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0여 년 전 나라의 기틀을 다진
재상의 관직 생활로 오늘날 우리의 정치를 돌아보다!
여말 선초는 그야말로 대격변기였고, 혼돈의 시기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신념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는 자들부터 개인의 출세와 가문의 부흥기로 삼으려는 기회주의자들까지 다양한 부류가 생겨났다. 역사는 이러한 사람들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를 위해 다양한 잣대로 날카로운 분석을 시도해왔으나 한 인물에 대한 평가가 긍정과 부정으로 엇갈리는가 하면, 다양한 평가가 이루어지거나 모호하게 마무리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심지어 정확한 평가는 후세인들에게 맡긴다며 과제를 남겨 놓기도 한다.
‘역사는 어떻게 소비되는가?’의 주제에 관심을 기울이며 교양 강의와 대중 역사서 집필 활동을 활발하게 펼치고 있는 김진섭 작가가 조선 왕조 태조부터 세종 대까지 초기 재상들의 성장과정과 인간관계, 관직 생활과 정책, 정치 성향과 왕과의 관계, 재상으로의 등용과 역사적 평가 등 여러 방면에서 조명한 《왕과 재상》을 펴냈다.
혼란과 격동의 시기였던 조선 초기에는 새로운 국가체제를 신속하게 수립하기 위해 국가 비전을 설계하고 이를 제도로 구체화해야 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재상들은 단순한 명령 집행자가 아니라 정치적 이념과 실리를 놓고 첨예한 갈등과 대립을 벌이기도 했고, 민생을 챙기면서 정치적 명분과 지지기반을 다지는 것에도 신경을 써야 했다. 그리고 건국의 기틀을 세우는 과정에서 유교 이념에 근거한 재상 중심의 정치 실현이나 현실 정치에서 왕권(王權)과 신권(神權)의 균형 등 정치권력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이기도 했고, 때로는 목숨을 걸고 권력투쟁에 나서기도 했다. 반면 장기적인 안목으로 정치와 사회, 문화적으로 ‘조선다움’을 뿌리 내리는 데 관심을 기울인 재상들도 있었다.
이 책에서 다루는 재상의 기준은 고려에서 관직 생활을 시작하여 조선에서 재상으로 등용된 인물로, 그들의 성장과정과 인간관계, 관직 생활과 정책, 정치 성향과 왕과의 관계, 재상으로의 등용과 역사적 평가 등 여러 방면에서 조명했다. 다만 태종과 세종 대의 경우 자료가 부족한 재상들은 제외했고, 세종 대는 맹사성까지를 대상으로 하였다. 그 후에 등용된 재상들은 고려에서의 관직 생활이 2~3년으로 짧은 기간이거나 조선에서 관직 생활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참고로 태조부터 세종 대까지 등용된 재상들의 명단은 별도로 정리해서 첨부해 놓았다.
각양각색 재상들의
활동과 삶을 풀어내다!
1부 ‘태조·정종 대: 창업주와 지원 세력들’에서는 조선 건국 과정에서 이성계를 지원하고 조선의 초대 영의정에 오른 배극렴과 급진 개혁 세력의 지략가로 꼽히고 태조에 이어 태종의 신임을 얻었던 조준, 고려의 고위직 관료 출신이면서 태조와 태종의 가교역할을 한 김사형과 개국공신 1등에 책봉되어 조준과 함께 태조에게 능력을 인정받은 정도전, 한양의 궁실과 종묘 건설의 총괄 등 한양 천도에 참여했으며 가문이 조선의 명문가로 번창한 심덕부, 왕권 강화에 집안이 몰락한 민제와 집안에서 고려와 조선의 재상을 배출한 이서의 활동을 살핀다.
2부 ‘태종 대: 왕권과 신권의 대립과 조화’에서는 태종의 즉위와 왕권 강화를 지원하고 권세를 얻은 하윤과 조선의 초대 서울시장을 맡았던 성석린, 왕실과 사돈 관계를 맺었으나 최초로 유배지에서 생을 마감한 재상이 된 이거이, 군졸로 시작하여 최초로 무인 출신 재상이 된 조영무, 청빈 재상이며 만능 재상으로 능력을 인정받은 권중화와 형제가 조선의 개국에 참여했으며 참모형 관리로 평가받았던 남재 그리고 행정가형 전문 관리였던 이직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그 밖에 5명의 재상에 관한 간략한 정보가 함께 담겼다.
