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이 정치를 포기할 때
역사는 어떻게 쓰이는가
“뭔가 명확히 매듭지어지고 있지 않다. 이어지는 논의는 무엇일까?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시 어떤 주장을 덧붙이고 싶었을까? 영원한 숙제다.
어딘가에 남아 있을지도 모르는 그 어떤 텍스트가 발견되지 않는 한!”
-김재홍, 『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그린비, 2023)의 마지막 주석
‘헬라스 158개의 정치체제’의 자료 집성집!
내란을 기도하거나 헌정 질서를 유린한 자는 사형에 처했다
『아테나이인의 정치체제』는 오늘날 아리스토텔레스 연구자들이 표준적으로 인용하는, 벡커(Immanuel Bekker)가 편집한 아리스토텔레스 전집(Corpus Aristotelicum)에는 수록되어 있지 않다. 수사가 키케로, 역사가 플루타르코스, 사전 편찬가 하르포크라티온과 폴룩스, 비잔틴의 문인 포티오스 등 여러 저술가에 의해 언급되고 인용되어 왔음에도, 대략 6세기부터 9세기에 이르는 혼란기에 텍스트가 여기저기로 흩어지게 된 이후 근대까지 겨우 「단편」의 형태로만 그 내용이 알려져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이 『아테나이인의 정치체제』라는 제목으로 불리고 있었던 것은 하르포크라티온 등에 의한 인용으로부터 확인해 볼 수 있을 뿐이다.
3세기경의 인물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의 『유명한 철학자들의 생애와 사상』에 언급된 143개의 아리스토텔레스 저서 목록에는 『158개 도시(국가)의 정치체제: 민주정, 과두정, 귀족정 및 참주정』이라는 저서가 나온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논의의 대단원을 마치는 가운데(제10권 제9장 1181b15~24) ‘정치학’ 프로그램을 예고한다. ‘다양한 법과 정치체제에 대한 자료 수집’, 즉 ‘정치체제의 집성’에 근거해 정치학의 과제 연구를 실행할 것이라고 한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정치체제의 자료 집성’은 앞서 언급한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 저서 목록에 나오는 작품으로 이해된다. 이를 통해 우리는 『아테나이인의 정치체제』가 고대로부터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 중 하나로 간주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아테나이인의 정치체제』는 본격적으로 학문적 입장에서 정치체제를 다룬 ‘정치체제론’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고대에 이런 종류의 저작은 아주 드물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언급된 “기록 수집된 여러 국가의 정치 제도들”이 플라톤의 『법률』이라고 생각한다면, 이 책은 그러한 ‘현실적 정치체제’를 둘러싼 선행 연구라고 생각할 수 있다. 적어도 실증적인 연구라는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분야를 미개척 분야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 때문에 이 책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지도’ 아래 편찬된 ‘158개의 헬라스 정치 제도들’에 관한 저술 중 하나로 평가할 수 있다.
단편으로만 확인되던 고대의 텍스트
1400년 이후 거의 온전한 모습으로 ‘발견’되다!
이 책을 비롯한 158개의 정치체제를 논한 작품은 이후 여러 곳으로 파편적으로 흩어져 버렸다. 그럼에도 고대의 저작 여기저기에 많은 인용으로 남았으며, 그중 68개국의 223편에 달하는 인용 단편은 로제(V. Rose)가 편찬한 『아리스토텔레스 저작 단편집』에 수록되어 있다. 그 가운데 이 책으로부터의 인용으로 여겨지는 「단편」은 91편에 이르지만, 19세기 말까지만 해도 고대 문헌 학자들은, 이러한 몇 개의 「단편」에 의지해서 이 책의 전체 모습을 추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1879년에 이집트 파이윰(Fayum)에서 하나의 파피루스가 우연히 발견되었다. 이 파피루스가 베를린 국립이집트박물관에 의해 취득되고, 다음 해에 공표된 사본이 『아테나이인의 정치체제』의 일부임을 밝혔던 사람은 베르크(T. Bergk)였다. 하지만 이 베를린 파피루스(P. Berol. 5009)는 불과 두 장으로 앞뒷면에 쓰인 것이 전부여서, 책의 전체 모습을 보여 주기에는 너무 단편적이었다.
