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상이나 노스탤지어에 빠지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단아한 품격을 잃지 않는 문체로 써 내려갔다. 식민지 치하에서 태어난 조선 지식인의 심경과 세계관을 생생하게 표현한 것은 물론이고, 한국 문학사에 의미 있는 증언도 기록한, 참으로 흥미로운 책이다. -요모다 이누히코(메이지대학교 비교문화 전공 교수)
★ 이 책을 읽고 한국에 대한 나의 애정이 풋내나는 치기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알고 서글펐다.
(…)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정당성’을 망각한 사람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 -사기사와 메구무(소설가)
나경석과 나혜석 남매를 중심으로 만나고 헤어진 식민지 치하 지식인들
‘역사적 평가대상’ 이전 일상인의 얼굴로 그려지는 그들의 생생한 이야기!
물산장려운동을 주도했던 아버지 나경석은 좌절한 사회주의자이자 화학자였다. 아버지의 누이동생 나혜석은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였다. 아버지의 오랜 친구로 한때 저자에게 영어 과외를 해주던 이는 춘원 이광수였다. 처녀 시절 이야기를 들려줄 때마다 어머니가 먼 곳을 응시하듯 회고한 남자는 소설가 심훈이었다.
원로 영문학자 나영균의 책 《일제시대, 우리 가족은》이 21년 만에 새 옷을 입고 세상에 나왔다.
이 책 《일제시대, 우리 가족은》은 일제 강점기 전형적인 한반도 지식인으로 살다간 아버지에 대한 회고록이자 당대 엘리트 가정의 일상을 보여주는 값진 기록물이다. 동시에 거미줄처럼 촘촘히 연결돼 있던 그 시절 정계·문화계 인사들의 면면을 일상 속 개인의 얼굴로 그려낸 보기 드문 성과물이다.
아버지 나경석과 고모 나혜석의 생애를 중심축으로 진행되는 이야기 속에는 우리가 교과서에서 접한 근현대사 속 인물들이 여기저기 등장한다. 아버지의 친구이자 저자의 영어 과외 선생이기도 했던 춘원 이광수, 나혜석의 친구이자 이광수의 아내였던 허영숙, 아버지와 함께 3·1운동을 모의했던 김성수와 송진우, 한때 어머니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소설가 심훈, 아버지의 사회주의 운동 시절 동지인 김사국 김약수 박열, 아버지와 함께 병실에서 만났던 신익희와 저자의 집에서 미군 장교들과 어울려 춤추던 거물 간첩 이강국의 애인 김수임, 고모부였던 김우영과 대학 시절 저자의 은사였던 박마리아….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만큼 다양한 인물들이 ‘역사적 평가 대상’ 이전의 지극히 개인적인 표정으로 이 책 곳곳에 출몰한다.
수원 나부잣집 아들,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다
저자 나영균의 아버지 나경석은 어떤 인물인가. 3·1운동 직후 작성된 조선총독부 신상조사서에는 ‘강도·살인미수, 보안법 위반’이라는 악의적인 죄목 아래 ‘고려공산당 소속의 공산주의자로 치열한 배일사상을 소유하며 그 고취에 노력 중’이라고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딸이 기억하는 아버지는 자애롭고 담담한 사람이었다. 청년 시절 일본 경찰에게 쫓기거나 미행당하던 경험을 들려줄 때조차 원한이나 적개심을 드러내지 않은 채 매우 유머러스하게 때로는 해학적인 어투로 이야기했다.
나경석은 수원 나부잣집의 아들로 태어났다. 지역 토호였던 할아버지 나기정은 한일강제병합이 있던 해인 1910년, 이제 막 스무 살이 된 아들 나경석을 일본으로 유학 보낸다. 부유한 집안이거나 전통적인 양반 가문에서 태어난 식민지 청년들이 비슷한 길을 떠났지만, 그것은 다른 의미에서 험난한 인생행로의 시작을 의미했다. 당대 많은 유학생 청년들과 마찬가지로 나경석은 도쿄에서 사회주의 사상에 깊이 빠져들었다. 특히 일본의 무정부주의자로 이름이 높았던 오스기 사카에大杉榮를 만나면서 그의 사상에 심취한다.
교과서 밖으로 나온 사람들의 이야기.
경험자의 목소리로 들려주는 ‘그때 그곳’ 사람들의 목소리
책은 나경석이 남긴 글과 당대 역사 자료, 저자인 나영균이 보고 듣고 기억하는 시대 상황이 맞물리며 정밀하고 생생한 풍경을 만들어낸다.
유학생 시절 생디칼리슴적 사회주의 혁명을 꿈꾸던 아버지 나경석이 조국으로 돌아와 ‘변절자’라는 비난을 감수하면서까지 물산장려운동을 주도하고 좌절하게 되는 과정, 천부의 예술적 감성을 지녔지만 파란 많은 삶을 이어간 나혜석의 예술세계와 저자가 직접 본 고모의 모습, 황해도 명사십리에서 처음 만난 이후 저자에게 영어 과외를 해주기도 했던 춘원 이광수와 그를 볼 때마다 느끼던 이상한 감정, 이기붕의 아내이자 이화여대 부총장으로 있던 박마리아의 숨겨진 가족사 등을 저자 나영균은 담백하고 쓸쓸한 어조로 이야기한다.
여기에 저자가 어린 시절을 보낸 1930년대 만주 봉천의 풍경과 경기고녀에 입학하기 위해 돌아온 1940년대 초 서울의 삶. 태평양전쟁 시기 일제의 한반도 수탈 행태, 해방공간에서 6ㆍ25로 이어지는 숨 가쁜 현대사를 저자 나영균은 정직하고 세밀하게 복원해낸다.
과거를 솔직한 눈으로 되돌아볼 때 거기에 오버랩되는 것은 지금 이곳 우리의 초상이다. 사람은 자화상을 그릴 대 자신을 이상화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상적인 자화상은 현재의 처신이나 장래를 설계하는 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으며 오히려 해로울 수가 있다. -‘저자 서문’ 중에서
역사가 한 사람 한 사람이 걸어간 삶의 집적물이라면, 이 책 《일제시대, 우리 가족은》은 완전하게 매듭짓지 못한 일제 강점기를 좀 더 냉정하게 평가하는 데 매우 의미 깊고 희귀한 저작이다. 더구나 그때 그 시간이 ‘지금 여기’ 우리의 삶을 굴절시키는 무시 못 할 짐으로 작용하고 있다면 이와 같은 개인사가 이제야 읽힌다는 게 오히려 때늦은 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