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학생으로 겪은 해방과 전쟁
평안남도 용강에서 맞은 해방의 기억과 월남하여 정착한 서울에서 겪은 좌우 대립의 풍경, 남산과학관에서 본 채플린 영화에 관한 이야기를 담았다. 또한 한국전쟁이 터지자 부산으로 피란하여 미군부대 노무자로 종군하며 평양의 김일성 관저까지 들어갔던 이야기, 1.4후퇴 이후 부산의 국제시장에서 만화책 대여점을 열었던 기억, 피란지 부산의 피란학교 등 한국전쟁의 생생한 기억을 보여준다.
- 1950년대 영화잡지와 영화기자
전쟁이 끝나고 서울에는 영화붐이 인다. 때마침 영화잡지들도 하나씩 그 모습을 드러냈다. 1950-60년대 영화잡지를 대표하는 《영화세계》의 인턴기자로 입사한 노만은 이후 여러 영화잡지에서 편집장과 편집주간을 맡아 일했다. 이 책에는 처음으로 월급을 받았던 양조회사가 주인이던 《스크린》에 관한 이야기를 비롯해 그가 겪었던 영화잡지계의 열악한 상황과 취재 비화, 영화잡지계의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를 수록했다.
- 영화교육의 현장에서
1950-60년대 영화교육 기관으로 4년제로 한양대, 중앙대학교와 2년제 서라벌예술대학, 그외 영화배우전문학교가 있었다. 그는 1961년 한양대학교를 시작으로 1971년까지 강단에 섰다. 제대로 된 영화 교재가 부재하던 시절 그가 쓴 한국영화사는 영화학도들의 필독서였다. 5.16 군사 쿠데타 이후 정부의 대학 일부 학과 폐지 조처로 영화학과가 폐지 대상이 되자 그가 직접 관계 당국을 대상으로 진정서를 작성한 이야기는 초기 영화학과 관련 비화이다.
- 최초의 한국영화사를 쓰다
1959년 대학 졸업 논문 “씨나리오문학론”의 집필을 계기로 한국영화를 둘러싼 여러 질문들에 대해 탐구했다. 노만은 한국적인 것은 무엇인가?, 한국영화의 역사적 흐름과 정체성은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영화 유입부터 해방에 이르는 시기를 다룬 한국영화사를 집필했다. 이 책은 이후 이영일, 김종원, 이효인 등 영화사가들이 쓴 한국영화에 대해 쓴 저작의 모범이 되었다.
- 사라진 영화, 만추의 해방은?
이만희의 대표작이자 한국영화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는 〈만추〉의 마지막이 노만에 의해 확인되었다. 그는 칠성영화사를 세운 후 외화수입쿼터를 위해 〈만추〉의 일부 장면을 재촬영하여 미국으로 수출했다. 그렇게 수출된 〈만추〉는 미국 현지로 보내진 후 일부 극장에서 상영된 이후 행방이 확인되지 않는다. 〈만추〉의 필름은 미국 어디엔가 보관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그 외에 태국으로 이주한 이경손 감독이 보낸 엽서, 친구처럼 대해 주었던 전창근 감독, 청년 시절의 유현목 감독 등 그와 교분을 쌓았던 영화인들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와 1950년대의 영화계 풍경을 노만의 눈을 통해 다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