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적? 나이? 외모? MBTI?
‘나’를 알기 위해서는 더 많은 이야기가 필요해
인류학이 펼쳐 보이는 낯선 세계와 새로운 나
청소년들은 자주 모순되는 말을 듣는다. 좋아하는 것을 찾아 ‘나답게’ 살라는 말과 너는 왜 남들처럼 못 하느냐는 말. 내가 어떤 사람인지 미처 파악하기도 전에 ‘나다운’ 모습을 보이라는 요구와 ‘나’를 바꾸라는 요구를 동시에 받는다. 성적, 외모 같은 어느 한 가지 요소로 나를 재단하는 말들에 상처받기도 하고, 재능이나 적성, 자아 정체성을 찾으라는 말에 막막함을 느끼기도 한다. 나는 계속 ‘나’로 살고 있는데도 나에 대해 말하는 것은 왜 늘 어려울까?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몰랐던 내 모습을 새롭게 발견할 좋은 방법이 없을까?
청소년 곁에서 오랜 시간 함께해 온 교육인류학자 함세정은 ‘나’를 알기 위해서는 나 자신에게 집중하기보다 나를 둘러싼 사회와 문화를 살펴야 한다고 말한다. 학교에서의 내 모습과 집에서의 내 모습이 다르고, 한국의 교실에서 ‘좋은 학생’이라고 여겨지는 특성이 다른 문화권에서는 수동적이라 여겨질 수도 있는 것처럼 내가 어떤 사람인지는 내가 어디에 서 있느냐, 누가 어떤 관점에서 나를 해석하느냐에 달라지기 때문이다. 바로 이 사회와 문화를 탐구하기에 좋은 길잡이가 되는 학문이 문화인류학이다.
문화인류학은 ‘문화’라는 개념을 통해 인간의 삶의 방식과 의미를 이해하고자 하는 학문인데요. 여러 사회를 비교하여 연구하기 때문에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삶의 모습도 다른 사회에서는 상식으로 여겨지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을 알게 합니다. 문화인류학의 관점을 배우면 우리가 자연스럽다고 생각하는 기준이 모든 사회에 보편적이기보다는 특정한 환경과 역사 속에서 형성되었다는 걸 깨닫게 되지요. 말하자면 나에 대한 평가와 이해 역시 사회마다 다를 수 있다는 겁니다. (…) 여러분은 학교, 온라인 커뮤니티, 동네, 가족을 포함한 다양한 장소에서 관계 맺으며 다채로운 정체성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그 안에서 나의 의미는 더욱 풍부해지고 깊어집니다. 문화인류학은 다면적이고 복잡한 존재로서 인간에게 관심을 기울입니다. - 6~7쪽
인류학자 마거릿 미드의 연구에 따르면, 사모아의 청소년들은 흔히 말하는 ‘질풍노도의 시기’를 경험하지 않고 비교적 수월하게 성장하며 격렬한 감정 변화나 높은 불안으로 대표되는 청소년기 특유의 성향도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오늘의 한국 사회에서 청소년은 ‘중2병’, ‘사춘기’ 등으로 불리며 불안정하고 미숙한 이미지로 그려지지만, 과거에는 독립 운동과 민주화 운동의 주체로 당당하게 활약하기도 했다. 즉 ‘청소년’이라는 개념조차도 사회와 문화, 시대에 따라 다르게 정의되는 것이다. 이 책은 청소년은 물론 학생, 자녀, 한국인, 누군가의 팬, 비즈니스 친구, 몇 등급 인간 등 10대를 정의하는 여러 가지 말들을 문화인류학의 관점에서 낯설게 보게 한다. ‘누가 한국인인가?’, ‘아이돌을 좋아하면서 경험한 것들, 만난 사람들은 나를 어떻게 바꿔 놓았을까?’, ‘내신 등급은 나를 얼마나 설명할 수 있을까?’와 같은 질문을 마주하며 청소년들은 자신이 어디에 누구로 서 있는지, 만약 다른 곳에 서 있다면 어떻게 달라질지, 다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세상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상상해 볼 수 있다.
각 사회와 문화의 고유한 특성을 존중하는 인류학의 관점은 오늘의 한국 청소년에게 요구되는 기준이나 지표가 결코 절대적 진리가 아님을, 우리는 얼마든지 새로운 이야기를 써 내려갈 수 있음을 알려 준다. 대학 입시에 관심 없는 나, 혼자 있는 게 좋은 나, 가족이 너무 싫은 나, 꿈이 없는 나는 혹시 비정상이 아닐까 두려워하던 청소년이라면, 이 책을 통해 그런 두려움을 키우게 한 사회문화적 맥락을 이해하며 ‘나’에 관한 깊고 풍부한 이야기를 길어 올릴 수 있을 것이다.
