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때 지나
노부부가 곰탕집으로 들어선다
할아버지가
햇살 드는 창가 쪽 테이블로 가더니
의자를 빼주자 할머니가 당연하다는 듯 앉는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곰탕이 나오고
할아버지는 곰탕을 뜨면서도 연신 할머니를 바라본다
먼저 수저를 놓은 할아버지가
할머니의 곰탕 뚝배기를 두 손으로 기울이자
이번에도 당연하다는 듯 할머니는 마지막 국물까지 퍼 드신다
할아버지가 평생 받아온 기울임을
이제 되돌려 주는 모양이다
곰탕 그릇을 깨끗이 비우고
노부부가 손잡고 곰탕집을 나간다
사람 人字다
- 「人」 전문
이 시의 주인공인 “노부부”는 연령이나 계층으로 볼 때 변두리의 존재이다. 때 늦은 점심 식사를 위해 “곰탕집”에 들어서는 모습은 “노부부”의 그러한 위상을 암시해 준다. 하지만 이들이 연출하는 풍경은 포근하고 따뜻하다. 우선 식사를 위한 장소인 “햇빛이 잘 드는 창가 쪽 테이블”이 그렇다. “할머니”를 위해 “의자를 빼” 주는 “할아버지”의 행동도 그러한 풍경과 잘 어우러진다. “할머니”가 “당연하다는 듯 앉는다”라는 것은 그러한 행동이 오랫동안 이어온 배려의 습관임을 알 수 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곰탕”이 나오고 “연신 할머니를 바라보”는 “할아버지”의 행동도 포근하고 아름답다. 더욱이 “할머니”가 “마지막 국물까지 퍼 드시”도록 “곰탕 뚝배기를 두 손으로 기울이”는 “할아버지”의 모습은 배려과 사랑의 극치를 보여준다. 거룩한 성사와도 같은 점심 식사 후 “노부부가 손잡고 곰탕집을 나”서는 모습은 평화롭고 아름답다. 시인이 이러한 모습을 보고 “사람 人 字다”라고 한 것은 “노부부”의 모습에서 인간의 본질적 속성을 발견한 것이다. “人”이라는 한자가 인간과 인간이 서로를 지탱하는 형상에서 왔듯이, 인간은 서로를 배려하면서 더불어 살아갈 때 아름답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이 따뜻하고 아름다운, 그리고 의미심장한 시적 풍경을 만든 시인의 연출 솜씨가 범상치 않다.
노부부의 일상에서 함께 살아가는 삶의 지혜를 발견한 시인은, 이제 우리 사회의 변두리에서 살아가는 가난한 노인으로 시선을 옮긴다. 이 시선에는 가난하고 고달픈 삶을 살아가는 노인을 향한 연민의 마음이 담겨 있다.
벙거지 모자를 푹 눌러쓴 노인이
생의 마지막 자존심처럼 접혀진 박스를 차곡차곡 펴
리어카에 싣고 언덕을 오른다
숨을 몰아쉬는 리어카의 굵은 바퀴 자국이
노인의 이마에 패인 주름살처럼 깊다
도심 뒷골목의 분주함이
가난한 슬픔으로 조각조각 부서져
그 가난을 주우려 온종일 두 바퀴에 매달려 가는 노인
리어카가 무거워지면 마음이 가벼워지고
리어카가 가벼워지면 마음이 무거워지는
저녁때가 한참 지난 시간
어두컴컴한 골목에서 어둠보다 더 짙은 어둠이 웅크리고 앉아
컵라면에 물을 붓는다
리어카에는
호된 오늘이 착착 접혀 실려 있고
노인은 컵라면의 마지막 국물을 들이켜고 있다
- 「컵라면」 전문
이 시에 등장하는 “노인”은 종이 “박스”를 모아 생활하고 있다. “박스”를 실은 “리어카”를 끌고 “언덕을 오르”는 “노인”의 모습은 현재 그가 처한 생활이 얼마나 곤궁한지를 암시해 준다. 또한, 짐을 실은 “리어카의 굵은 바퀴 자국”을 “노인의 이마에 패인 주름살”에 비유한 것은, “노인”이 처한 그러한 상황을 자연스럽고도 참신하게 드러내 준다. 무거운 “리어카”를 끌면서, 그 힘겨움에 온갖 인상을 찌푸릴 때마다 “리어커의 붉은 바퀴 자국”처럼 굴곡진 “주름살”이 잡히는 얼굴을 연상한 것이다. 이 “노인”은 아마도 자식들 기르느라 노후 준비를 전혀 하지 못했을 터이다. 자식을 위한 희생 이후에 남은 고독과 가난은 온전히 노인 혼자만의 몫이 되었다. 그리하여 “리어카가 무거워지면 마음이 가벼워지고” 반대로 “리어카가 가벼워지면 마음이 무거워지는” 삶을 살 수밖에 없다. “저녁때가 한참 지난 시간”이 되어서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는 “노인”은 작고 초라하다. 시인은 이처럼 “어둠보다 더 짙은 어둠”처럼 “웅크리고 앉아”서 “컵라면”을 먹고 있는 “노인”에게 연민과 공감의 시선을 보낸다. 그 시선은 “노인”의 피곤한 몸을 녹여주는 “컵라면” 국물보다 따뜻하다.
