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사회학의 창시자 찰스 틸리가 전하는,
‘왜’라는 말에 담긴 사회적 상호작용의 구조
우리는 매일매일 누군가의 말을 듣고 또 전하며 살아갑니다. 일상적 대화부터 복잡한 정치 논쟁까지, 일상과 사회 곳곳에 수많은 말과 대화가 존재하지요. 그런 면에서 우리가 나누는 말을 자세히 살펴보면 다양한 관계의 사회적 단면이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왜의 쓸모』는 우리 대화에 가득한 ‘이유’에 주목한 책입니다. 이유를 댄다고 하니, 특정 현상의 원인을 제시하는 상황이 먼저 떠오르시나요? 이 책의 저자 찰스 틸리는 꼭 원인을 탐구하는 것 말고도 모든 대화에는 수많은 ‘이유 주고받기’가 담겼다고 분석했습니다. “곤경에서 벗어나려 할 때, 서로를 판단할 때, 응급 상황에 직면했을 때” 사람들은 서로 이유를 주고받으며 “공동의 이해”를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사람들이 어떤 방식으로 이유를 제시하는지 살피면 대화가 이루어지는 사회적 관계의 토대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우리나라에는 비교적 알려져 있지 않지만 저자 찰스 틸리는 ‘21세기 사회학의 창시자’라는 평을 받는 권위 있는 사회학자입니다. 주로 혁명, 민주화, 테러리즘 등 다양한 정치과정의 원인을 연구해 왔습니다. 복잡한 사회현상의 ‘이유’를 거시적인 차원에서 연구해 온 셈이지요. 연구를 거듭하던 중 틸리는 소수 유력자들의 의도적인 결정에만 주목하면 정치·사회 현상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대부분의 사회적 과정은 소수의 결정보다는 많은 이들이 나누는 ‘치열한 대화’로 이루어진다는 것이지요. 틸리가 보기에 바로 그 대화의 핵심에는 사람들이 주고받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말년에 이른 이 완숙한 사회학자가 『왜의 쓸모』를 통해 사람들이 대화에서 ‘이유를 대는 이유’를 분석해 사회적 상호작용의 구조를 탐구한 것이고요.
누군가가 이유를 대는 이유를 알면
사회, 관계, 대화 뒷면에 숨겨진 진실이 보인다
그렇다면 대화에는 어떤 이유가 숨어 있고 또 이유를 제시하는 방식은 어떻게 나누어질까요? 틸리는 화자와 청자의 관계에 따라 변화하는 이유 제시 유형을 분석하며 그 유형을 관습, 이야기, 코드, 학술적 논고로 분류했습니다. 같은 상황이라도 관계에 따라 이유를 제시하는 유형이 달라지고 각 유형에 따라 달라지는 이유를 살피면 그 관계가 드러납니다. 이를테면 의사가 환자에게 병의 이유를 설명할 때와 동료 의사에게 전달할 때, 그 방식이 같을 수는 없겠지요.
간단히 예를 들어볼까요? 누군가가 다른 사람의 책을 책상에서 떨어트렸을 때 가능한 반응을 상상해 봅시다. 1. 내가 좀 덜렁거리는 성격인가 봐. 2. 미안해, 내가 어제 잠을 좀 못 잤어. 3. 책을 그렇게 두면 교칙 위반이야. 4. 책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물리학적 이유는 말이야…. 예의의 문제를 떠나 여기에 완벽하게 올바른 이유는 없다는 것이 틸리의 설명입니다. 적합한 이유는 관계에 따라 달라집니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라는 ‘관습’적인 이유를 통해 우리는 이미 유지 중인 사회적 관계를 확증하고, 인과 관계를 포함한 ‘이야기’를 통해 더 정확한 이유를 설명합니다. 공식적인 상황이라면 특정한 판단 규칙에 기대는 ‘코드’를 사용하고, 아주 전문적인 관점의 분석이 필요한 경우 ‘학술적인 논고’를 제시하지요. 각 유형의 이유 제시가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지를 보면 화자와 청자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는 것이 이 책의 핵심입니다.
“사람들이 당신에게 제시하는 이유는 당신과의 관계에 대한 그들의 접근 방식”이 반영된다는 것이지요. 결국 ‘이유 제시’는 화자와 청자의 관계를 반영하고, 수립하고, 복구하며, 협상하는 도구입니다. 일상을 살아가며 끊임없이 이유를 주고받는 우리에게, ‘왜’라는 말 뒤에 숨은 ‘이유’를 정확히 돌아보면 우리 주변 관계의 사회적 맥락이 분명 새롭게 읽힐 거예요. ‘이유’라는 프레임을 통해 사회적 관계의 맥을 면밀히 살피고자 하는 분들에게 이 책을 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