문화상대주의, 위치성, 타자화, 의미, 질적 연구, 젠더, 비가시화…
20가지 인류학 개념으로 살펴본 깊고 다채로운 청소년의 삶
이 책은 청소년에게 문화인류학의 관점과 개념을 소개하는 입문서이자, 동시에 오늘의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청소년의 시각과 경험을 담은 현장 기록이다. 저자는 이주배경청소년지원재단, 하자센터, 대학 강의실 등에서 직접 보고 듣고 경험한 청소년의 구체적 삶을 이 책에 담았다. 인류학 연구가 사회의 지배적인 서사에 가로막혀 들리지 않던 이야기, 보이지 않던 삶의 방식을 드러내는 것처럼, 이 책은 사회적으로 충분한 권리와 목소리를 갖지 못해 잘 드러나지 않았던 청소년들의 솔직한 생각과 거침없는 말, 남몰래 품고 있던 아픔과 불안을 여실히 보여 준다.
총 20편의 글로 이루어진 이 책은 대학 입시, 온라인 세상, 교실 내 서열, 친구 관계, 아이돌 팬덤 문화 등 오늘의 청소년이 경험하는 일상을 다양한 각도에서 해석할 수 있는 문화인류학 개념 20가지를 소개한다. 예컨대 “우리 대화 좀 하자”라는 어른들의 말에 “쫄린다”, “혼나나?”라는 생각이 드는 청소년의 입장을 ‘위치성’이라는 개념을 통해 살펴본다. 대화는 갈등을 해결하고 건강한 관계를 만들어 가는 민주적인 의사소통 방식인데, 청소년들은 왜 이렇게 반응하는 것일까? 이는 어른과 청소년이 서로 다른 경험, 자원, 정보를 가지고 대화에 입장하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약자인 청소년에게 대화는 일종의 심문이나 시험처럼 여겨질 수 있고, 어른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자신을 해명하는 일이 부담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다. 이렇게 내가 어디에 누구로 서 있느냐에 따라 세상이 다르게 보이는 것이 바로 인류학에서 말하는 ‘위치성’이다. 우리는 국적, 나이, 교육 수준, 성 정체성, 계급, 삶의 경험 등에 따라 저마다 다양한 위치에서 세계를 경험하고 관계를 형성한다. 따라서 ‘위치성’을 이해한다면 나의 시각이 전부가 아님을 깨닫고, 다른 위치에서 비롯한 다른 의견을 좀 더 열린 태도로 받아들일 수 있다.
세상에 대한 관점과 경험, 지식은 나의 위치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미국 역사를 예로 들자면, 신나는 음악 속에서 질주하는 카우보이가 떠오르는 서부 개척 시대는 아메리카 원주민의 입장에서는 침략과 학살, 그리고 삶의 터전을 떠나야 했던 고통의 역사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진로 교육 역시 학생의 위치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미등록 이주 청소년에게는 보편적인 진로 이론이 그다지 유효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비자 문제로 불확실한 일상을 살고 있는 사람에게 분명한 진로 목표를 가지고 노력하라는 조언은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 이야기일 테니까요. - 145~146쪽
한편, 직업 선택의 기준으로 돈을 최우선으로 꼽는 청소년들의 말을 인류학에서 주목하는 사회문화적 ‘의미’라는 개념을 통해 살펴보면, ‘돈’은 단지 경제적 여유만을 뜻하지 않는다. 거기에는 불안정한 고용이 일상화된 시대에 얻고 싶은 최소한의 안정, 소수의 직종만을 ‘꿈’으로 인정하는 어른들의 질문을 피하고자 하는 마음, 일만 하며 살고 싶지는 않다는 바람 등 다양한 욕구와 갈망, 사회문화적 맥락이 숨어 있다. 최신형 스마트폰을 구입하는 행위에 스마트폰의 기능뿐만 아니라 사회적 지위와 소속감, 취향과 자아 정체성 등 풍부한 의미가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인간은 물리적 세계 위에 언어, 상징, 이야기, 의례 등을 통해 공유하는 ‘의미’를 덧씌우며 살아간다. 따라서 ‘의미’라는 개념을 통해 청소년의 일상을 들여다보면 청소년을 예상 가능한 뻔한 이들이 아니라 다층적이고 복잡한 내면을 가진 존재로 바라볼 수 있다.
