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고, 지나친 음주는 간경화나 간암을 일으키며, 운전이나 작업 중 사고 발생률을 높입니다.”
술병을 집어 들기만 하면 쉽게 찾을 수 있는 이런 무시무시한 경고가 무색하게, 우리네 인생에서 술이란 도무지 빠질 줄 모르는 별미와 같다. 우리는 축하할 일이 있을 때도 서로 술잔을 기울이고, 슬프고 외로워 위안을 찾아야 하는 순간에도 마음이 빈 자리에 술을 부어 채워 넣는다. 그리하여 『취선』은 젊음과 술, 낭만과 방황에 집중해 ‘술 취한 배처럼 비틀거리는 청춘’을 싣고 출항한다. ‘취선’의 선장인 작가 장혜영은 이렇게 남겼다.
“술은 자고로 젊음과 손잡고 나란히 인생의 파란만장한 노정을 함께 걸어가는 동행자이자 벗이다. 술은 삶의 가녀린 속살을 태풍처럼 무자비하게 유린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청춘을 사업에 취하고 사랑에 취하고 이상에 취하도록 휘몰아친다. 그 소용돌이 속에서 청춘은 흔들리고 비틀거리고 실수하면서 주기酒氣 하나로 인생의 역경을 극복하고 버텨나간다.”
“원래 청춘의 배는 술을 타고 흘러가는 거야.
그래서 이리저리 비틀거리겠지.”
“나한테 내일은 없어요. 오늘 하루뿐이에요.”
활달하고 호기 넘치는 성격에, 쓸데없는 고민은 딱 질색인 ‘배선주’에게 인생이란 ‘되면 하고, 아니면 마는’ 거친 물결이다. 태어나는 것도 뜻이 아니었는데, 어디 사는 것은 뜻대로 되겠느냐는 그는 풍파를 헤치고 이겨내는 대신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파도가 치면 치느 대로 순응하며 나아가기를 택한다. 삶이 무엇인지,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 하는지 고민한다고 어디 그럴싸한 답이 나오기나 하던가. 외면하려고 할수록 불쑥 고개를 내미는 내면의 외로움도, 매일 밤 찾아드는 어둠 사이에 숨 죽이고 도사리는 내일에 대한 불안도 그저 한 잔 술에 털어 넣고 다시 오늘을 살아가면 그뿐인 배선주에게 술은 친구이자, 위안이며, 오늘을 살아갈 원동력이다.
“난 오늘이 싫어요. 싫으니까, 술로 영혼을 취하게 하려고요.”
인생이라는 망망대해 위에서 갈피를 잃고 ‘고독의 향연’에 휩쓸려 갈 뿐인 시나리오 작가 ‘조난선’은 그야말로 닻도 없이 떠다니는 길 잃은 배 한 척이다. 태어난 게 아니라 ‘낳아진’ 채 아무것도 달라지는 게 없는 삶을 살아가는 그에게 있어 재미라고는 별것도 아닌 것에 ‘두더지처럼’ 천착하며 고심하는 것 정도가 전부다. 그에게는 먹고 자는 일상도, 게임도, 시나리오를 쓰는 일도, 섹스조차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리하여 하루하루 ‘오늘’을 죽이며 살아가는 조난선은 속절없고 갈데없는 오늘을 지우기 위해 술을 마신다.
“인생은 운명이지 의지가 아니야. 모든 건 이미 다 결정돼 있어.”
거리 어디에나 울려 퍼지는 시끄러운 아이돌 댄스 음악도 별로고, 그렇다고 고풍스럽고 우아한 클래식 선율도 취향은 아닌 미적지근한 입맛의 소유자 조연출 ‘설계영’에게 인생은 그저 시시한 ‘운명’에 지나지 않는다. 어차피 “신경을 꺼도 알아서 살아지”는 것이 삶이니, 저 높으신 분이 설계하신 것을 그저 받아들이면 그만이라는 그로서는 연애나 결혼도 자연히 시시하고 불필요한 놀음으로 느껴질 뿐이다. 하지만 ‘운명의 장난’이라는 말이 괜히 있던가? 오로지 드라마 연출만이 치밀한 계획 아래 멋지게 완성해 나가야 할 한 편의 작품이라고 생각해 왔던 그의 인생에 마치 드라마처럼, 새로운 생명이 찾아온다. 자신의 삶조차 그저 시청자처럼 관망할 뿐인 설계영은, 술 취한 어느 한밤이 불러온 느닷없는 인생의 새로운 막을 과연 어떻게 전개시킬 수 있을까?