노인의 소외는 물질적인 데서만 오는 것이 아니다. 인간관계에서의 소외 역시 노인의 삶을 피폐하게 만든다. 인간은 늙어가면서 세상의 중심에서 멀어지면서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소외된다. 인간은 본래 “뫼비우스 띠 같은 인연 속으로 들어가/ 가볍게 야위어지”(「간이역」 부분)는 존재이다. 시인이 이런 현상에 주목하는 이유는 인간 존재의 본질을 회복하고 진정한 관계의 가능성을 모색하기 위한 것이다.
한 할머니가 유모차를 밀며 가고 있어 슬쩍 들여다보니 몹시 마르고 어딘지 불편해 보이는 반려견 한 마리 보인다 산책을 나선 모양인데 반려견은 물기 마른 코를 연신 벌름거리고 할머니는 마치 손자라도 태운 듯 가뿐가뿐하다 할머니의 걸음도 약간 절룩였지만 그 걸음이 안단테보다 모데라토에 가까웠다 반려견이 유모차 밖으로 목을 내밀자 어디선가 다리 불편한 할머니가 늙은 강아지를 태우고 가네 라는 소리가 유모차 바퀴에 부딪쳐 같이 구른다 그러거나 말거나 할머니가 유모차를 열심히 밀고 간다
갓난아기를 태운 신형 유모차 하나 옆으로 빠르게 지나가고
- 「충전」 전문
이 시의 “할머니”는 “반려견”을 “유모차”에 싣고 “산책”하고 있다. “반려견”은 마치 늙은 “할머니”의 모습과 흡사하다. “할머니”는 “약간 절룩”거리는 걸음걸이로 걷고 있고, “유모차” 안에는 “몹시 마르고 어딘지 불편해 보이는 반려견”이 있다. 그런데 “할머니는 마치 손자라도 태운 듯 가뿐가뿐하다”. 주변 사람들이 “다리 불편한 할머니가 늙은 강아지를 태우고 가네”라고 비아냥거려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러거나 말거나 유모차를 열심히 밀고 간다”. 시인은 이 광경에 대해 어떠한 논평도 하지 않는다. 그저 “할머니”의 “유모차” 곁을 스쳐 지나가는 “갓난아기를 태운 신형 유모차”만을 제시한다. 이는 “할머니”에게는 “늙은 강아지”가 “갓난아기”와 다르지 않은 존재라는 점을 암시해 준다. 인간 관계에서 소외된 “할머니”에겐 “늙은 강아지”가 인간 이상의 존재이다. 그리하여 “할머니”는 “늙은 강아지”를 연민하고, 시인은 “할머니”를 연민의 시선으로 응시하는 것이다. 인간과 동물을 넘나드는 따뜻한 연민이 주변적 존재들의 공허한 마음을 “충전”해 주고 있는 광경이다.
연민(Compassion)은 타인의 고통이나 자신의 고통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그 고통을 덜어주고자 하는 마음이다. 심리학적으로도 연민은 단순한 동정(sympathy)과 구별되는 타자에 대한 적극적인 수용 태도를 의미한다. 가령, “군에서 잃은 아들을 보러 매달 온다는 부부”를 위해 “국수 가락보다 더 긴/ 보시”(「보시」 부분)를 하는 봉사자의 마음과 다르지 않으며, “주인 할머니가 내뱉는 욕에서 푹 우려낸 따순 마음 같은 구수함이 느껴졌다 이 진한 욕이 있는 한 이 식당은 주인 할머니가 왕이겠고 욕도 때론 정이 되겠구나”(「욕쟁이 할머니」 전문)라고 할 때의 “할머니”의 마음도 비슷하다. “오늘밤 당신에게 막걸리 한 잔 따르고 싶”(「삼강주막」 부분)은 마음도 마찬가지다. 이 시집에 자주 등장하는 이러한 연민의 마음은 공감과 동일시의 시심을 실천하는 일과 맞닿는다고 할 수 있다. 이렇듯 김길중의 시는 세상의 주류에서 소외된 존재들을 위한 따뜻한 연민과 공감을 통해 이기적이고 삭막한 현대 사회에 따뜻한 온기를 불어넣어 주는 역할을 한다.
아내가
된장찌개를 끓인다
뚝배기에 된장, 무, 파, 두부, 버섯과 갖은 양념을 해 끓여내는 아내의 된장찌개 맛이 어느 날은 짜고 어느 날은 싱겁다
간에 대해 무뎌진 건지
그날그날의 기분에 따라 간이 달라지는 건지
신혼 초
식탁 위 사소한 다툼도
한 세월 지나오며 우리를 숙성시켜
지금은 우리가 잘 숙성된 된장 맛처럼 깊어진 것 같은데
아내의 입맛은 점점 변하고 있다
오래전부터
음식 맛은 사람 맛이 반이라 했지만
내겐 사람 맛이 전부라서
아내의 간을 따른다
군말 없이
- 「군말 없이」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