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해한 삶의 의미를 세련된 문체로 피워올린 찬란한 문학의 장미
로베르트 발저는 『장미』를 자신의 작품 중 가장 세련되고, 가장 무례하고, 가장 젊은 작품이라 말한 바 있다. 이 산문집에서 발저는 그간 최소한 겉으로라도 지키려 했던 문학적 관습과 사회적 터부를 뛰어넘는 거리낌없는 방식으로 새로운 글쓰기를 시도한다. 고향 마을인 빌과 비교할 때 세계 여러 나라들과 국제적인 관계를 맺고 있던 연방 수도 베른의 대도시다운 분위기에서 영향을 받았으리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장미』에 수록된 글들은 대개 두세 쪽 내외의 짧은 산문이다. 이 글들은 뚜렷한 결말이나 극적 반전을 보여주지 않는다. 발저는 명확한 줄거리나 서사를 조탁하기보다 순간의 감각, 사유, 언어의 결을 포착하는 데 집중한다. 산문이라는 형식 자체에 도전하는 그의 과감함이 돋보이는 지점이다. 독자에게 난해함으로 다가올 수 있는 이러한 시도는 무의미 속의 의미, 사소함 속의 아름다움을 순도 높게 담아내고자 했던 의지의 발현으로 볼 수 있다.
그의 산문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부분 눈에 띄지 않는 서민적인 인물이지만 현실성과 구체성을 가진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들은 살과 피를 가진 인물이라기보다는 작가의 문학적 지식과 자유로운 환상 속에서 만들어진 추상적이고 뼈대만 갖춘 인물들이다. 확고한 정체성이 없는 이 인물들은 처음에 한 말을 다음 순간 바로 번복하며, 스스로 모순되고 이율배반적인 존재처럼 행동한다. 그들은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할 수 없고, 너무 그리워하기 때문에 더이상 그리워하지 않는다고 고백한다.
우스꽝스럽고 모순으로 가득찬 이 인물들이 처한 상황 또한 지극히 미미하고 일상적이다. 거리 위에 무수한 사람들 사이에서 눈에 띄지 않는, 어쩌면 작가의 자화상과도 같은 보통의 인물들. 그들은 평범하게 여행을 하고, 차를 마시고, 대화를 나눈다. 아이러니한 것은 존재의 의미가 미미해 보이는 이들이야말로 실은 가장 무고하고 가장 정직한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그들은 곧잘 병든 상태, 열과 환상에 들뜬 상태에 처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누구보다 사심 없고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건강하다. 바로 이 인물들이야말로 놀랍게도 현대적인 인물의 속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사소한 일상에서 발견해낸 아름다움과 덧없음
로베르트 발저는 현실 세계와 인물들이 처한 특별한 의미 없는, 우연적인 상황들의 수집과 나열 속에서 이 같은 ‘사건 없음’ 혹은 ‘줄거리 없음’을 섬세한 언어유희로 대체한다. 많은 글들이 일상의 평범한 장면에서 시작되지만, 미세한 균열을 일으키는 단 하나의 문장만으로 새로운 세계를 열어젖힌다. 작가는 수시로 직접 나타나 목소리를 내며, 독자들에게 넌지시 혹은 직접 말을 걸고 의중을 떠보기도 한다. 이후 그 전설적인 ‘마이크로그램’ 원고에서 더 극단적으로 드러나는 언어유희적 현상들은 그가 이른바 ‘서사’가 지녀야 할 구성 요소인 줄거리 혹은 플롯을 이미 오래전에 해체했음을 말해준다. 이 문장들은 말보다 침묵, 진술보다 여백, 설명보다 감각을 추구한다. 그것은 사라지려는 존재가 남긴 마지막 흔적을 닮았다. ‘산책자’ 로베르트 발저는 그렇게 한 걸음 한 걸음 자신을 점점 지워나간다.
우리는 이 산문들에서 어떠한 종류의 확실한 메시지를 찾아내지 못할지도 모른다. 대신 조용히 사라지려는 존재가 남기는 언어의 흔적을, 그리고 작고 사소한 존재들이 지닌 아름다움을 마주하게 된다. 로베르트 발저는 가장 사소한 것에 가장 깊은 관심을 기울였고, 작은 것만이 위대해질 수 있다고 믿었다. 이는 단지 어느 고독한 작가의 문학적 실험이 아니라, 지금 우리 시대가 잃어버린 감각을 회복하는 작업이다. 동시에 그것은 위대한 문학적 침묵을 발굴해내는 일이기도 하다. 『장미』는 삶의 아름다움과 덧없음을 깨달은 자의 고요한 울림으로서, 희미해져가는 언어를 찬란하게 피워낸 문학의 장미로서 수많은 독자들에게 오래도록 읽히는 귀한 고전으로 자리잡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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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르트 발저의 책을 수십만, 수백만의 사람이 읽었다면 세상은 보다 나은 곳이 되었을 것이다._헤르만 헤세
발저의 작품에 나타나는 윤리의 핵심은 권력과 지배에 대한 저항이다. 발저의 힘은 고도로 세련된 예술의 힘이다. 그는 진실로 놀라움과 저릿함을 느끼게 하는 작가다._수전 손택
로베르트 발저가 살면서 남긴 흔적은 너무나 희미해서 바람이라도 한 자락 불면 흩어져 사라질 것만 같다. 예나 지금이나 발저는 여전히 유일무이한 수수께끼 같은 인물이다. 그는 독자들에게 자기 자신을 가능한 한 숨겼다._W. G. 제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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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저의 인물들은 문학사의 위대한 고전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처럼 단 하나뿐인 독특하고 강력한 개성을 가진 인물들이 아니다. 객관적으로 보자면 이들은 대단히 아름답거나 대단히 지적이지도 않고, 놀라운 통찰력을 갖춘 것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그들의 정체성은 허약하고, 스스로 부인되고, 다른 것과 쉽게 대체될 수 있는 익명의 인물들과 흡사하다. 때로는 어릿광대 같고 때로는 난센스와 모순으로 가득차 보이는 이 인물들이 처한 상황 또한 지극히 미미하고 일상적이다. 그들은 말하자면 역사의 ‘현장’이 아니라 역사의 가장 변두리, ‘가장자리’에 서 있는 것이다. 하지만 바로 이 같은 의미에서 『장미』에 나타나는 인물들은 놀랍게도 현대적 속성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바로 작가 자신의 자화상이자 동시에 오늘날을 살아가는 수많은 익명의 현대인들의 속성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_해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