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주의를 부추긴 설탕의 달콤한 유혹
15세기 후반부터 시작된 대항해시대에는 포르투갈과 스페인을 필두로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등 유럽 열강들이 앞다투어 대서양을 건너 아메리카, 아프리카, 아시아로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바스쿠 다가마 같은 역사적 모험가들도 비슷한 시기에 등장했다. 이들의 목숨을 건 항해는 후대에 종종 낭만적인 모험담으로 그려지지만, 실제로는 단순한 모험심이나 영웅심만으로 감행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당시 원거리 항해는 국가의 전폭적인 지원 없이는 불가능했던 만큼, 열강이 주도하고 후원한 대항해는 신대륙 정복과 자원 수탈이라는 분명한 목적을 띠고 있었다. 《설탕 전쟁》은 그 중심에 바로 설탕을 향한 욕망이 있었음을 흥미롭게 풀어낸다.
사탕수수는 고온다습한 열대 기후에서만 재배가 가능한 작물이었기에 유럽에서는 생산이 불가능했다. 이에 여러 유럽 국가가 사탕수수 재배에 적합한 기후를 갖춘 아프리카 연안, 카리브해 섬들, 아메리카 대륙 등지에 식민지를 건설하고 대규모 농장을 조성했다. 대표적으로 포르투갈은 마데이라제도와 브라질을, 스페인은 카나리아제도를, 프랑스는 히스파니올라섬을, 영국은 자메이카와 바베이도스를 설탕 산업의 거점으로 삼았다. 식민지에서의 플랜테이션을 바탕으로 설탕 산업은 비약적으로 성장해 갔으며, 19세기에 이르러서는 유럽 내 설탕 수요의 90퍼센트가 카리브해 섬들로부터 충당될 정도였다.(23쪽) 신대륙은 점차 설탕을 향한 유럽인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설탕 기지’로 변모해 갔다.
《설탕 전쟁》은 히스파니올라, 자메이카, 브라질 등의 식민화 과정을 설탕 산업의 역사와 유기적으로 연결 지으며 유럽 열강에 의한 식민 착취의 상흔을 구체적으로 드러낸다. 유럽인은 원주민을 위협해 농장에서 거의 노예처럼 부렸음은 물론, 내륙 탐사 등을 이유로 원주민 고유의 역사와 문화를 무참히 파괴했다. 이에 더해 원주민들은 유럽으로부터 들어온 병원균에 면역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속수무책으로 죽어 나갈 수밖에 없었다. 이 비극의 흔적은 현대 브라질의 인구 구성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오늘날 브라질은 백인과 혼혈 인구가 각각 전체 인구의 40퍼센트 이상을 차지하는 반면, 원주민은 1퍼센트 미만에 불과하다. 수백 년 전만 해도 포르투갈 본토 인구에 필적하는 수의 원주민이 브라질에 살고 있었지만, 이들의 흔적은 이제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설탕을 향한 열강의 탐욕이 한 국가의 인구 구성마저 바꾸어 놓은 셈이다.
한편, 브라질은 열강들이 설탕 생산지를 차지하기 위해 벌인 각축의 무대이기도 했다. 대항해시대 후발주자였던 네덜란드는 향신료 무역으로 해상 패권을 확보한 뒤, 브라질 북부 페르남부쿠 지역에서 포르투갈을 몰아내고 한때 통치를 시도했다. 이 시기 총독으로 부임한 요한 마우리츠는 브라질의 잠재력을 높이 평가하며 수도 헤시피를 집중적으로 개발했는데, 당시 건설된 인프라는 네덜란드 본국조차 놀랄 정도로 선진적이었다. 지금도 헤시피에는 요한 마우리츠가 조성한 도시 계획의 흔적이 남아 있다. 포르투갈어를 사용하는 남미 유일의 국가이면서도, 곳곳에 네덜란드 식민 통치 흔적 또한 남아 있는 브라질은 설탕을 둘러싼 제국의 탐욕과 식민 착취의 역사를 보여 주는 생생한 사례다.
사탕수수밭에서 자행된 인류 최악의 ‘흑역사’
식민지에서의 사탕수수 플랜테이션과 설탕 산업의 발전은 아프리카계 흑인의 대규모 유입을 초래했다. 사탕수수 재배와 수확에서부터, 사탕수수즙을 끓이고 정제해 설탕으로 만드는 모든 과정에는 막대한 일손이 필요하다. 초창기에는 원주민을 동원해 이를 충당하려 했으나 곧 한계에 부딪히자, 유럽인들은 아프리카 대륙으로 눈을 돌렸다. 이후 설탕 산업에 필요한 노동력을 충당하기 위해 노예 무역이 성행하기 시작했다.