“식재료는 육체를 먹여 살리기 위한 것들입니다. 그럼, 마음과 영혼을 위한 음식은 뭘까요?”
‘새파랗게 젊다는 게 한밑천’일 스물여덟, 못 해본 게 없지는 않아도 남들 해볼 만한 것은 다 해보았노라고 자부할 수 있는 드라마 프로듀서 ‘지병환’의 삶에 남은 목표는 ‘성공’뿐이다. ‘성범죄자 남성에게 복수하는 여성 연쇄살인마’를 소재로 한 파격적인 드라마 시나리오 덕분에 이제 겨우 성공한 PD가 되어보나 했더니, 드라마 촬영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에게 5개월 시한부라는 청천벽력 같은 선고가 떨어진다. “내가 죽는단다. 이 세상에서 나만 사라진다고!” 억울하고 분하지만, 그렇다고 울고만 있기에는 지금까지 지켜온 삶의 방식이 무의미해지는 것이 너무 안쓰럽다. 그래서 그는, 인생이 건네는 거친 풍파에 예정된 침몰을 바라보면서, 병든 육신을 고작 며칠 더 연명시키느니 ‘영혼’을 지탱하는 데 집중하며 삶의 피날레를 감독하기 시작한다.
“아가씨는 혹시 드라마 연기 같은 거 할 생각은 없어요?”
군대 간 남자친구를 기다리며 쉬는 날에는 테니스를 치고, 평일에는 학교에 다니며 그야말로 평범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대학생 우한솔은 불현듯 기회처럼 주어진 캐스팅 제안 때문에 인생의 전환을 맞이한다. 젊은이다운 혈기로 덜컥 안방극장 드라마의 ‘연쇄살인마’로 데뷔해 명성과 돈을 얻기는 했지만, 자신이 “드라마 찍기 전이나 찍을 때나 끝난 지금이나 그대로”라고 생각하는 그로서는 “값자기 몸값이 껑충” 뛰어 그만큼의 ‘유명세’를 치를 수밖에 없는 지금의 세상 꼴이 이상하기만 하다. 게다가 한낱 학생을 드라마 여주인공으로 캐스팅해 그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준 지병환이라는 프로듀서가 이미 애인이 있는 그의 마음을 자꾸 싱숭생숭하게 만든다. 평범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었던 걸까? 느닷없이 복잡해진 이 인생의 시나리오 속에서 그는 어떤 표정을 ‘연기’해야 할까?
“그리고 이제부터 네가 가고 싶은 곳으로 맘대로 가도 돼.”
성인이 되기까지 이제 딱 한 걸음 남은 꽃다운 고2. ‘꼰대’들은 열여덟이면 ‘낙엽 굴러가는 것만 봐도 웃을 나이’라는데, 열 살이나 많은 언니는 맨날 ‘쥐방울만 한 년’이라며 무시하기만 하고, 동네 시골뜨기들은 멋진 탤런트가 되고자 과감한 노출 연기까지 감행한 그의 용기를 보고도 ‘돈미새’라고 놀려댈 뿐이니, 마음만 훌쩍 큰 채 ‘아이 이상 어른 미만’인 이 애매모호한 시기를 견뎌야 하는 배선미로서는 내가 인생의 주인인지, 아니면 인생이 나의 주인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하는 기분에 사로잡힌 이 외로운 나날, 배선미는 가라앉기 일보 직전인 위태로운 배 한 척, ‘지병환’을 만나 처음 느끼는 감정에 사로잡힌다. 남들이 아무리 어리다고 낮잡아 본들, 나이가 대수인가. ‘환자’가 아닌 그냥 ‘보통의 한 사람’으로 살고자 하는 지병환의 고독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세상에 나 배선미 하나뿐인데. 자신만의 여정 속에서 길을 잃지 않고 계속 나아갈 힘을 얻기 위해 일찍 어른의 세계를 넘보기 시작한 그는, 과연 취한 채로 비틀거리는 험난한 인생 항해를 무사히 펼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