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불행을 훔친 자로서 슬픈 한 시대를 온몸으로 느끼는 시인은, 시 「성 겨울 쪽지」에서 “뒤틀리며 펄럭이는” 쪽지 한 장을 바라보며 이렇게 쓰기도 한다.
나무도 아닌 시멘트 전봇대
세찬 바람에 뒤틀리며 펄럭이는
스카치테이프 손가락 마디만큼 붙은 쪽지
급구 주방 보조
먹고사는 이가 먹고살려는 이를
간절히 찾는다
그나마 매정한 세파는
전봇대마다 뾰족 돌기 판을 씌워
발도 붙이지 못했다
눈 쌓인 응달에 외로이 서서
휘파람은 불지도 못한 채
바람 따라 울면서 펄럭이는
겨울 쪽지
- 「성 겨울 쪽지」 전문
이 짧은 시에서 ‘쪽지’는 존재의 흔적이며, 구조적 폭력의 상징물 앞에서도 끝내 무너지지 않는 작고 단단한 삶의 의지이자 거대한 사랑으로 읽힌다.
“먹고사는 이가 먹고살려는 이를/ 간절히 찾는다”는 구절은 이 쪽지가 단순한 구인 광고가 아니라, 사람을 찾는 쪽지이며, 이름을 호명하려는 시의 본능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그래서 이 쪽지는 곧 펄럭이는 홍대욱의 시 자체다.
바로 그런 점에서 시집 『이름의 벽』이 품은 중심 감정은 멀리 있는 ‘정의’가 아니라, 가까이 있는 ‘이름’이고, 얼굴이며, 응시다. 곧, 삶이다.
홍대욱 시의 정신적 기반에는 김수영이 있다. 시 「고카페인 김수영」에서 그는 자신의 청춘과 감각을 이렇게 증언한다.
아침은 본드, 점심은 각성제, 저녁은 김수영의 거대한 뿌리를 달여 마시고 살았다
정신이 놋주발처럼 쨍쨍 울리고
(…)
김수영, 나의 힘, 나의 레드불, 나의 악마
- 「고카페인 김수영」 부분
이 고백은 단지 오마주가 아니라, 존재론적 영향의 진술이다. 김수영은 시인의 ‘악마’이자 ‘레드불’로서 감정을 일으키는 연료이고, 무자비한 세계를 견딜 수 있게 만든 사유의 근육이다.
시인은 김수영을 “달여 마신다”고까지 표현한다. 그렇게 섭취된 김수영은 다시 홍대욱의 시로 다시 태어난다.
김수영은 “욕망이여 입을 열어라/ 그 속에서 사랑을 발견하겠다”고 썼고 홍대욱은 “그칠 줄 모르는 전쟁의 시대/(…)/ 사랑을 기억하리니”라고 썼다.
너로 들어가는 험한 길
나로 돌아오는 험한 길
그칠 줄 모르는 전쟁의 시대
사람이 죽는다
사랑이 죽는다
살을 헤집고
뼈를 부러뜨리는 너란 강선腔線
탄피는 쩔그렁거리고
나의 등은 피가 터져
세월에 갇힌 글씨가 물드는
이름의 벽
사랑을 기억하리니
- 「이름의 벽」 부분
시인의 등은 피가 터져 세월을 받아내고 그 세월이 벽에 새겨진다. 그 벽은 시인의 몸이며, 동시에 시집의 등뼈이기도 하다. 사랑은 거기서 피처럼 번지고 시가 된다.
홍대욱은 시집 『이름의 벽』에서 사회적 부조리를 바꾸겠다는 선언을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부조리를 ‘뼈저리게 감각하는’ 이의 사랑으로 바꾸는 데는 성공한다.
이 시집의 사랑은 도덕도 정의도 아니다. 그것은 “타인의 불행을 훔치는” 존재가 끝끝내 놓지 않는 감응의 형식이다.
시인은 “사랑을 기억하리니”라고 쓰며, 죽지 않고 살아 있기 위해 시를 쓴다. 그것은 “울지도 못한 채 / 바람 따라 펄럭이는” 겨울 쪽지처럼, 조용하지만 지워지지 않는 한 사람이 벽에 또렷이 새긴 서명 아니고 무엇이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