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성 애인과 막 헤어진 페미니스트 활동가가 홧김에 진보 정당의 대선 캠프에 들어가 새로운 일상을 꾸리며 써 내려간 ‘페미니스트 난중일기’.-장혜영(전 국회의원)
말할 자리가 없으면 스스로 무대를 만들고 동료를 모아 방파제를 짓는 레즈비언 페미니스트 심미섭은 이제 책을 통해 자신이 짓고 만들어 낸 세계로 초대한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데 해도 될까 망설인 적이 있는 사람에게 특히 권하고 싶은 책이다.-권김현영(여성학자)
“그 시공간에서 내가 겪은 모든 일을 내 언어로 씀으로써 복수하겠다.”
지긋지긋할 정도로 서로 돌보고 들볶고 되갚고 연대하는
여자와 여자와 여자들의 복수혈전
광장에서는 노동권을 외치면서도 정작 진보 정당의 노동 환경은 열악하기만 하다. 퇴근 후 업무 지시는 일상이며 ‘동일임금 동일노동’의 원칙을 지키기란 요원한 듯만 하다. 세상을 평등하게 만들자는 진보 정당의 구호와 그 안에서의 실제 경험 사이에는 얼마만큼의 틈이 있을까? 끝없이 마주치는 부조리 속에서 저자가 택한 투쟁 방식은 겪은 모든 일을 처절하리만치 솔직하게 씀으로써 ‘복수’하기다.
저자의 복수는 열악한 노동 환경만을 향하지 않는다. 사랑했지만 일시에 나를 버린 전 여자친구에게, 나를 키워 줬지만 나에게 냉담했던 엄마에게, 나를 대변해 줘 고맙지만 일순간 잠적한 대선 후보 S에게 복수의 연필심을 겨눈다. 지겹다 싶을 만큼 서로를 돌보고, 서로에게 진 빚을 되갚고, 서로를 실망시키고, 서로에게 연대하는 여자와 여자와 여자들 이야기가 제20대 대선 정국과 맞물린다. 여성가족부 폐지를 공약으로 내건 보수 정당, 차별금지법 제정을 회피하는 유력 대선 후보, 젊은 남성의 표심 잡기에만 급급한 정치인들…… 이 틈에서 심미섭은 레즈비언 페미니스트로서의 자신의 일상이 당연하다는 듯, 뻔뻔하게 드러낸다.
‘자연스러운 만남 추구’가 어렵기에 데이팅 앱을 통해 사람을 만나고, 그 어떤 관계보다 평등하지만 복잡한 욕망과 감정이 오가는 레즈비언 섹스에 대해 토로하며, 페미니스트 활동가로서 ‘동의’에 대해 고민할 수밖에 없는 속내를 털어놓는다. 대선 캠프 안에서의 대문자 정치와 대조되는 이 이야기들은, 친밀성이라는 사적인 영역을 정치로 확장하기에 이른다. 약자성에 천착해 스스로를 타자화하기를 거부하는, “적나라할 만큼 솔직하고 처절할 만큼 분투하는 이런 레즈비언 이야기”(임솔아)는 그 자체로 차별과 혐오에 정면으로 돌파하는 용감한 전략이 된다.
엄마 대신 여자친구 대신 여성 정치인 대신……
나를 키운 엄마, 내가 키운 엄마‘들’로부터 독립하기 위한 117일
단, 아무리 슬퍼도 ‘눈물은 한 방울씩만’ 흘리면서
‘복수하기’와 ‘은혜 갚기’란 내가 받은 것을 상대에게 되돌려준다는 측면에서 동전의 양면 같은 것은 아닐까? 저자가 진보 정당의 대선 캠프에서 일하기로 결심한 여러 이유 중 하나는 대선 후보 S다. 제19대 대선 토론회에서 동성애에 반대한다는 후보를 향해 S가 “동성애는 찬반의 문제가 아니다.”라며 반박해 준 덕이다. ‘1분 찬스’를 써 성소수자를 대변한 정치인 S에게 빚을 졌다고 느낀 저자는 자신이 진 ‘빚’을 갚기 위해 S를 대통령으로 만들고자 일한다.
전 여자친구와 엄마에게도 마찬가지다. 전 여자친구와 결별하고 대선 캠프에서 일한 117일은 나를 사랑으로 돌봐 준 전 여자친구, 나를 대변해 주는 여성 정치인, 그리고 내게 언어와 문화 자본을 물려준 엄마까지…… 즉 나를 엄마처럼 키워 주는 동시에 내가 엄마처럼 의지할 수밖에 없던, 동시에 나를 끊임없이 실망시키는 이들에게 ‘빚’을 갚고 진정으로 독립하는 과정과 다름없다.
어떤 고통이든 거리를 두고 바라보며 블랙 코미디라는 장르로 희극화하며 스스로를 지켜 온 저자는 이 과정을 고난의 서사가 아닌 특유의 날카로운 유머로 풀어낸다. 아무리 슬프고 외롭고 화가 나도 ‘눈물은 오로지 한 방울씩만’ 흘릴 수 있기에 더욱 신랄하면서도 진실한 복수극이 된다.
“애초에 한 사람이 다른 이들을 대표할 수 있는가?”
페미니즘과 정치, 권력과 글쓰기에 관한 가장 사적인 탐구
“하지만 여기는 정당이니까, 내 관점과 의견을 넣어 쓴 글이 ‘대표자’의 이름으로 나가는 건 당연한 이치인가?”(95쪽) 선거 캠프에서 공보국장이자 대변인으로 일하며 저자는 자신이 쓴 글이 위원장 개인의 이름으로 발표되는 데에 의문을 품는다. 활동가로 일하던 시절 자신이 쓴 글이 ‘우리’ 단체의 이름으로 발표된 것과 달리 ‘대표자’ 한 사람의 생각과 주장인 것마냥 언어가 사유화되는 데에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이와 같은 문제의식은 페미니스트 활동가로서의 경험과 편집자였던 엄마에 관한 유년기의 기억으로 뻗어 나간다. 분명 수개월간 책상 앞에 앉아 매일 글을 다듬고 노동했지만 책장에 가득하게 꽂힌 책에는 남성 작가의 이름만 남아 있던, “책장 어디에도 엄마의 이름은 없었”던(11쪽) 기억으로 말이다.
이처럼 『사랑 대신 투쟁 대신 복수 대신』은 개인적이고 내밀한 경험을 이야기함으로써 권력과 페미니즘, 기록와 계보에 관해 진보 정치와 사회 운동 안에서 마주한 ‘여성’ 인물들을 통해 새롭게 써 나간다. 여성은 배제되어 온 남성 중심의 ‘이름 남기기’ 문화, 사회 운동 안에서 페미니즘의 위치, 여성 운동의 계보를 잇고 기록한다는 의미, 대표자를 중심으로 조직화된 권력 구조 등에 대해 구체적이고 생생한 경험을 통해 질문한다. ‘개인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 사이를 자유롭게 오가며 사랑과 연대의 진정한 의미를 곱씹게 만드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