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의 반도체’에서 ‘바다의 우유’까지
김은 조선시대에 토산품이자 무역품이었다. 그만큼 미역과 함께 중요한 재원(財源)이었다. 최근에는 김 수출시장이 동남아시아와 미국에서 유럽, 아프리카, 중동 지역까지 확대되었다. 또한 중국과 일본과 동남아시아를 중심으로 한 여행객들 사이에 여행 상품으로 김이 인기이고, 중국과 러시아와 미국까지 마른김과 조미김이 수출된다. 2024년 기준으로, 전남이 40만 8,000톤(전체 김 생산량의 80퍼센트)을, 충남이 2만 8,000톤을 차지했다. 김 가공공장이 가장 많은 곳은 충남 지역이다. 전국 약 700개소 중에서 충남이 360개소로 51퍼센트를 점한다. 2023년 우리나라의 김 수출액은 1조 원을 돌파했다. 그래서 김을 ‘바다의 반도체’ 혹은 ‘검은 반도체’라고 불린다. 최고 한류식품이라는 칭호가 붙은 이유다.
조선시대에 바다에서 나는 것 중에서 미역이 재산 가치가 높아 미역바위의 크기에 따라 논과 밭처럼 세금을 부과했다. 힘이 있는 권문세도가들은 미역바위를 차지하고 어민들에게서 소작료를 받기도 했다. 오늘날에도 미역밭은 섬사람들에게 논밭처럼 소중하다. 미역밭을 마을에서 공동으로 관리해 기성회비나 전기요금 등 마을 공공기금을 마련하기도 하고, 뭍으로 유학을 보낸 아이 학비도 미역을 담보로 돈을 빌렸다. 그리고 전국을 누비면서 단골집에 미역을 팔아 쌀과 소금을 샀다. 미역은 섬사람들에게 화폐였다.
제주 해녀들이 물질하는 곳을 ‘바당’이라고 한다. 이곳에서 5~6월에 우뭇가사리를 채취한다. 우뭇가사리는 자홍색이나 검붉은색을 띠며 해녀 얼굴빛과 닮았다. 해녀는 바다에서 생활하는 시간이 많았으니 닮는 것이 당연하다. 우뭇가사리 철이 오기 전에도 바람과 파도가 지나고 나면 우뭇가사리를 비롯해 미역, 톳 등이 바닷가로 밀려온다. 이때 해녀들은 물론이고 제주 삼촌들은 바닷가로 나와서 우뭇가사리를 줍는다. 육지에서 짓는 쌀농사만큼이나 우뭇가사리가 값어치가 있기 때문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굴만큼 오래된 바다 음식이 있을까? 굴에는 단백질, 칼슘, 철분 등 여러 영양소가 풍부하기 때문에 ‘바다의 우유’라고 불린다. 『고려도경』에 굴은 서민들이 즐겨 먹는 수산물이라고 소개되었다. 조선의 문인인 허균은 “동해안에서 나는 굴은 크고 좋은데, 맛은 서해안에서 나는 것보다 못하다”고 했다. 예부터 알려진 굴 산지는 낙동강 하구ㆍ광양만ㆍ해창만ㆍ영산강 하구 등이다. 서해안이나 남해안에서는 기둥을 세우고 빨랫줄처럼 줄을 걸어 그곳에 가리비나 조개껍데기에 포자가 붙은 줄을 걸어 양식하는 굴 양식이 성행했다. 특히 통영을 중심으로 거제와 고성 등이 굴 양식 주산지로 전체 굴 생산량의 85퍼센트가 넘는다.
제주 해녀가 사는 법
소라는 제주의 해녀들에게 생계수단이며, 여행객들이 즐겨 찾는 먹거리다. 소라는 뭍에서 ‘뿔소라’, 제주에서 ‘구젱기’라고 부른다. 제주가 아니더라도 부산 영도, 거제나 통영, 여수 거문도, 완도 청산도 등에서 소라를 맛볼 수 있다. 제주 해녀들의 물질은 ‘칠성판을 지고 나가는 일’이라고 할 만큼 고되고 위험한 일이다. 소라는 어느 지역이건 대부분 해녀들이 물질을 해서 건져 올린다. 옛날에는 제주 살림을 책임졌던 것이 돌미역과 우뭇가사리였다. 하지만 부드러운 미역이 양식되면서 거친 돌미역은 밥상에서 멀어졌다. 그런데 제주 사람들만 즐겨 먹던 소라가 육지 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지금은 해녀들을 먹여 살리고 해안마을 어장에서 제 몫을 하는 것이 소라다. 소라는 긴 뿔을 바위 틈에 내리고 거친 파도를 이겨내며 제주 바다를 지킨다. 제주를 지키는 해녀를 꼭 닮았다.
