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유와 평등, 그리고 정의에 대한 헌신
무엇보다 ‘헌법의 정신’에 대한 강력한 옹호
긴즈버그가 진정으로 지키고자 했던 것은 무엇인가?
《진보의 품격》은 총 다섯 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인권과 개인의 자유에 대한 관심의 싹을 틔웠던 청소년 시절의 글부터 ‘위대한 반대자’를 위대하게 만든 그 유명한 반대의견들까지, 긴즈버그의 생애에 맞춰 그의 발자취를 따르고 있다.
1부 ‘유년시절과 소중한 추억들’에서 우리는 긴즈버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만날 수 있다. 특히 세계인권선언이라는 세계사적 사건을 목격한 소회를 학교신문에 기고한 초등학교 시절의 글에서 긴즈버그 특유의 자립심과 강단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엿볼 수 있으며, 대법원에서 긴즈버그와 이념적으로 가장 거리가 멀었던 스칼리아 대법관을 추모하는 글과 그와 함께한 대법원 생활을 회고하는 글에서는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지만 “최선을 다해 정의를 추구한다는 책무”에 있어서는 하나임을 의심하지 않는다는, 타인을 바라보는 그의 신념에 깊은 감화를 받게 된다.
2부 ‘불모지의 개척자들에게 보내는 찬사’에서 긴즈버그는 자신이 밟고 있는 길을 미리 닦아놓은 이들의 공로를 인정하고 감사를 표한다. 미국 최초로 연방대법원에서 구두변론을 했던 벨바 록우드를 조명하는 장에서 독자들은, 국립대학 로스쿨에 입학한 뒤 우수한 학업 성취에도 불구하고 대학으로부터 여성이라는 이유로 학위 수여를 거절당했으며, 우여곡절 끝에 학위를 수여받고도 남성 이외에는 법정에 출입할 수 없다는 연방대법원의 판결로 변호를 할 수 없었던 벨바 록우드의 삶을 따라가며 자연스레 그와 크게 다르지 않았던, 긴즈버그가 걸어온 길을 떠올리게 된다. 여성의 법조계 진출의 의의를 설명하는 글에서 그는 “돌이켜보면, 사법체계의 모든 참여자 대부분이 똑같은 틀에서 쏟아져나오던 시절이야말로 비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고 말하며 다양한 삶의 경험들이 법에 반영되어야 함을 역설한다.
3부 ‘성평등에 관하여: 여성과 법’은 긴즈버그에게 인생의 분수령이 된 1970년대, 페미니즘 제2의 물결을 타고 법에서의 성평등 문제에 천착하게 된 과정에서 그가 남긴 족적을 구체적으로 담고 있다. 판례집은 물론이고 강의실에서조차 ‘여성 인권’이라는 단어 자체를 찾기 어려웠던 시절, 긴즈버그는 럿거스대학 법대 교수로서 ‘성차별과 법’이라는 세미나를 최초로 열었고, 때로는 변호인으로, 때로는 법정 조언자로 미국시민자유연맹의 지원을 받아 스물네 건에 이르는 연방대법원 사건을 이끌었다. 놀랍게도 스물네 건의 재판 중 단 한 건만 패소하고 나머지는 모두 승소하며, 긴즈버그는 ‘여성운동계의 서굿 마셜’이라는 영광스러운 호칭을 얻게 된다. 이 책에는 미 법원이 성차별에 법적인 근거가 부족하다는 것을 최초로 인정했던 ‘리드 판결’과 성차별이 여성뿐 아니라 모든 성별에 불이익을 준다는 것을 설득하는 데 성공한 ‘모리츠 판결’의 진행 과정을 담은 남편 마티의 연설문, 성차별이 헌법의 정신에 어긋난다는 주장을 효과적으로 피력했던 ‘프론티에로 사건’과 ‘VMI 사건’에서 긴즈버그가 법원에 제출한 답변서, 남녀평등수정헌법의 필요성을 역설한 기고문을 특별히 실었다.
4부 ‘연방대법관이 되다’는 1993년 클린턴 대통령이 긴즈버그를 대법관에 임명한 당시의 우여곡절과 혼란스러운 상황, 그럼에도 법사위 소속 상원의원들의 만장일치를 이끌어낸 역사적인 청문회 현장을 들여다본다. 백악관 로즈가든에서 열린 후보 지명 수락 연설과 상원 인준청문회 모두진술에서 우리는 이미 준비된 대법관이었던 긴즈버그의 면모와 반대편의 인사들마저 감화시켰던 법과 정의에 대한 긴즈버그의 강한 확신과 신념을 만날 수 있다. 특히 모두진술에서 긴즈버그는 형식적인 인사말 대신 “평등한 시민권을 향한 갈망에 불을 지핀 이 땅의 여성과 남성들”을 한 명 한 명 불러내어 구체적인 감사를 표하며 동시에 헌법의 의미에 대한 해석, 대법관이 짊어져야 하는 책무, 연방대법원이 수행해야 할 역할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진솔하게 풀어내고 있다.