3부 ‘세종 대: 그 왕에 그 신하들’에는 최연소 영의정이자 세종의 외척으로 처형당한 심온과 형제가 조선의 건국 과정에 적극 참여했던 정탁, 마지막까지 태종의 충신으로 남은 박은, 비공신 재상 시대를 연 유정현, 최고령으로 재상에 오른 유관과 최장수 재상을 지낸 황희, 세종의 시대에 가장 적합한 관리로 성장했던 맹사성 등이 주인공이며, 그 밖에도 8명의 재상에 관한 간략한 정보가 실려 있다.
이 책에서는 왕권과 재상들의 관계를 흥미롭게 다루고 있다. 배극렴은 대소신료(大小臣僚)와 한량기로(閑良耆老) 등 전·현직 관리들이 국새를 받들고 이성계의 저택을 찾아가 왕위에 오를 것을 권하기를 이끌었던 반면 “세자를 세우는 의논에 이르러서도 임금의 뜻에 아첨하여 어린 서자를 세울 것을 청하고는 스스로 공으로 삼으니, 학식과 식견이 있는 사람들이 이를 탄식하였다”와 같이 평가받은 재상이었다. 또한 조준은 배극렴과 이성계가 전쟁터에 나갈 때도 가지고 다니면서 ‘전투가 없는 날이면 읽었다’는 《대학연의》를 건네는 등 세자 책봉에서도 이름조차 제대로 거론되지 못하고 밀려난 이방원을 지지했고 태종의 두터운 신임을 얻었다.
성석린의 경우 정치세력을 형성하거나 권력을 행사하는 데 관심이 없어 실세 재상은 아니었으나 조선 왕조의 국가체제와 국왕의 통치 기틀을 다지는 데 공헌했다. 1차 왕자의 난 이후 태종에게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내며 옥새를 가지고 고향 함흥으로 돌아간 태조를 다시 환궁하게 하는 결정적인 역할도 수행하여 왕의 신임을 얻은 외유내강형 재상으로 전한다.
남재는 윗사람의 마음을 읽을 줄 아는 참모형 관리였다. 두 번째 왕자의 난을 겪으며 시간적 여유가 없었던 이방원의 즉위를 위해 대궐의 뜰에 나아가 정종의 결단을 촉구하여 태종을 정치적으로 지원했으며 일찍이 태종의 의도를 읽고 태종과 세종의 정권교체를 돕는 등 태종과 세종의 가교 역할을 했다. 이 외에도 6조의 판서를 두루 거친 황희와 능력은 물론, 청렴결백으로 많은 일화를 남긴 맹사성이 서로 가까웠으며 함께 세종을 지원했다는 점도 주목된다.
관직 생활의 절반을 좌천과 파직 그리고 유배로 보낸 맹사성은 “비록 벼슬이 낮은 사람이 찾아와도 반드시 공복(公服)을 갖추고 대문 밖에 나아가 맞아들여 윗자리에 앉히고, 돌아갈 때에도 공손하게 배웅하여 손님이 말을 탄 뒤에야 방으로 들어왔다”고 할 정도로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예를 갖추어 성심으로 대했다. 이는 그가 ‘권력은 영원한 것도 아니고,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사실을 깨달았음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그가 조선 개국 후에도 끝까지 현실 정치를 외면하지 않았던 이유는 바로 백성이었다. 국가는 바뀌어도 정치의 근간인 백성은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여말 선초의 정치와 재상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는 인물들 간의 관계와 배경을 통해 조선 역사의 이해를 돕는다. 또한 오늘날의 모습과도 연결해볼 수 있다. 이들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계속되고 있으며, 여전히 백성(국민)은 정치의 뿌리이며 가장 두려워해야 할 대상이다. 그렇다면 600여 년 후 오늘날의 정치와 정치인들은 어떤 평가를 받게 될지 책은 다시 묻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