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토리아 아멜리나는 2022년 러시아가 전면전을 일으키자 전쟁범죄 조사원이 되기로 한다. 그녀는 비정부기구 트루스하운드에서 전쟁범죄 조사를 위한 훈련을 받은 뒤 생존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익숙하게 써왔던 소설 대신 전쟁범죄 조사보고서를 작성하기 시작한다. ‘피해자와 영웅뿐 아니라 살인자도 이름을 갖게 하기 위해서’였다. 민간인을 상대로 잔악한 범죄를 저지르는 살인자들을 법정에 세우기 위해서.
하지만 전쟁터에서도 그녀는 작가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는다. 소설보다 극적인 현실을 기록할 방법을 모색하던 그녀는 전쟁일기를 쓰기로 한다. 그녀의 일기에는 각자의 방식으로 러시아의 폭압에 맞서는 전쟁 속 우크라이나 여성들과, 전쟁범죄를 조사하는 작가 본인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저명한 인권변호사였지만 군에 자원입대해서 드론 조종사가 된 예우헤니아 자크레우스카, 2014년 크림반도 침공 당시 러시아군에 납치되어 고문당했지만 2022년 예순의 나이로 의무부대에 입대한 이리나 도우한, 십 년간 전쟁범죄를 조사했지만 그보다 시급한 지뢰 제거에 헌신하기로 결심한 [콜사인] 카사노바, 문학관의 아카이브를 피난시키기 위해 난민 열차의 화물칸에서 야간 보초를 서는 테탸나 필립추크, 우크라이나 아이들의 강제이송과 러시아 가정으로의 입양을 장려하는 러시아 관영 언론의 프로파간다를 추적하는 변호사 카테리아 라셰우스카를 비롯한 수많은 여성들의 이야기가 작가의 전쟁일기에 담겨 있다.
“이 책은 그녀의 목소리다.
생생하고 생기 넘치는 목소리로 그녀가 지금 우리에게 말을 걸고 있다.”
- 마거릿 애트우드 (서문)
전면전의 발발 직후, 빅토리아 아멜리나는 점령지에 갇혀 있던 동화작가 볼로디미르 바쿨렌코의 부고를 듣게 된다. 그녀는 동료 작가가 아니라 전쟁범죄 조사원으로 그의 집을 찾고, 그가 납치되기 하루 전 정원에 묻어 놓은 일기를 발견한다.
작가는 소련과 러시아의 압제로 숨진 우크라이나 예술가들과 그 죽음의 역사를 전쟁일기에 기록한다. 1937년 스탈린의 대공포 시대에 민족 예술을 수호하려던 우크라이나 예술가 289명이 산다르모흐숲에서 집단 처형된 바 있고, 같은 이유로 1960년대 우크라이나의 저항 예술가들도 집단 숙청을 당했다. 작가는 러시아군에 납치되어 고문당하고 살해된 볼로디미르 바쿨렌코의 죽음을 이와 같은 역사의 연장선상에 놓는다. 우크라이나 예술가들을 고문하고 살해하는 러시아의 범죄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로부터 1년 뒤 러시아의 미사일 공격으로 사망한 그녀 역시 백 년 넘게 이어진 죽음의 계보를 잇고 만다.
“저널리스트의 예리함과 타고난 작가의 예술성으로 잊히지 않는 전쟁의 상흔을 생생하게 담아냈다.”
- 킴 대록, 2025년 오웰상 (에세이 부문) 심사위원장
빅토리아 아멜리나의 전쟁일기에는 굵직한 뉴스 헤드라인에서 볼 수 없는 민간인을 향한 공격과 폭력, 고문과 협박, 아동 납치와 집단 학살의 참상이 담겨 있다. 그렇지만 작가는 고문과 학살을 일삼는 악인들의 서사를 글의 중심에 놓지 않는다. 그녀가 위험천만한 전쟁터를 누비고 다닌 것은 평범하지만 동시에 영웅적인 면모를 지닌 전쟁 속 여성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서였다.
작가는 전쟁 중에도 ‘결국 어떤 인간으로 남을 것인가’를 고민했다. 시동이 꺼지는 낡은 승합차로 시민들을 대피시키고, 전쟁범죄 생존자들의 이야기를 기록하며, 목숨 걸고 지뢰를 제거하는 우크라이나 여성들의 이야기는 포탄이 떨어지는 전쟁터에서도 인간이란 원래 어떤 존재이며, 어떤 존재로 남아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