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 왕건은 어떻게 왕위에 올라 삼한을 일통할 수 있었을까?
그가 운영한 고려는 어떤 왕조였을까?
그는 어떠한 천하를 세우려 했고 어떤 족적을 남겼을까?
고려는 우리 역사에서 어떠한 위치를 차지할까?
다채로운 시각으로 진입하는 새로운 고려 왕조사!
34명 고려 제왕의 치적과 5백 년 왕조의 흥망을 읽는다
『새 고려 왕조사: 제왕의 나라 고려 역사 읽기』는 고려를 ‘제왕의 나라’로 조망하는 본격 왕조사이다. 삼한 일통의 위대한 왕 즉 신성 대왕이 통치한 나라, 제불신기의 가호를 받는 신성 군주가 다스린 왕조, 천명을 받은 성인 군주가 아우른 국가, 동국과 해동천하를 구축하고 태평의 시대를 연 나라, 때로는 황제로 호칭되면서도 국왕 책봉을 받은 국가 등의 다채로운 시각을 ‘제왕의 나라’로 함축하였다.
이 책은 고려 왕조에 대한 다양한 물음에서 출발한다. 태조 왕건은 어떻게 후삼국의 전란을 수습하고 삼한을 일통할 수 있었는가? 고려는 과연 어떤 나라였을까? 고려의 제왕들은 누구였고 무엇을 이루었으며 어떻게 무너졌는가? 저자 한정수 교수는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918년 태조 왕건의 즉위에서 시작해 1392년 공양왕의 폐위와 조선 개국에 이르기까지 34명 고려 제왕의 475년에 걸친 흥망성쇠를 깊이 있게 서술하였다.
역사의 기록, 그 행간에서 되살아나는
고려 왕조의 생생한 얼굴
918년 시작된 고려는 1392년 이성계의 즉위와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이어 1394년에 일어난 공양왕과 왕씨 일족 제거는 어떠한 명분을 갖다 붙이더라도 역사의 비극이었다. 475년 이어진 용손 혈통을 다시 부흥시키려 한다는 의혹을 빌미로 발본색원 차원의 조치가 이루어진 것이다. 후일 조선 왕조는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를 편찬해 고려의 역사를 정리하고 조선 건국의 명분을 정당화하였다. 이러한 조선판 고려 역사 세우기로 인해 고려의 역사는 조선의 관점에서 각색되었고, 그로 인해 고려사에는 왜곡과 단절이 남았다.
그럼에도 정사, 문집, 금석문, 각종 문서, 불경 등에 고려의 역사 유산은 고스란히 남아 있다. 또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의 행간에도 보인다. 이를 통해 신성한 용손 혈통의식에 따른 왕위계승, 제불신기의 가호와 그에 대한 보은, 사회통합을 위한 팔관회 개최와 보살계 수계, 장경도량 등 호국 불교 도량 설행, 유불도 문명의식과 선랑 등에 기초한 해동천하 건설, 고려 왕조의 자주성 유지를 위한 외교적 노력, 왕조 중흥을 위한 다양한 개혁 정책의 추진 등 고려의 복합적이고 역동적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왕조의 흥망과 문명의 깊이를 다시 사유하게 할
새로운 고려 왕조사
이 책은 각 군주의 즉위 과정과 왕실 구성 및 공신, 정치와 업적, 죽음과 시대 과제라는 틀로 고려 왕조사를 재구성하였다. 제1장 천수(天授) 혁명 왕건과 고려, 제2장 5백 년 왕조의 토대 만들기(혜종~목종), 제3장 위기 극복과 해동천하(현종~숙종), 제4장 12세기 대전환 속 고려의 선택(예종~인종), 제5장 제왕과 무신정권(의종~원종), 제6장 고려와 원 그리고 부마고려국왕(충렬왕~충정왕), 제7장 왕조의 가을과 역성혁명(공민왕~공양왕)으로 나눠 고려 건국부터 왕조 멸망과 조선에서의 고려 역사 세우기에 이르기까지를 정리했다. 책의 말미에는 고려 제왕 일람표와 고려 제왕 세계도를 부록으로 실어 고려사 전체의 흐름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게 하였다.
고려는 천명과 제불, 천지산천의 신기, 풍수지리와 도참 등에 가탁하여 왕실 신성화와 왕업의 중흥 및 연장을 도모했다. 수많은 사찰을 세우고 제불 도량을 열었으며, 천지산천의 신기에 대한 제사를 지내고 천명에 의지하는 덕치, 풍수에 의한 정도 및 천도론 등을 추구했다. 왕실은 용손 혈통의 황가로 신성화했으며 팔관회를 열어 왕실이 천령과 제불신기의 가호를 받고 있음을 대내외적으로 천명했다. 그러면서도 유교 정치를 끊임없이 추구했다. 신성한 성인 군주인 제왕이 다스리는 나라라는 인식은 이를 토대로 점차 강화되었다. 그 결과 고려는 문종 대에 고려 중심의 해동천하 인식과 문명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이후 고려는 쇠퇴했다. 그렇지만 삼한 일통과 해동천하 등은 고려를 상징하는 문명 및 자존의식의 토대로 작용했다. 그렇기에 고려 왕조는 무신정변, 여몽 전쟁, 원 간섭기 부마제후국 단계를 거치면서도 왕조를 유지할 수 있었다. 반면 선왕 정치 모델로의 지나친 개혁과 회귀 시도는 독이 되기도 했다. 궁예가 암군으로 쫓겨나고 태조 왕건이 추대로 즉위했듯이, 공양왕 역시 혼암한 군주라는 명분으로 축출되었다. 이성계 등은 이미 수명을 다한 고려 왕실의 혈통을 발본색원 단절함으로써 강제로 그 명분을 세웠다. 제왕의 나라 고려는 이로써 마무리되었다. 고려는 살아남기에도 급급해진 나라가 되었고, 그마저도 민심을 헤아리지 못하면서 천명은 다른 선택을 하기에 이르렀다. 아쉬움이 남는 대목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또한 역사의 일부일 따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