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호 의존과 관용, 협력으로 상생하는 개방적이고 역동적인 접경지대
유럽 문명의 토대가 된 로마 제국은 이민족들과 긴밀히 얽혀 있었다. 리메스(limes)라 불리는 방어 시설에서는 게르만족과의 교류가 이루어졌고, 국경은 문명과 야만의 경계가 아니라 통과 가능한 투과막으로 존재했다. 독일의 영웅인 아르미니우스는 그러한 사이 공간에 살았던, 그래서 라틴어와 게르만 언어를 자유롭게 구사했던 다중적 정체성을 지닌 인물이었다. 접경지대 역시 이처럼 다양한 문화와 정체성이 공존하는 다층적인 공간이다.
동유럽 일대를 넘나들던 다종족적 집단, 우크라이나의 정체성을 이룬 코자크인들은 폴란드와 러시아 변경에서 헤트만을 형성하고 드네프르강 너머에 있던 오지를 역동적 공간으로 만들었다. 발트해 연안 쾨니히스베르크 항구는 수많은 사람과 지식이 만나는 접경지대가 되었다. 자신이 태어난 쾨니히스베르크를 평생 떠나지 않았던 칸트도 다양한 인종과 부류의 사람을 만나며 ‘세계지(Weltkenntnis)’를 형성했다. 유럽 문화의 경계에 위치한 팔레르모와 아크레에서는 무슬림들이 유럽인과 공존했고, 시칠리아의 노르만 궁전에 초대되어 ‘궁정 사라센인들(palace Saracens)’로서 자리 잡았다.
영토의 덫에서 벗어나 초국가적·초영토적 기억 속으로
오늘날 유럽은 EU의 출범과 함께 초국경적 통합을 이루었다. 솅겐 조약에 따라 개방된 국경은 과거 이상으로 자유로운 이동과 교류를 보장한다. 그러나 정작 한반도를 포함한 비서구 사회는 서구 열강이 임시적이고 자의적으로 그은 분계선으로 인해 지금껏 아픔과 슬픔을 안고 산다.
식민주의 시대가 끝난 후에도 ‘제국주의가 만든 국경’이라는 유산은 여전히 청산되지 못했다. 세계 곳곳이 분쟁과 갈등으로 고통받는 가운데 초국가적인 감염병 코로나19가 국경을 넘나들었다. 자국만 고려한 정책은 더 큰 혼란을 유발하며 이웃 나라와 함께 대처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사실을 자연이 새삼 일깨운 것이다. 그 결과 군사적 요새나 정치적 장벽이 아닌 교량으로서 국경을 인식하는 경향도 다시 부상하고 있다. 이제 국경에 대한 초국가·초영토적인 기억 연구가 요구되는 시점이다.
저자는 제국주의가 강제적으로 구축한 ‘세계화의 폭력’이 국경 안에 존재한다고 말한다. 국경은 가변적인 사회적 산물이다. 그런 만큼 ‘고정적 선’이라는 1차원적 시각에서 벗어난 다의적이고 다중적인 국경경관(borderscape)이라는 개념이 필요하다. 이 책은 세계 곳곳에 있는 국경을 근원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며, 독자들을 경계에 관한 새로운 시각과 접경지대에 얽힌 흥미로운 뒷이야기로 인도해 줄 것이다.
책의 구성
『유럽의 국경사』는 총 5부 28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 장에서는 서유럽, 중부와 동부 유럽, 북유럽과 발트해, 지중해의 항구도시, 유럽이 만든 세계의 국경들을 중심으로 경계의 역사를 펼쳐나간다.
1부 ‘서유럽’에서는 로마 제국과 게르만족 사이의 토이토부르크 숲과 관련된 ‘얽힌 역사’를 시작으로 유럽의 심장이라 불리는 아헨과 유럽의 길목인 브뤼셀을 다룬다. 이어 권력의 틈바구니에서 실용적인 노선을 걷다 사라진 왕국 로타링기아, 알자스의 중심지 스트라스부르/스트라스부르크, 프랑스와 독일 양국의 민족주의 발상지인 라인강, 마지막으로 공유 국경으로 자리 잡은 콘스탄츠 호수를 조망한다.
2부 ‘중부와 동부 유럽’에서는 사회·정치적으로 구성되어 온 국경선에 주목한다. 분단된 독일의 국경위원회, 중심부와 주변부의 면모를 모두 지녔던 베를린, 영원한 변경으로 불리는 오스트리아에 이어 독일과 폴란드를 가로지르는 오드라-니사강, 이주민들이 세운 체코 주데텐란트의 국경 마을 브로우모프, 유럽의 검문소 헝가리, 영원한 국경이자 코자크인의 땅인 우크라이나를 다룬다.
3부 ‘북유럽과 발트해’에서는 발트해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다른 대양과 비교해 얼핏 ‘갇힌 바다’로 보일 수 있지만, 발트해는 수많은 땅과 민족을 아우른 ‘유럽의 어머니’ 같은 존재다. 3부에서는 초경계적 디아스포라인 발트해를 시작으로 칸트의 고향이자 이주의 도시, 칼리닌그라드를 들여다보고, 노브고로드에 얽힌 기억 전쟁을 다루며 공존의 도시가 된 에스토니아 탈린, 국경 투표가 이뤄졌던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을 조명한다.
4부 ‘지중해의 항구도시’에서는 망명객과 예술가, 커피의 항구도시인 트리에스테를 살펴본 후 기습 점령과 기억 전쟁에서 여전히 자유롭지 못한 리예카/피우메, 노르만족과 유대인, 무슬림이 공존했던 팔레르모, 십자군 왕국의 항구인 아크레를 소개한다. 지중해를 매개로 한 광범위한 조우 속에서, 이처럼 항구도시는 ‘사이 공간’으로 기능하며 나름의 질서와 교류 문화를 형성해 갔다.
5부 ‘유럽이 만든 세계의 국경들’에서는 제국주의 시대 유럽이 만든 세계의 국경선을 다룬다. 악순환에 빠진 아이티와 도미니카의 갈등, 그레이트 게임의 희생양으로 그어진 아프가니스탄 듀랜드 라인, 인도와 파키스탄을 나눈 래드클리프 국경선에 이어 중동의 화약고가 된 사이크스-피코 경계선, 마지막으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국경사를 탐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