톳은 제주의 대표 보양식품 중 하나다. 제주는 예부터 땅이 척박해 농사일은 고되고 수확량은 많지 않았다. 뭍과 달리 칼슘과 단백질 공급원도 적었다. 제주 우엉팟에 채소가 있다면 바당에는 톳과 미역이 있다는 말처럼, 톳은 제주 사람들의 영양을 보충해주는 귀한 음식이었다. 모자반은 제주의 대표 전통 음식이자 행사 음식 중 하나인 몸국의 주재료다. 제주에서는 큰일을 치를 때 모자반이 듬뿍 들어간 몸국을 올려야 했다. 보통 잔치나 제사에 그 지역에서 즐겨 먹는 음식을 내놓거나 제물로 올린다. 제주에서는 몸국이 그렇다. 몸국은 제주 공동체의 생활양식이자 깨끗한 제주 바다의 지표다. 국제슬로푸드협회는 ‘제주 몸국’을 ‘맛의 방주’에 등재했다.
감태는 바위에 뿌리를 내리고 바닷속에 숲을 만들어 어류 등 해양생물의 서식지를 제공하는 갈조류 해조다. 제주와 울릉도 바다에서 서식한다. 제주 사람들은 감태를 뜯거나 바닷가로 밀려온 것을 모아 땔감이나 거름으로 사용했다. 제주의 돌미역을 채취하는 해녀 어업은 유네스코 무형유산과 국가중요어업유산 등 국내외에서 인정하는 어업 유산이다. 조선 중기의 학자인 이건이 제주도 유배 생활을 시작한 1628년부터 1635년 울진으로 이배되기 전까지 17세기 제주의 풍토와 상황을 기록한 『제주풍토기』에는 해녀를 “바다에 들어가 미역을 채취하는 여자”라고 소개되어 있다.
어촌의 살림살이를 책임지다
매생이 농사에서 가장 힘든 것은 채취다. 작은 채취선 좌현이나 우현에 엎드려 가슴을 붙이고 매생이 발을 들어올려 채취해야 한다. 이렇게 겨울철이 지나면 가슴에 멍이 든다. 포자가 잘 붙기를 기다리며 속으로는 애간장이 녹고, 겉으로는 가슴에 멍이 들어야 매생이가 밥상에 올라온다. 한편 매생이는 직접 손으로 뜯기도 하는데, 이를 ‘매생이를 맨다’고 한다. 가리맛조개는 어떤가? 가리맛조개 1킬로그램은 큰 것이 약 60개에 이른다. 100킬로그램이면 6,000번, 50킬로그램이면 3,000번을 갯벌에 손과 팔을 넣어야 한다. 실패한 것까지 하면 1만 번에 이를 수도 있다. 그리고 가리맛조개가 담긴 자루를 뻘배에 가득 싣고 나오면 입에서 단내가 날 정도로 기력이 쇠진해진다. 한마디로 가리맛조개를 뽑는 일은 극한직업이다.
고둥을 밥상에 올리는 일은 시간과 노력에 비해 얻는 것이 적고 번거로운 일이지만 마다할 수 없는 섬살이다. 지금도 먼바다 섬에는 여전히 고둥무침이 밥상을 지킨다. 아마 갯바위에서 고둥이 멸종되지 않는 한, 그 섬이 무인도가 되지 않는 한 지속될 것이다. 어민들에게는 자신들의 반찬거리이기도 했지만, 그 맛을 아는 자식들이 찾아 번거로움을 사서 하는 것이다. 저 많은 고둥을 줍느라 어민들은 얼마나 허리가 아팠을까?
생일도 용출리 해변과 금곡리 다랭이논에 새벽부터 불빛이 분주하다. 낮에 채취한 다시마를 건조하기 위해서다. 아침까지 건조장에 다시마를 너는 것을 마쳐야 한다. 오후 3시가 되면 건조된 다시마를 걷는다. 이곳 섬 주민들의 일상이다. 5~6월이면 다시마 건조 때문에 생일도와 평일도 바닷가는 검은 색칠을 한 것처럼 보인다. 다시마 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누울 자리는 없어도, 다시마 널 자리는 마련한다’고 했다. 다시마를 채취할지 말지도 날씨에 따라 결정한다. 다시마는 바다가 키우고 하늘이 가격을 결정한다.
