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번의 선과 7번의 실연 끝에
생을 마치려던 루저 박칠규,
인류의 운명을 짊어지다!
《바티칸의 최종병기》는 기묘하게도 ‘예언의 연속성’과 ‘희극적 인간 군상’을 버무린 한 편의 대작이다. 이야기의 시작은 유럽의 한 시골에서, 80대 양치기 파벨이 반복해서 꾸는 예언적 악몽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는 낮고 소박한 마을의 신부에게 자신의 꿈을 고백하고, 그가 꾼 꿈이 현실로 이루어지는 것을 목도하면서 이야기는 본격적으로 움직인다. 그리고 이 파벨의 꿈은 한 왕국의 운명뿐 아니라, 먼 훗날 서울의 한강에서 뛰어내린 ‘박칠규’라는 서른아홉의 남자까지 이어지는 거대한 서사로 발전한다.
작품은 크게 두 가지 축으로 진행된다. 하나는 파벨과 마태오 신부, 그리고 바티칸으로까지 이어지는 ‘예언의 계보’다. 파벨이 꾸는 꿈은 신비롭고 섬뜩하면서도 놀랍게 현실화되고, 마태오 신부는 이를 성스럽게 기록하여 바티칸에 전달한다. 바티칸은 이 ‘예언서’를 은밀하게 봉인하고, 천 년 동안 극소수의 사제들이 관리하는 비밀 조직 〈파벨코란데오〉를 결성한다. 그들의 임무는 세상에 닥칠 위험을 대비하고, 필요하다면 인간의 의지를 동원해 예언의 결과를 바꾼다.
다른 한 축은 박칠규라는 남자의 이야기다. 그는 한국의 평범하고 외로운 직장인으로, 사랑에 실패하고 인생에 절망하여 한강에서 생을 마감하려고 한다. 그런데 눈을 떠 보니 그는 알 수 없는 이유로 살아 있었고, ‘신비한 사제단’에 의해 한 사람의 구원자로서 선택되었다는 통보를 받는다. 그 이유는 그의 왼쪽 종아리에 난 오래된 화상 자국이 ‘용’을 닮았고, 그것이 파벨의 예언서에 기록된 구원의 표식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세상을 구할 아들의 아버지’가 되어야 하는 운명에 놓인 것이다.
SF, 액션, 첩보 스릴러에
판타지, 로맨스 음모론까지,
장르적 재미가 버무려진
풍성한 재미!
이 소설은 여러 면에서 장르적 재미가 풍부하다. 우선, 신비와 종교적 상징, 그리고 예언이라는 엄숙한 소재를 택하면서도, 이를 통해 독자를 압박하지 않고 오히려 유머와 아이러니로 풀어낸다. 바티칸의 사제들이 박칠규의 종아리에 난 흉터를 확인하기 위해 그를 둘러싸고 관찰하는 장면은 장엄하기보다는 우스꽝스럽고 당혹스럽다. 사제들이 ‘아들을 낳기 위해 결혼하고 몸매를 가꾸라’며 커플매니저, 트레이너, 심리상담사까지 붙여주는 부분에서는, 신의 계시가 이렇게까지 번역되다니 싶은 황당함에 웃음이 터진다.
그러나 이 작품이 단순히 희극에 머물지 않는 이유는, 그 바탕에 깔린 주제가 여전히 묵직하기 때문이다. 운명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자신의 의지로 운명을 바꿀 수 있는가, 신의 뜻과 개인의 선택은 어떻게 갈등하고 공존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또한, 세상으로부터 버림받고 사랑받지 못했다고 느끼던 남자가 ‘누군가의 아버지’로서, ‘누군가의 희망’으로서 다시 살아가야 한다는 과제를 받는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존재의 의미와 책임에 대해 성찰하게 한다.
문장 자체도 무척 읽기 쉽고 리듬감이 있다. 유럽의 고전적 배경과 현대 서울의 원룸 사이를 자연스럽게 오가며, 비장함과 유머를 섞는 솜씨가 탁월합니다. 등장인물들도 개성적이다. 파벨의 고요한 신앙심, 마태오 신부의 경건한 동시에 인간적인 호기심, 그리고 박칠규의 엉뚱하면서도 연민을 자아내는 인물상은 독자를 끝까지 끌고 간다.
마지막으로 주목할 점은 제목인 ‘내 아들 구하기’의 다의성이다. 표면적으로는 세상을 구원할 ‘아들’을 낳기 위해 애쓰는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주인공 박칠규가 자신의 내면의 어린 자아, 상처받고 버려진 자기 자신을 구하는 여정이기도 하다. 누구나 마음속에 구원받기를 기다리는 ‘아들’을 품고 있다는 점에서, 이 이야기는 보편적이고도 깊이 있는 울림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