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 기원을 묻고, 그 미래를 가늠하는 사유의 지도
『세계시론산책』은 한 편의 시가 되기 전, 그 뿌리와 논리, 감각과 이념을 치열하게 묻고 고민해온 사람들의 목소리를, 한 편역자의 열정과 성실한 문장으로 다시 불러낸 책이다. 이 책은 그저 “시론(詩論)”을 모은 문학 자료집이 아니다. 그것은 시라는 장르에 대해 사유한 철학적 산물이며, 시인의 탄생과 죽음을 오가는 역사적 변증법의 기록이며, 동시에 오늘날 우리가 문학과 언어를 어떻게 마주해야 하는가에 대한 긴 여운의 해답이기도 하다.
1. 『문학청춘』의 연재에서 시작된 ‘산책’의 기록
책의 시작은 소박하다. 『문학청춘』의 주간인 김영탁 시인과 번역가 김석희가 술자리에서 나눈 이야기, 그리고 어느 봄호를 향한 번역 청탁. 이 작은 약속은 2020년부터 2023년까지, 총 15회에 걸친 시론 번역 연재로 이어졌고, 마침내 단행본이라는 응축된 형식으로 완성되었다.
김석희는 “서양에서 ‘고전’으로 평가받는 시론 중 읽을 만한 것”을 직접 고르고 골랐으며, 단순한 언어 전환에 그치지 않고, 그 사유의 무게까지 한국어의 정서로 이식하는 번역을 감행했다. 단지 고전을 옮긴 것이 아니라, 고전을 읽어낸 또 하나의 ‘시론 산책’이자 ‘비평적 실천’인 셈이다.
2. 2,000년에 걸친 시론의 역사를 넘나들다
『세계시론산책』은 고대부터 근대 초기에 이르기까지 시에 대한 주요한 사유들을 폭넓게 담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시작하여 호라티우스의 「시론」, 시드니 경의 「시를 위한 변호」, 워즈워스와 셸리의 낭만주의적 주장, 발레리의 추상적 언어론, 릴케의 시인론, 예이츠와 엘뤼아르의 상징주의와 초현실주의까지, 그 사상적 스펙트럼은 동시대 문학이 가진 기반을 넓게 조망하게 만든다.
이 중에서도 아리스토텔레스의 ‘개연성’ 개념은 시를 현실보다 더 철학적인 것으로 보았던 고대 사유의 정수를 드러내며, 셸리의 「시의 옹호」는 시를 문명의 가장 깊은 도덕적 감각으로 본다. 반면 릴케는 ‘시를 쓰고자 하는 젊은 시인에게’ 삶을 먼저 사랑하라고 조언하며, 예이츠는 상징이 지닌 힘과 영혼의 구조를 설파한다. 각각의 시론은 시대와 사조를 반영하면서도 인간과 언어, 예술과 현실 사이의 심층적인 균열을 예리하게 포착하고 있다.
3. 번역가의 ‘사유’가 더해진 입체적 읽기
김석희는 단지 원전을 옮기는 번역자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탁월한 독자이자 분석가이며 해설자다. 그의 번역은 원문 충실성을 담보함과 동시에, 오늘날 독자가 읽을 수 있는 ‘맥락’을 고스란히 마련한다. 특히 각 시론의 해설에서는 해당 사상가의 철학적 배경, 생애의 흐름, 문학적 위치 등이 상세히 소개되어 있어, 단편적인 이론 수용을 넘어 사유의 체계 전체를 통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한다.
그의 문장은 정제되어 있으면서도 유연하다. 복잡한 사상을 친절히 풀어내되, 결코 그 깊이를 훼손하지 않는다. 더불어 직역과 의역의 경계를 유려하게 조율하며, 원문의 철학적 긴장을 우리말의 미학으로 온전히 되살린다. 특히 발레리나 포 같은 난해한 문장들도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어, 독자들의 진입 장벽을 낮추는 데 크게 기여한다.
4. 시론은 곧 우리 시대의 자화상
『세계시론산책』의 진정한 가치는, 그것이 과거의 사유를 박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오늘날 우리 시대의 문학적 고민과도 깊이 연결된다는 데 있다. 디지털 시대, AI의 언어 생성이 보편화되는 시점에서 우리는 다시 묻게 된다. “시는 무엇인가?” “언어는 감정을 대신할 수 있는가?” “시는 사라졌는가, 혹은 살아 있는가?”
이 책은 시가 단순한 문학 장르가 아니라, 인간의 ‘말하는 존재로서의 기원’과 ‘말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는 상징의 힘’을 끊임없이 되새기게 만든다. 시의 죽음을 논하는 시대에 오히려 시의 원형을 되짚는 작업은, 인간됨의 근원을 찾는 시도와 다르지 않다.
산책으로 이끄는 사유의 길
『세계시론산책』은 시인들을 위한 책이지만, 시를 쓰지 않는 이들도 깊이 공감할 수 있는 책이다. 언어를 사랑하는 이들, 문학을 공부하는 이들, 예술의 본질에 대해 생각하는 이들에게, 이 책은 반드시 한 번 거쳐야 할 사유의 길이다. 고전 시론을 읽는다는 것은 단지 과거의 명문장을 복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어떤 언어를 믿고, 어떤 감정을 품고 살아가는지를 다시 묻는 일이다.
산책은 천천히 걷는 자만이 얻을 수 있는 사유의 기회다. 이 책은 그 느린 걸음 속에서, 시라는 깊은 우물의 물줄기를 우리 곁으로 불러내는 고요한 전율의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