충남 태안군 개미목마을에는 좋은 굴밭이 있었다. 겨울철이면 마을 어귀 양지바른 곳에 굴막을 짓고 굴을 가져와 까서 팔았다. 서해안고속도로가 생긴 후 수도권 사람이 많이 찾아와 굴을 사갔다. 그곳에는 시어머니, 며느리, 손자며느리의 ‘삼대 조새’가 있다. 시어머니 조새는 닳고 닳아서 윤이 나고 손가락 모양으로 파였다. 손자며느리 조새는 전혀 닳지도 않았는데 반질반질하다. 시어머니가 늘 곁에 두고 굴 까는 법을 알려주었으리라. 2007년 겨울 서해안 기름 유출 사고로 그 굴밭은 큰 피해를 입고 사라졌다.
다양한 생명의 공동체, 갯벌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조개를 꼽으라면 단연 바지락이다. 인천의 장봉도에서 부산의 가덕도까지 바지락을 만날 수 있었다. 모래 갯벌을 제외하고 어느 갯벌에서나 붙임성 좋게 잘 자라는 탓에 일찍부터 양식 품목으로 사랑을 받았다. 바지락은 번식이 쉽고, 성장이 빠르다. 어릴 때를 제외하면 대부분 한곳에 머물며 자라기 때문에 양식하기 좋은 수산물이다. 어민들에게는 소득을, 갯벌 체험객들에게는 즐거움을 주는 조개였다. 그러나 겨울 가뭄이 심하면 봄 바지락 농사는 기대하기 어렵다. 비가 오지 않고 가물면 바지락도 흉년이 든다. 섬을 개간하거나 파헤쳐 흙이 바다로 유입되어도 바지락 농사를 망치기 일쑤다.
김제시 진봉면 민가섬은 동진강과 만경강이 합해지는 곳으로 영양분이 풍부해 백합과 동죽 등 조개가 많았던 곳이다. 그런데 새만금방조제가 완공된 후 가장 먼저 육상화가 진행되었다. 새만금방조제로 물길이 막히자 조개의 천국은 무너졌다. 1960년대와 1970년대 초반 우리나라 최대의 패류 산지는 인천 송도 갯벌이었다. 백합과 함께 다량의 자연산 동죽이 서식해 5,000여 어민들이 생계를 유지했던 곳이다. ‘조개골’이라 불리는 마을이 있을 정도였지만, 세월이 흘러 남동산업단지와 송도국제도시는 이곳을 조개무덤으로 만들었다. 수천 년 밀물과 썰물이 만든 갯벌이 일순간에 무너졌다. 예전처럼 오순도순 백합을 잡으며 정을 나누던 마을공동체도 무너졌다.
서해 갯벌에서 흔하게 볼 수 있었던 칠게가 사라지면 반찬거리가 없어지는 것은 물론 낙지뿐만 아니라 도요새 등 물새들의 먹잇감이 사라져 생태계에 변화를 준다. 하지만 이것보다 더 심각한 것은 갯벌이다. 갯벌도 매일 숨을 쉬어야 한다. 그래야 건강한 갯벌을 유지하고 많은 갯벌 생물에게 좋은 서식지를 제공할 수 있다. 칠게들이 갯벌에 수많은 크고 작은 구멍을 만들면 바닷물이 갯벌 깊은 곳까지 산소와 다양한 영양분을 공급해준다.
갯벌은 수백 년 동안 인간과 끊임없이 교감하며 관계를 맺어온 ‘문화’다. 갯벌의 가치를 경제적 가치로 환원할 수 없는 것도 이 때문이다. 우리는 갯벌에 기대어 살며 풍어제, 갯제, 씻김굿, 어업요 등 춤과 노래와 마을 의례 등 다양한 문화를 만들어냈다. 이러한 자원들은 최근에 갯벌 축제와 생태관광의 자원으로 활용된다. 오랫동안 다양한 생명이 갯벌에 의존해 살아왔다.
2021년에 서천 갯벌, 고창 갯벌, 신안 갯벌, 보성ㆍ순천 갯벌 등 ‘한국의 갯벌(Korean Tidal Flat)’이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에 등재되었는데, 지금 시급한 일 중에 하나가 갯벌에 서식하는 생물종을 조사하고 어획량을 모니터링하는 것이다. 해안 매립과 간척 사업으로 갯벌 생물들의 어획량이 급격히 줄어들었다. 여기에 지구온난화와 수온 변화도 큰 영향을 미쳤다. 양식기술이 발달하고 양식어업이 거대해지면서 갯밭의 가치와 중요성이 약화되고 있다. 어촌이나 어촌 공동체도 약화되고 있다. 생물 다양성은 말할 것도 없고 어촌의 정체성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갯밭이 살아 있어야 한다.
※ 이 도서는 2025 경기도 우수출판물 제작지원 사업 선정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