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교양 전문 PD가 다큐멘터리 기법으로 쓴 책
역사는 사건과 인물을 만들고, 사건과 인물은 역사를 쌓아간다. 그 속에는 치열한 시대정신과 삶의 철학이 있다. 조선의 500년도 이와 다르지 않다.
『왕PD의 토크멘터리 조선왕조실록』은 조선왕조실록의 콘텐츠를 다큐멘터리 기법으로 맛깔나게 소개한다. 역사적 지식과 안목을 키워줄 뿐 아니라 우리가 무심코 넘긴 사건과 인물을 포착해 역사 읽기의 재미에 빠지게 한다. 30여 년 차 다큐멘터리 전문 PD였던 저자 왕현철은 KBS를 퇴직한 후 9년째 조선왕조실록을 완독하며 책을 펴내고 있다. 이 과정에서 새롭게 알게 된 역사적 사실이 많았고, TV 드라마 등에서 잘못 알려진 내용도 발견했다. 무엇보다 조선의 왕과 수많은 신하들과 시공간을 초월한 대화를 나누며 희열을 느꼈고, 역사의 진실을 찾아가는 것이 즐거웠다. 독자들도 이 책을 통해 마치 TV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한 재미를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인조, 나라를 잘못 운영한 반면교사
“반정은 경들 덕이다. 금수의 땅이 다시 사람의 세상이 되었다.” 인조는 반정 성공을 신하들의 공으로 돌렸다. 그런데 그 과정과 마무리까지 그대로 이어갈 수 있었을까?
반정으로 정권을 잡은 인조는 광해군의 흔적을 철저히 지웠다. 인조가 명나라와 청나라의 세력 판도를 정확하게 읽지 못하고, 광해군의 중립 외교를 폐기한 것은 오판이었다. 인조는 그 대가를 혹독하게 치렀다. 정묘호란(1627년)과 병자호란(1636년)으로 국토는 유린당했고 군사와 백성은 죽거나 끌려갔다.
〈광해군에게 당한 3번의 억울한 가족사〉, 〈돈 애비야, 돈 애비야!〉, 〈화기도감 폐지가 아쉬운 이유〉, 〈첫 시련, 이괄의 난〉,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소현세자 독살설〉 등…. 26년 2개월여 어좌에 있었지만 임금으로서 실적이 거의 없었고, 아버지로서도 할아버지로서도 비정했던 인조를 되돌아본다.
효종, 북벌 의지에 불타다
효종은 청나라에서 8년간 인질로 있었다. 그 인질 생활 동안 청나라의 산천을 자연스럽게 익힐 수 있었고 군사훈련도 눈여겨보았다. 후에 세자에 오르자 술을 끊었고, 북벌을 본격적으로 결심한 후에는 부부관계도 끊었다. 10년 동안 10만 명의 군사를 양성해서 북벌을 하기 위해서였다.
〈즉위 초기, 훈구파를 내치다〉, 〈외교적 위기를 지혜롭게 해결하다〉, 〈북벌을 소리 소문 없이 준비하다〉, 〈송시열과의 독대〉 등 효종의 북벌 계획과 그 후를 자세히 들여다본다.
현종, 붕당은 용납하지 않은 병약한 임금
현종은 세자 시절 부왕과 송시열의 비밀편지 전달자였다. 부왕의 북벌의지를 잘 알았고, 즉위 초기에는 누구 못지않게 군사훈련에 열심이었다. 그러나 현종 역시 건강이 문제였다. 젊은 나이였음에도 병약해서 점차 건강이 악화되며 북벌 의지를 접게 되었다.
현종은 19세에 즉위해서 15년 3개월, 비교적 긴 기간 재위했다. 그러나 이 시기는 예송 논쟁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예송 논쟁은 상복을 입는 기간이 3년인지, 1년인지, 9개월인지를 논하는 것이다. 현대의 기준으로는 별 의미가 없는 논쟁이지만, 성리학 세계관이 지배하던 당시는 자신의 학문과 인생철학을 담고, 서인과 남인, 그리고 임금까지 개입하여 치열하게 다투었다. 상복 입는 기간을 둘러싼 논쟁의 이면도 상세하게 다룬다.
숙종, 정치를 장악한 연출자
숙종은 세 번의 환국을 통해 붕당정치 속에서도 왕권을 강화한 정치 고수였다. 즉위 후 불과 15세의 나이로 거두였던 송시열을 내치기도 했다. 숙종은 45년 10개월 재위한 만큼 기록도 풍부하다. 세 번의 환국정치, 인현왕후와 장희빈의 맞대결은 영화나 TV 드라마의 단골 소재였다. 『숙종실록』을 자세하게 들여다보아 TV에서 잘못 다룬 역사적 진실을 바로잡고자 했고, 그 의미를 다시 새겨보고자 했다. 또한 우리 국토를 지켜낸 안용복, 애매하게 세워진 백두산정계비, 남구만의 「성경도」를 통해서 영토의 중요성을 부각했고, 역사 바로 세우기를 하고자 한 사육신과 단종의 복위 과정도 자세하게 그 의미를 짚었다.
경종, 속내를 알 수 없었던 임금
경종은 장희빈의 아들로서 조선의 최장 기간, 즉 30년 동안 세자로 있었다. 세자로서 오랫동안 공을 들여서 키웠으나 재위 기간이 4년 2개월로 짧고 뚜렷한 업적도 없다. 너무 이른 2세에 세자가 되어 궁중에서 홀로 자랐다. 신하들 간의 참극과 어머니 장희빈의 비극을 목격했다. 경종은 신하들을 만나려고 하지 않았다. 설령 만나더라도 좀처럼 긴 말을 하지 않았다. 신하들은 임금의 속내 파악이 어려웠고, 토론문화가 실종되어 비극의 도화선이 되었다.
17세기 조선을 자세히 돌아봐야 하는 이유
17세기, 조선은 임진왜란 이후 50년이 안 되어 또다시 병자호란으로 국토가 유린당했다. 임금은 치욕을 당했고, 백성은 피란에 몰리고 생명을 내놓아야만 했다.
17세기 동아시아는 명나라가 망하고 청이 들어섰다. 조선은 명과 청의 교체라는 격변기에 국제정세를 제대로 읽지 못하고, 내부의 권력 다툼으로 민생도 세밀하게 살피지 못했다. 백성은 더욱 곤궁한 삶을 사는 악순환이 되었다.
역사를 교훈 삼지 않으면, 늘 그렇듯이 그 대가는 참혹했다. 오늘날 우리가 17세기를 자세히 살펴보고, 그 교훈을 되새겨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