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무 살에 상해에서 반일 테러활동에 뛰어들어 맥아더사령부의 정치범 석방 명령으로 일본 감옥에서 풀려나온 서른 살까지 나는 지겨운 줄도 모르고 또 한눈도 팔지 않고 오로지 한길을 걸어 나왔다. 제멋에 겨워서 자신만만하게 걸어 나왔다. 하긴 자신만만한 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이 말씀은 김학철 선생님께서 1994년에 하셨으니 세상을 떠나기 7년 전에 남긴 말입니다. 선생님은 조선의용대 최후의 분대장으로 호가장전투에 참가했다가 왼쪽 다리에 총상을 입게 됩니다. 그리고 일본군 포로가 되어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일본 나가사키형무소에 수감됩니다. 그렇게 선생님은 자신의 생명을 시시각각 좀먹어 들어오는 원수 같은 다리를 끌고 “일본이 먼저 망하느냐 내가 먼저 죽느냐” 하는 경주를 3년 넘게 하다가 끝내 열악한 환경에서 다리를 절단하게 됩니다. 하지만 자신만만한 걸음으로 살아오셨던 것처럼, 다리를 절단한 후 여동생에게 쓴 편지에서 “사람의 정의는 인력거를 끄는 동물이 아니다. 다리 한 짝쯤 없어도 문제없다. 걱정 마라!”라고 태연하게 위로합니다.
♥ 김해양 선생님에게 아버지 김학철은 어떤 분이셨을까요?
“나의 아버지는 극한의 상황을 수없이 극복하며 끝내 인간 승리를 증명해냈습니다. 그는 일본 감옥에서 왼쪽 다리를 절단했지만 실의에 잠기는 대신 총칼을 붓으로 바꾸었습니다. 거대한 우상들에 차례로 도전했으며 어두운 철창 속에서도 희망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22년 동안의 비인간적인 수감생활을 마치고 자유의 몸이 되었을 때, 아버지의 나이는 어느덧 65세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최후의 질주를 멈추지 않았고, 여든다섯 해로써 생을 마감하는 날까지 장장 20년간 위대한 문학 유산을 우리에게 남겨주었습니다. 진리와 자유를 위해서는 개인의 안위와 부모 형제마저 뒤로하고 나설 용기가 필요함을 아버지를 보며 깨닫곤 합니다. 아버지의 파란만장한 여정은 한국, 중국, 북한, 일본을 아우르는 동아시아 역사의 실사판입니다.”
♥ 김학철 선생님은 세상의 온갖 불의에 맞서 싸우며 죽음의 고비를 수없이 넘나들었습니다. 세상을 지배하는 힘과 권력이라도 정의롭지 못하다면 그에 도전해야 마땅했습니다. 말년에는 “나는 여생을 모든 입 가진 자들이 다 말할 수 있는 자유를 위해 싸울 거야!”라고 하시면서 출입문에 ‘한가한 사람은 문을 두드리지 말라’는 팻말을 걸고 일분일초를 아끼시며 창작에 몰두하셨습니다. 병이 깊어 글을 쓸 기력마저 쇠해지자 “작품을 더는 쓸 수 없다면 나의 인생은 끝난 것이다. 한명(限命)을 아는 것이 영웅이다.”라고 하시면서 식사를 중단하고 담담히 존엄한 죽음을 맞이합니다. 선생님의 친필 유언은 대쪽 같은 그의 신념이자 좌우명이었습니다.
“편안하게 살려거든 불의에 외면을 하라.
그러나 사람답게 살려거든 그에 도전을 하라.”
♥ 김학철 문학의 원천은 평생 꾸준히 해온 ‘독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의 일생은 열광적인 독서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일본어로 된 세계문학 전집을 통독하였고, 팔만 뻗으면 닿을 수 있는 책장에 《노신전집》 10권과 홍명희의 《임꺽정》 6권을 두고 책이 닳도록 읽었습니다. 또 《홍루몽》도 외울 정도로 자주 읽으셨는데 선생님은 이 소설이 중국 사회의 백과사전이라 하셨지요. 중국의 《사기(史記)》를 좋아하셨고 숄로호프와 톨스토이의 작품도 생명같이 사랑했습니다. 문학에 대한 사랑, 박애 정신, 역사에 대한 책임감 등이 김학철 문학의 정체성이 되어주었습니다. 한반도와 일본(감옥), 그리고 중국에서 격동의 20세기를 온몸으로 치열하게 살아온 김학철 선생님은 세상을 떠나기 전 돋보기로 조선의용대 창립 사진을 하나하나 살펴보시며 대원들에 대한 자료를 정리하셨습니다. 당신만이 그 작업을 할 수 있다며 정리한 소중한 자료를 이 책의 부록으로 공유합니다. 망국 시기 ‘최초의 조선인 무장 대오인 조선의용대는 전무후무한 항일 결사체’였습니다. 독립운동과 광복을 위해 창립된 조선의용대는 어떤 이유에서든 우리의 독립운동사에서 지워져서도 폄하되어서도 안 되는 한 부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