윤리와 정치, 종교를 꿰뚫는 명제이자, 아우구스티누스의 전 생애를 관통하는 신앙 고백이다. 주교법정의 제도화, 정의로운 전쟁론, 공동선의 개념 등은 시대를 초월한 응답이며, 오늘날의 사회 갈등과 정치적 긴장 속에서 신앙이 어떻게 발언해야 하는지를 다시금 고민하게 만든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외침』은 단지 고대 철학자의 소개서도, 신학 안내서가 아니다. 앞서간 그리스도인이 남긴 고백이며, 한 지성인이 전하고자 했던 시대를 관통하는 외침이다. 변종찬 신부는 그 외침을 독자에게 들려주고 싶어 했고, 이제 그 소리를 들을 차례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지성, 영성, 사목, 공동체가 하나로 융합된 ‘살아 있는 신학’과 만남 속에서 오늘의 교회와 사회, 개인의 내면 속에서 어둠을 헤치고 나갈 빛이자 ‘지혜’가 될 수 있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