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가 이어지고 이어지는 연작 동시조로 담아낸
아이 적의 추억과 흔적, 그리고 ‘엄마’ 이야기
누군가 “한 편의 시는 한 편의 인생 쓰기”라고 했습니다. 유이지 시인은 자신의 시를 “잊힌 것들을 다시 불러와 나를 설명하는, 내가 빚어낸 것들과 내가 거쳐온 아이 적의 삶에 묻어 있는 상처를 보듬는 것”이라고 합니다.
시인의 아이 적의 추억과 그 흔적을 따라 ‘찾아가 보고 싶은 그 동네, 들어가 보고 싶은 그 집’과 이야기 속으로 함께 가 볼까요?
《날씨는 그날그날 대지의 마음씨야》 1부 ‘1막 2장’과 3부 ‘부뚜막 생일잔치’에는 마치 연작시를 읽는 듯 처음부터 끝까지 등장하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할머니, 할아버지, 큰이모, 아빠의 이야기 등 마치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하는 것 같지만, 동시조에서는 줄곧 한 사람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20대에/엄마를//30대에/이모를//
60대에/나와/내 동생을/기르시고//
이제는/우리 강아지도/두 마리나/기르시고.
-〈우리 외할머니는〉 전문
그 한 사람은 할머니입니다. 그리고 할머니는 사실 늘 ‘미안하다’를 달고 살던 시인의 엄마입니다.
꽃 허리 휘어져도//
아가야,/미안하다.//
화분에 물 줄 때도//
미안하다, 목말랐지.//
-〈미안 할머니〉 부분
동시조 〈우리 할아버지는〉에는 딸네 집에 가자마자 늘 집에 가고 싶어 하던 엄마 모습이, 〈우리 외할머니는〉, 〈키웠어〉에는 늘 길러내고도 또 키우시던 엄마 모습이, 〈우리 큰이모는〉에는 딸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세 가지 국을 끓여내던 엄마가, 〈우리 아빠는〉에는 목이 빠지도록 딸을 기다리던 엄마의 모습이, 〈할아버지 없더라도〉에는 남편이 남겨준 하얀 봉투를 대소사에 보내던 엄마의 마음이, 〈영원한 집〉에는 그런 남편과 함께 영원히 살 집(합장묘)을 마련해 두었던 엄마가, 〈1막 2장〉에는 이제는 ‘초록빛 심장’을 가진 나무가 된 엄마가, 〈구름 자리〉에는 천국에 자리를 맡아놓고 다시 딸을 기다리는 엄마의 모습과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나무가 찾아오고/난 나무에 닿았어.//
눈물을 길어 올려/새싹을 내걸었어.//
초록빛/심장이 생긴 거야./나무는 엄마야.
-〈1막 2장〉 부분
그런 엄마의 된장찌개를 이제는 먹을 수 없으니 아예 된장찌개를 끊어버린 이야기를 담은 〈끊기로 했다〉 등 동시조 속의 딸은 사실 숨은 화자이자 시인 자신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시인은 어릴 적 아련한 추억과 엄마 이야기를 할머니, 할아버지, 이모, 아빠 그리고 형의 이야기를 간결하고 쉬운 시어로 담아냈지만, 동시조에는 엄마와 엄마의 마음이 함께 담겨 있습니다.
그리운 그림으로 남은 엄마의 집
1부가 엄마가 존재하던 ‘시간’에 대한 그리움이라면 3부는 엄마가 머물렀던 ‘공간’에 대한 그리움입니다.
따끈히 달궈 놓고/깨우면 어떡해요.//
절절 끓는 아랫목을/어떻게 포기해요.
-〈밤새 식은 구들장을〉 부분
동시조 〈밤새 식은 구들장을〉과 〈갈떡하는 날〉에는 아침이 되어 딸을 깨워야 하지만 잠자리를 따뜻하게 해 주는 게 먼저였던 엄마의 부엌과 늦가을이면 늘 갈떡을 해서 자녀들을 위해 치성들이던 엄마의 장꽝이 그림처럼 따뜻한 공간 안에 펼쳐집니다.
흰쌀밥에/감자 미역국/무나물에/물 한 그릇//
멀리 간 딸/생일 아침/부뚜막에/놓아두지.//
두 손을/앞으로 모아/딸 위해/기도하지.