5부 ‘판결과 정의’는 연방대법원에서 내려지는 판결의 본원적 성격과 역할에 대한 그의 생각을 담은 연설문과 기고글, 그리고 세기의 판결로 기억될 몇몇 사건들에서 대법관으로서 긴즈버그가 남긴 중요한 반대의견들을 실었다. 긴즈버그는 헌법 조문을 있는 그대로 해석하는 ‘원전주의자’들에 맞서 변화하는 현재에 맞춰 헌법의 본원적 원리를 재해석하는 ‘살아있는 헌법’의 옹호자로 알려져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미국의 사법체계를 구축하고 이끌어온 역사를 존중하며 법치주의의 요체로 ‘재판의 독립성’을 여러 차례 강조하는 등, 규범과 전통에 충실한 면모를 가진 인물이기도 한다. 그의 이러한 다층적인 면모는 특히 ‘반대의견의 역할’을 주제로 행한 강연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세간의 평가와는 달리 반대의견에 대해 신중한 입장을 취하는 대목에서 우리는 대법관으로서 ‘판결’이 사회에 미칠 영향력을 고려하는 그의 곧은 신념과 철학을 엿볼 수 있으며, 그와 동시에 꼭 필요할 때 효과적으로 자신의 소수의견을 피력했던 반대의견서를 통해 그가 왜 지지자와 반대자 모두에게 ‘악명 높은 RBG(Notorious RBG)’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
◆ 위대한 법조인이 우리에게 남긴 유산은 무엇일까?
“헌법의 고매한 수호자” 자리에서 내려와 세상과 나눈 대화
그리고 그가 써내려간 “미래의 지성에게 보내는 편지”
‘진보의 아이콘’이라 불리는 긴즈버그이지만 이 책을 읽다 보면 우리는, 하나의 이념으로 정의될 수 없는, 민주주의와 헌법에 대한 강한 확신을 가지고 그 안에 살아 쉼쉬는 본원적인 정신을 지키려고 했던 ‘위대한 법조인’을 만나게 된다. 그에게 판사란 “단지 헌법의 고매한 수호자들이 아니”라 민주주의 국가에서 상호의존적인 역할을 수행하며 그 과정을 통해 “정부의 다른 조직과는 물론이고 국민과의 대화에도 참여”하는 사람들이며 법원이 의도적으로 퇴보하는 판결을 내려서도 안 되지만 현실세계의 정치과정보다 너무 앞서 나가서도 안 된다고 주문했다. 어느 한쪽의 손을 들어준다기보다는 계류 중인 사건이 요구하는 본질이 무엇인지 담담하게 사고하여 판단하고, 현재 이룰 수 없는 진전은 차후에 진행될 다른 재판에 맡겨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보수주의적 색채가 진한 대법원 안에서도 전원일치 합의 판결의 의의를 누구보다 진지하게 고려한 인물로, ‘동료 간 협력 관계’를 강조하며 그를 위한 대화와 협력의 기술을 끊임없이 연구했다. 그는 다수의견과 반대의견 작성자들 사이에 끝없는 논쟁이 오히려 “연방대법원 차원에서 최종 작품을 더욱더 튼실하게 가다듬을 기회”이며, 어쩔 수 없이 반대의견을 내야 한다면, 그 역할은 “미 의회로 공을 넘겨줘” 유의미한 입법안을 마련할 수 있는 기회로 삼거나, “미래 지성에게 호소하는” 목소리로서 이 사회의 디딤돌이 되어야 할 것이라고 보았다.
이처럼 공평무사하고 때로는 관조적으로 보일 만큼 신중한 태도는 평생을 자유와 평등을 위해 투쟁했던 긴즈버그의 삶과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글에 명료하게 담아낸 신념과 철학, 삶과 민주주의를 대하는 원칙들을 따라가다 보면,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그의 삶을 이끌어온 두 가지 힘이 솔기 없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그리고 이는 그 어느 때보다 분열의 시대를 살며, 법과 원칙이 무너진 세상에 사는 우리에게 진정한 ‘진보의 품격’이 무엇인지를 알려준다. 긴즈버그의 삶과 그가 남기고 간 유산을 오롯이 담은 이 책을 통해 우리는 바로 그 ‘품격’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민주주의에서 법치주의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깊이 탐구하면서 그러한 법을 통해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서길 주저하지 않았던, 그리고 법의 정신 안에서 가장 강력한 반대자들과도 대화하기를 포기하지 않았던 인물, 그의 가장 강력하면서도 명료한 목소리를 직접 들을 수 있는 기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