‘돈’은 교환 수단이기 때문에 늘 그다음을 의미합니다. 친구를 만날 수 있는 시간, 친구에게 받은 호의를 돌려줄 수 있는 여유, 경험을 쌓을 기회, 건강을 유지할 수 있는 시간 등 삶의 다양한 가치가 ‘돈’ 아래에 숨겨져 있습니다. 따라서 ‘돈’에 대한 질문이 필요합니다. 청소년을 돈만 따지는 납작한 인간으로 만들기보다는 돈에 숨겨져 있는 풍부한 의미를 밝혀 볼 필요가 있습니다. (…) 사회문화적 의미는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는 바탕이 됩니다. 나아가 ‘무엇이 중요하고 가치 있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과도 연결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한국 청소년들이 직업 선택의 기준으로 ‘수입’을 우선시하는 것은 개인적인 선호를 넘어 우리 사회와 문화를 반영한 현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 97~101쪽
그 밖에도 이 책은 각 사회의 고유한 문화적 맥락에 따라 정상과 비정상의 기준이 달라진다고 보는 ‘문화상대주의’, 면담이나 현장 연구를 통해 한 사람의 감정, 경험, 가치관 등을 깊이 있게 탐구하는 ‘질적 연구’, 특정 집단을 나와 동등한 존재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다른 특성을 가진 다른 존재로 규정하는 ‘타자화’ 등 문화인류학의 주요 개념을 통해 청소년들이 사회의 통념, 상식에 맞서 ‘나다움’을 찾고, 타인을 또 하나의 고유한 세계를 가진 존재로서 이해하고 존중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준다. 뿐만 아니라, 비청소년 독자에게는 ‘제멋대로다’, ‘중2병’ 같은 청소년에 대한 묘사가 실은 청소년이 경험하고 있는 세계, 청소년이 서 있는 위치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게 한다. 이 책을 함께 읽는 청소년 독자와 비청소년 독자는 서로가 꽤 가까이 연결되어 있으며, 서로 달라도 이해하고 연대할 수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예측 불가능성이라는 희망
인류학의 관점이 청소년에게 주는 힘과 용기
타고난 정체성이나 사회적 위치에 따라, 역사적 경험이나 가지고 있는 자원에 따라 세상을 다르게 해석할 수 있고, 그 해석 또한 계속해서 변화한다고 보는 인류학의 관점은 청소년들에게 해방적인 시야를 제공할 수 있다. 꿈, 입시, 진로, 정체성 등 청소년을 압박하는 많은 것들을 절대적 현실이 아니라, 다르게 바라볼 수 있고 새롭게 바꿔 나갈 수 있는 유동적이고 문화적인 산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정환경도, 재능도, 친구도, 미래도 이미 다 정해져 있어 다른 가능성 따위 없다고 믿었던 청소년들에게 인류학은 ‘세상은 이미 결론이 다 난 곳이 아니다. 사회도 문화도 정상도 비정상도 우리가 새롭게 만들어 갈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려 줄 수 있다.
저자는 이를 ‘예측 불가능성이라는 희망’이라고 표현했다. 형편없는 성적, 돈도 없고 친구도 없는 처지, 숨길 수밖에 없는 성 정체성, 기후 위기나 전쟁으로 망할 것처럼 보이는 세상 등 청소년에게 비관은 참 선명하지만, 인류학자들은 세상이 늘 예측과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는 것을 수많은 연구를 통해 증명해 왔다. 이상하게만 보였던 문화도 그 안에 들어가서 보면 이해할 수 있고, 정반대 입장을 가졌다고 믿었던 사람도 면담을 통해 깊은 대화를 나누다 보면 나와 비슷한 면이 많다는 걸 발견할 수 있다. 누가 어디에 서서 보느냐에 따라 상황은 달라지고, 상황이 바뀌면 관계 또한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다. 인류학의 관점을 배우면 나도 타인도, 그리고 세상도 결론이 정해져 있지 않은, 얼마든지 함께 만들어 나갈 수 있는 역동적인 과정임을 알 수 있다. 나아가 정해진 틀을 넘어 새로운 나를,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갈 용기를 낼 수 있다.
예측이 틀릴 수 있다는 것은 비관적 결정론을 뒤집을 수 있는 단서가 됩니다. 기적이 있다면, 그것은 예언을 바꾸는 일입니다. 다행히 문화인류학 연구에서는 이 ‘기적’이 빈번하게 일어납니다. 고심해서 내놓은 정책은 뒤집힌 결과를 가져오고, 학생들은 교사의 의도와는 다르게 움직이며, 연구는 연구자가 생각지도 못한 장면들로 채워집니다. 구체적인 맥락 위의 움직임은 규칙과 공식으로 대체될 수 없는 특수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 ‘부족한, 못난, 비정상적인’이라 규정된 나를 넘어서 새로운 나를 발견하는 데 보탬이 되고자 했습니다. 예상하지 못한 나를 발견하는 것은 어쩌면 나에 대한 결론을 뒤집는 기적일지도 모릅니다. 정해진 답을 넘어서,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하는 데 이 책이 도움이 되었기를 바랍니다. - 254~25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