설탕 산업에 수반된 흑인 노예 착취는 인간이 인간에게 저지른 가장 끔찍했던 폭력 중 하나다. 1519년에서 1867년까지 노예선에 실려 대서양을 건넌 아프리카 흑인은 약 1250만 명으로 추정된다. 이 가운데 상당수가 질병, 기아, 학대 등으로 항해 중 목숨을 잃어 최종적으로 약 1070만 명이 카리브해와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했다. 인류 역사상 이보다 더 큰 규모의 강제 이주는 없었다.(55쪽) 이들 노예는 백인 농장주나 감독관에게 극심한 학대를 당했는데, 자메이카의 한 농장에서 노예 감독관으로 일했던 토머스 티슬우드가 남긴 기록을 보면 그 잔혹함이 어느 정도였는지 실감할 수 있다. 한 노예가 동료를 초대해 식사를 제공했다는 이유로 귀가 잘리고 수십 번의 채찍질을 당했다는 기록이나, 몰래 사탕수수를 먹다 들킨 노예의 입에 다른 노예가 배변을 보게 했다는 기록은 그 잔혹함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게 한다.(67쪽) 《설탕 전쟁》은 티슬우드의 기록 등 당시 서구 사회 전반에 퍼져 있던 흑인 노예에 대한 잔혹한 학대의 단면을 생생히 보여줌으로써, 인류가 결코 되풀이해서는 안 될 역사를 깊이 성찰하게 한다.
한편, 농장에서의 끊임없는 착취와 폭력은 흑인 노예들의 분노를 자극했고, 카리브해 섬들을 중심으로 각지에서 저항의 불씨가 타올랐다. 그중에서도 아이티 독립은 노예 해방 역사 가운데 무척 독특하고도 중요한 한 장면이다. 아이티는 프랑스 식민지 시절 ‘생도맹그’라 불렸던 지역으로 한때 세계 최대의 설탕 생산지였다. 이곳 노예들은 혹독한 노동을 견디지 못하고 도망쳐, ‘마룬’이라는 공동체를 이루고 식민 당국에 맞서 약 13년간 독립 전쟁을 이어 왔다. 그런데, 이 시기 흑인 민중을 이끈 지도자였던 투생 루베르튀르는 프랑스군과 치열하게 싸우던 도중 스페인으로부터 연합을 제안받는다. 스페인은 투생의 저항군을 이용해 섬에서 프랑스를 몰아내고 당시 설탕 산업의 핵심 거점이었던 생도맹그를 차지할 속셈이었다. 하지만 그로 인해 전세가 불리해지리라 판단한 프랑스군 혁명 판무관 송토나는 돌연 노예 해방을 선언해 버린다. 상황은 급변했고, 갑작스레 해방을 맞은 흑인 저항군은 중대한 기로 앞에 서게 되었다. 프랑스의 해방 선언을 믿을 것인지, 약속한 대로 스페인과의 연합을 이어 갈 것인지를 결정해야만 했던 것이다. 선택의 갈림길에서 투생과 흑인 저항군은 자신들을 오랫동안 착취해 온 프랑스군의 손을 잡았다. 그 결과 스페인뿐 아니라 전쟁에 뒤늦게 가세한 영국군까지 히스파니올라섬에서 몰아낼 수 있었고, 세계 최초의 흑인 노예 독립국인 아이티 공화국이 탄생하게 되었다.
이처럼 아이티 독립은 흑인 노예 착취와 그에 맞선 저항, 설탕 생산지를 둘러싼 열강의 탐욕, 송토나의 전략적 노예 해방, 그리고 자신들을 억압해 온 프랑스 백인들과의 연합을 택한 흑인 저항군의 선택 등 여러 역사적 모순이 교차한 결과였다. 《설탕 전쟁》은 이런 아이티의 사례를 넘어, 다른 설탕 생산지들에서도 흑인 노예의 운명이 유럽 열강의 이해관계에 따라 어떻게 좌우되었는지를 다양한 이야기로 풀어내며 설탕을 향한 욕망이 얼마나 많은 피와 눈물을 낳았는지를 돌아보게 한다.
