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권을 둘러싼 논의는 결국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주제와 관련
고대로부터의 시민권의 발달 과정을 조명하면서 저자가 책에서 제기하는 근본적인 질문은 다음과 같다. 첫째,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 시민권이 성립될 때 시민이란 누구였는가? 둘째, 고대적 의미의 시민이 중세 초에 소멸한 이후 중세의 시민권은 고대와 어떤 차이점이 있는가? 셋째, 근대의 시민권은 어떻게 성립되었으며, 어떻게 보편적인 의미를 획득했는가? 넷째, 20세기 들어 시민권의 개념은 세계화와 어떤 관련성을 가지고 있으며, 어떤 주제가 논의거리가 되고 있는가?
위와 같은 질문은 시민권의 확대 과정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느냐의 근본적인 문제 및 향후 시민권의 발전 과정에 대한 전망의 문제로 귀결된다. 시민권을 둘러싼 논의는 결국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주제의 연장선에 있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아우구스티누스를 비롯해 마키아벨리, 홉스, 로크, 몽테스키외, 루소, 헤겔, 토크빌, 마르크스 등 이 책에서 다룬 사상가들의 주요 관심도 바로 국가론에 있었다.
오늘날 ‘시민’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시민과 시민권, 시민권과 국적을 둘러싼 논쟁의 역사는 뿌리가 깊다. 저자에 따르면 시민권을 둘러싼 주제는 20세기 후반부터 열띤 논란의 대상이었다. 즉, 1990년을 전후로 사회주의권이 붕괴함으로써 소위 ‘역사의 종말’이 이루어진 것과 관련되는데, 1917년 러시아혁명 이후 이념에 근거한 국가를 건설하려는 노력이 좌절되자, 국가가 무엇이며 또 무엇이어야 하느냐에 대한 질문이 제기되었고, 이 질문의 핵심에 시민권 개념이 있었다. 하버마스는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서 시민권을 둘러싼 문제를 국민국가의 미래에 관한 화두, 유럽연합과 유럽 단일시장의 출범에 따른 국민국가와 민주주의의 관계, 그리고 대규모 이민이 유입되면서 입헌 민주주의라는 보편적인 원칙이 공동체 사회를 유지하려는 특수한 상황과 충돌하는 문제 등 세 가지로 요약했다. 하버마스가 30여 년 전에 제기한 문제는 오늘날 더욱 첨예하기만 하다. 그러나 시민권과 관련된 문제는 20세기 들어 처음 제기된 것이 아니라, 인류가 국가나 도시 공동체를 조직한 이래 지속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시민권이란 무엇인가, 시민권과 국적의 차이는 왜 중요한가
시민권에 대해 들어본 사람은 많지만. 시민권과 국적의 차이를 아는 사람은 드물다. 저자는 오늘날 미국이 초강대국이 되어 세계사를 주도하게 된 근본 원인은 시민권 제도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말한다. 시민권 제도는 고대 그리스에서 탄생해 로마의 팽창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고, 중세의 자치 도시를 거쳐 근대 유럽과 미국의 토대를 형성했다. 시민권(citizenship)이란 한 국가의 시민으로서의 법적인 권리를 의미할 뿐만 아니라 내부적인 주권의 핵심적인 수단이다. 우리나라를 포함하여 세계 대부분의 국가는 국적 제도를 채택하고 있으나, 미국, 캐나다, 호주 같은 일부 국가에서는 시민권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이들 국가에서 국적이란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굳이 시민권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데는 그만한 역사적 배경이 복잡하게 얽혀있다. 한편 시민권이라는 단어는 여러 가지 오해의 소지를 안고 있다. 이 단어는 영어의 ‘citizenship’을 번역한 것인데, 엄밀히 말해 시민권과 ‘citizenship’은 동일하지 않다. 한자어인 시민권(市民權)은 시민으로서 가진 권리를 일컫지만, ‘citizenship’은 시민으로서의 권리와 지위만이 아니라 자질이나 조건도 포괄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민권의 확대 과정을 이해하는 ‘네 개의 동심원 모델’
저자는 시민권을 가장 효율적으로 파악하는 개념적 도구로서 ‘네 개의 동심원 모델’을 소개한다. 트로퍼(Michel Troper)는 프랑스혁명을 설명하면서 당시 프랑스 주민들을 네 개의 범주를 가진 동심원으로 분류했다. 가장 바깥쪽 원에는 모든 주민이 포함되고, 그다음 원에는 프랑스인 부모에게서 태어난 대부분의 남녀 및 미성년자가 있다. 그리고 세 번째 원은 재산세를 납부하고 일정 연령 이상의 성인 남성에게 부여된 선거권을 가진 능동 시민들을 포함하고, 마지막으로 가장 작은 원은 피선거권을 가진 소수의 사람으로 구성된다. 저자에 따르면 트로퍼의 이 주장은 비단 프랑스혁명만이 아니라 역사 전체를 통틀어 시민권의 확대 과정을 이해하는 데도 원용할 수 있다.
가령, 20세기 초 서양의 지적 전통에 속하는 대부분의 국가에서 국민과 시민은 동일시되었고 국가 내에서 신분적 차별이 철폐되고 성별, 인종별 경계가 사라지게 되었다. 동심원으로 비유하자면, 고대 그리스의 경우에 시민을 포함한 중앙의 작은 원이 바깥쪽으로 확대되어 마침내 동심원 사이의 모든 경계를 삭제한 셈이 된 것이다. 시민권이 보편화된 20세기 전반에는 시민권의 성격에서 근본적인 변화가 생겨났다. 그 이전에는 동심원으로 시민권을 설명할 수 있었다고 한다면, 이제 동심원은 하나의 원형이 되어 각국의 모든 국민을 원 안에 포함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시민권을 둘러싼 논란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이제 각국 국민으로 이루어진 원들 사이의 관계가 관심을 끌면서 모든 원을 포괄하는 거대한 하나의 원을 지향하는 움직임이 등장했다. 즉 개별 국가의 시민권을 초월하는 지역별 시민권, 그리고 세계시민권을 향한 운동이 그것이다.
저자는 이주민 문제나 개별 국가들의 자국중심주의가 강화되고 있는 현상 등을 보면, 21세기 전반을 살아가고 있는 현 세계에서 각각의 원으로 존재하는 개별 국가의 시민권이 하나의 거대한 원으로 통합될 수 있는 현실적인 가능성은 크지 않다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