그런데 불과 몇 년이 지나지 않아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1891년 1월 19일자 영국 일간 신문 「타임스」는 최근 이집트에서 대영박물관이 입수한 파피루스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아테나이인의 정치체제』 사본이 발견됐다고 보도했다. “런던 파피루스”라고 불리는 이 사본(P. Lond. 131)의 발견으로 단편으로만 알 수 있었던 이 책의 텍스트가 놀랍게도 대부분 온전한 모습으로 1400년이란 시간을 건너뛰어 우리 눈앞에 나타나게 된 것이다. “어딘가에 남아 있을지도 모르는 그 어떤 텍스트가 발견되지 않는 한!”이란 말이 현실에서 실현된 셈이다.
아테나이 민주정의 성립과 제도 운용이
실증적 연구를 바탕으로 속속들이 기록되어 있는 책
고대 헬라스 역사 연구의 필수 사료!
이 책의 제목 속 ‘정치체제’(politeia)는 ‘시민의 권리, 시민권’, ‘시민의 공적인 삶과 정치가의 일로서 정부와 행정’을 의미한다. 한마디로 ‘국가의 공적인 제도와 조건’을 말한다. 오늘날로 치면 한 나라의 공적 질서와 행정, 시민의 권리, 사법제도, 통치 구조 전반을 규정한 ‘헌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정치제제의 질서’를 파괴하는 내란(內亂)을 기도하거나 일으키는 경우, 또 공적 질서를 해치는 정해진 법률을 위반하게 되면 사형을 당하는 예가 이 책에도 여러 번 나온다. 그때나 지금이나, 정치체제를 파괴하거나 헌정(憲政) 질서를 어지럽히면 최고형에 처하는 점은 변함이 없다.
『아테나이인의 정치체제』라는 작은 작품이 고대 헬라스 역사 연구에 미친 영향은 매우 크다. 19세기 말에 ‘런던 사본’이 발견된 것을 기점으로 해서 아테나이 역사뿐 아니라 헬라스 정치체제 전반의 연구가 크게 변모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특히 아테나이 민주정의 성립과 그 제도 운용의 실제를 극명하게 기록한 이 책은 다른 사료로부터는 얻을 수 없는 귀중한 자료를 제공한다.
야코비(F. Jacoby)에 따르면, 고대의 정치체제론(politeia)에는 세 종류가 있다. 하나는 체제비판이나 정치개혁의 선전을 목적으로 쓰인 정치적 정치체제론이고, 다른 하나는 이상 국가를 논한 철학적 정치체제 이론으로 플라톤의 『국가』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을 들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이 기존의 정치체제를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서술한 학문적 정치체제론이다. 그러한 구체적·현실적 경험의 바탕 위에서 쓰인 책이 바로 이 책 『아테나이인의 정치체제』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남긴 유일한 헌법서
오늘날 민주주의의 병리를 묻는다!
『아테나이인의 정치체제』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남긴 유일한 헌정사(憲政史)이다. 고대 아테네 170여 년의 정치 변천을 기록한 이 작품은 단순한 역사 기술서가 아니다. 권력의 재편, 제도의 전환, 그리고 시민이 정치에서 이탈할 때 벌어지는 일을 집요하게 추적한다. 즉 아리스토텔레스 정치철학의 실제 적용례이자 민주주의가 제도의 형식을 갖추었을 때조차 어떻게 쉽게 변질될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생생한 사례이다. 선동, 족벌화, 책임 회피, 무관심 등 고대 아테나이의 정치는 오늘날 우리의 거울처럼 읽힌다. 이번 출간은 단지 고전의 복원에 그치지 않는다. 정치적 냉소와 제도적 피로에 깊이 잠긴 현재의 한국 사회에서 이 책은 시민이 스스로를 통치자이자 책임자로 여겼던 시기의 기억을 불러낸다.
“정치는 누구의 것인가?”
“제도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아리스토텔레스는 대답하지 않는다. 다만
사라지고 무너진 체제의 내부를 보여 줌으로써
독자 스스로 묻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