‘설탕의 세계사’ 위에 새겨진 우리의 발자취
설탕 산업은 대규모 인구 이동과 디아스포라를 촉진한 주요 동인 가운데 하나였다. 생도맹그와 함께 주요 설탕 생산지였던 자메이카의 흑인 노예 이주 과정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 자메이카에서는 영국 식민 당국에 저항하는 두 차례의 마룬 전쟁이 벌어졌는데, 이 과정에서 600여 명의 흑인이 영국에 의해 북아메리카의 노바스코샤로 강제 이주되었다. 평생 열대 기후에서 살아온 흑인들에게 노바스코샤의 겨울은 너무나 혹독했고, 결국 이들 중 많은 수가 그곳에서 목숨을 잃었다. 그중 겨우 살아남은 이들은 자신들을 ‘선조의 땅’인 아프리카로 보내달라고 청원해, 서아프리카 시에라리온 지역으로 재차 이주하게 되었다. 아이러니한 점은, 그때 시에라리온으로 옮겨 간 이들 중 일부가 계약 노동자 신분으로 또다시 자메이카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후손은 자메이카에 정착해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영국에 의해 아프리카에서 카리브해, 북아메리카를 거쳐 다시 카리브해로 삶의 터전을 옮겨야 했던 자메이카 흑인 노예의 고단한 여정은 설탕 산업이 초래한 디아스포라의 비극적 일면을 여실히 드러낸다.
20세기 초중반에 이르러 미국의 영향 아래 설탕 산업의 또 다른 주요 무대로 부상한 하와이는 한인 최초의 공식 이민이 이루어진 곳으로, 설탕으로 인한 디아스포라의 현장일 뿐 아니라 우리 역사와도 깊은 관련이 있다. 19세기 후반부터 하와이에도 대규모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이 조성되기 시작했는데, 대부분 미국 출신 백인이었던 농장주들은 노예제 폐지 이후 더 이상 흑인 노예를 고용할 수 없게 되자 값싼 노동력을 찾아 아시아로 눈을 돌렸다. 이후 일본과 중국에 이어 조선에서도 노동 이민을 받기 시작해 1902년 고종의 허가 아래 한인의 하와이 이민이 시작되었다.
이민자들 또한 흑인 노예가 그러했던 것처럼 농장의 비인간적 노동 조건과 차별적 대우를 감내해야 했다. 이를 견디지 못한 이민자 일부가 조국으로 돌아가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악착같이 살아남아 하와이 사회에 점차 뿌리내렸다. 이 과정에서 등장한 ‘사진결혼’이라는 제도는 무척 흥미롭다. 사진결혼이란, 1910년부터 1924년까지 하와이 한인 사이에서 통용되었던 혼인 방식이다. 하와이에 있는 조선인 남성이 중매인을 통해 자신의 사진을 조선의 여성에게 보내면, 사진 속 남성이 마음에 든 여성이 자신의 사진을 하와이로 보내며 결혼이 성사되었다. 사진결혼 제도로 조선 여성들이 ‘사진신부’로서 합법적으로 하와이에 건너올 수 있게 되면서 한인은 점차 가족 단위로 하와이에 정착하기 시작했고, 이들을 기점으로 훗날 멕시코나 쿠바의 농장으로도 이민이 이루어졌다.
하와이에 정착한 한인들의 삶 역시 나라를 빼앗긴 조국의 상황만큼 녹록지 않았다. 하지만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하와이 한인들은 공동체를 꾸리고 서로를 보듬었으며, 피땀으로 번 돈의 일부를 기꺼이 독립운동 자금에 보탰다. 머나먼 땅에서 식민지 조선인 못지않은 고초를 겪었던 미주 한인 이민자들은, 열정적으로 구국의 뜻을 이어 간 이방의 독립운동가들이었다. ‘스티븐스 저격 사건’으로 잘 알려진 장인환과 전명운 또한 하와이에서 사탕수수 노동자로 일하다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가 조선 독립을 위해 활동한 청년들이었다. 두 사람은 1908년 친일 외교관 스티븐스를 저격함으로써 조선인의 독립 의지를 전 세계에 알렸다. 이 사건은 미주 한인 사회는 물론 국내외 흩어져 있던 독립운동 세력에 큰 영향을 미치며 이후 항일 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다.
하와이로의 첫 한인 이민과 그로부터 시작된 미주 한인의 역사는 설탕의 세계사와 한민족의 역사가 과거와 현재를 가로지르며 만나는 중요한 교차점이다. 《설탕 전쟁》은 하와이 한인 이민자들이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궈낸 삶이야말로, 제국주의와 식민 착취가 휩쓴 세계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우리 힘으로 또렷이 남긴 발자취였음을 묵직하게 일깨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