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과 존재, 타인의 고통을 묻는
조용한 사유의 SF 소설들
기억은 고통의 형상으로 존재하지만, 그 고통을 신체에 새기지 않으면 나는 더 이상 내가 아니다. 자신의 삶이 기록한 서사의 책임을 기꺼이 감내하는 주인공들. 기억은 조작이 가능하고, 얼마든지 과거의 내가 아닌 채로 다시 살 수 있지만, 차마 그 생을 선택하지는 못하는 이들의 영혼을 작가 이준희는 가만히 위로한다.
평행우주를 유영하는 마음들,
조용한 혁명처럼 다가오는 이야기들
장르로서의 SF가 아니라, 인식의 전환을 가능하게 하는 하나의 문학적 감각으로서 SF를 다룬 이 소설들은 현실과 비현실, 과학과 감정, 세계와 개인의 경계를 부드럽게 넘나든다. 아무렇지 않게 흘러가던 일상 속에 한순간, 미세한 충돌처럼 개입하는 다른 차원의 가능성. 기억을 지우는 시술을 받으려는 사람들, 심해 도시에서 태어난 최초의 아이, 평행우주를 넘나드는 고양이, 시간을 조작하는 기술들. 이 모든 낯선 요소들을 이준희는 아주 조용하게, 그러나 설득력 있게 배치한다. 이 책은 ‘마음의 소설’에 가깝다. 세계가 무너질 때, 끝까지 남는 건 결국 사람이라는 진실을 되새기게 한다. 그 모든 평행우주에도 여전히 고양이 한 마리가 조용히 몸을 웅크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아름답고 이상한 상상을 가능하게 만드는 소설집이다.
세상의 존재들에게 안부를 묻는 마음
인간의 의식은 실제보다 뒤처진다는 내용의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인간은 무수히 많은 감각 신호 중 일부만 받아들일 뿐이며, 그것도 약 1/3초가 지난 뒤에야 의식한다고. 우리가 현재라고 의식하는 세계는, 사실 1/3초 늦은 세계인 셈이다. 또 하나. 인간은 50밀리 초(0.05초) 이하로 제시되는 자극에는 반응하지 못한다고 한다. 100밀리 초(0.1초) 이상은 제시되어야 반응할 수 있다고. 분명 존재함에도 우리가 의식조차 하지 못하는 자극들, 실제와 의식 사이에 놓인 1/3초 지연된 세계 같은 것들. 늘 이런 세계가 궁금했고, 끌렸다. 보통의 감각과 언어로는 놓칠 수밖에 없는, 그래서 가능성으로 존재해야만 더욱 선명해지는 세계. 이 책에 실린 여섯 편의 소설은 그 가능성의 세계에 사는 존재들에게 안부를 묻는 마음으로 쓴 것이다. _작가의 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