-〈부뚜막 생일 잔치〉 전문
가마솥처럼 뜨거운 눈물을 흘리던(〈가마솥〉), 딸 위해 기도하던(〈부뚜막 생일 잔치〉), 아궁이 재를 치고 다음 끼니를 준비하던(〈고물개〉), 고된 삶에 긴 한숨 몰아쉬던(〈부지깽이〉) 엄마의 부엌과, 아파도 동네 사람들 걱정이 먼저인(〈빨간 대문집 할머니는〉), 뜰의 명아주와도 친구가 되어주던(〈다리가 되어 주었다〉), 모내기 전날 밤 물댄 논의 찰랑거림에도 설레던(〈봄밤〉), 문 앞의 나무 조각에 마음을 걸어두고 자식을 기다리던(〈문패〉) 엄마는 동시조 〈고사리〉에서 할머니 생일에 옹기종기 모인 온 가족을 살뜰히 챙기는 모두의 ‘할머니’이기도 했습니다.
진짜로 슬플 때는/눈이 먼저 아프더라.//
아픈 눈에 고인 물이/눈물이 되는가 봐.//
눈속에 살던 마음이/강물처럼 흐르나 봐.
-〈눈에도 마음이 사는지〉 전문
〈눈에도 마음이 사는지〉 동시조에서 엄마의 부재에 눈에도 마음이 사는 것 같다는 딸은 엄마가 남기고 간 문패가 달린 빨간 대문 안의 장꽝과 부엌의 부뚜막, 가마솥, 부지깽이, 고물개 그리고 엄마의 유일한 친구였던 명아주 지팡이를 바라보며 강물 같은 눈물을 흘립니다.
1부와 3부에만 살아 계신 줄 알았던 그 할머니는 털우산 펼쳐 꽃가루를 지키는 호호백발 ‘할미꽃’으로도, 입하 무렵 피어나 꽃(쌀밥)으로 보릿고개를 넘는 ‘이팝꽃’으로도 여전히 단단하고도 든든한 꽃으로 피어 있습니다.
등 굽고/가시 돋은/호호백발/할머니는//
꽃가루가/비를 맞고/감기에/걸릴까봐//
펼쳐 든/털 우산으로/고개 숙여/지킵니다.
-〈할미꽃〉 전문
이 나무는/풍년 나무//저 나무는/흉년 나무//
온 가지에 흰쌀밥을/고봉으로 차려서//
새하얀/쌀밥 고개를/따뜻이 넘습니다.//
-〈이팝꽃 고개〉 전문
동화 같은 ‘처음’에 관한 이야기를 담은 동시조
《날씨는 그날그날 대지의 마음씨야》에는 ‘인절미’, ‘김 양식’, ‘삼성혈(〈구멍 산부인과〉)’과 같은 떡 이름과 김을 처음 양식한 것 등 ‘처음’에 관한 이야기가 신화처럼 담겨 있습니다.
쪄낸 찹쌀/떡메로 쳐/똑! 똑! 썰고/고물 묻혀//
피란 오신 임금님께/한 접시 올렸더니//
고것 참,/절미로구나!// 칭찬을 하셨지요.
-〈인절미로구나!〉 전문
여덟 자루 붓으로 그림 그리는 문어 선비를 상징적으로 담은 〈수묵화〉와 막대기 같던 나무에 처음 달린 사과를 따뜻한 마음으로 담은 〈익어가는 중입니다〉와 ‘보조 바퀴’를 떼는 첫날의 설렘과 아쉬움을 표현한 동시조 〈보조 바퀴 떼는 날〉 외에도 동화 같은 서사로 읽는 재미를 더하는 동시조들이 많습니다.
네 발 자전거를 / 아직도 타느냐고 //
볼 때마다 놀려대던 / 옆 반 / 재곤이 녀석//
오늘만 / 기다렸는데 / 이사 가고 / 이젠 없다.
-〈보조바퀴 떼는 날〉 전문
‘그날그날 마음먹은 대지의 마음씨’와 ‘계절의 표정부터 바람의 기분’까지 찬찬히 우리에게 들려주고 싶은 유이지 시인의 동시조를 감상해 보세요.
우리 가락 3장 6구, 45자에 이야기를 풀어내는 도토리숲 동시조 모음 시리즈
동시조(童時調)는 동시(童詩)와 마찬가지로 어린이가 직접 쓰거나 어른이 어린이의 정서를 담아낸 시(詩)입니다. 다른 점은 정형시의 운율인 3장 6구 45자의 형식에 맞춘다는 점입니다.
동시조는 아이들의 모습이나 생각, 정서를 우리 시조의 정형률에 맞춰 45자 안에 압축하여 함축적으로 내용을 전달하기에 정형시인 시조의 행간과 여백, 리듬과 운율, 상상력을 함께 느낄 수 있습니다.
도토리숲은 동시조 모음 시리즈를 보다 함축적으로 의미를 전달하고, 우리 시조의 멋을 느낄 수 있도록 중시조나 장시조가 아닌 단시조로만 지은 동시조를 모아서 펴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