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작되는 진실 바깥에서 소비되는 인간
존엄성을 둘러싼 윤리, 여론, 권력의 삼각 구도
여아 납치 사건 수사 중 엉뚱한 용의자의 거짓 자백을 받아낸 여성 경찰 ‘그녀’. 그사이 진범은 가족을 살해한 뒤 자살한다. 자신을 질책하는 수사반장의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휴직계를 낸 작품 속 화자는 불면증에 시달린다. 남편은 그녀의 곁을 성실하게 지키지만 두 사람의 일상에는 서서히 균열이 자리한다.
한편, 남편의 대학 동창인 신경과학자 임윤성은 뇌-컴퓨터 인터페이스(BCI) 기술을 통해 인간의 기억을 선택적으로 삭제하거나 조절하는 ‘기억 교정’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지우고 싶은 기억이 있어요?”라는 그의 유혹적인 질문에 그녀는 “기억이라는 건 그 사람 자체”라고 답하며 본능적인 거부감을 드러낸다. 인간과 기억의 고유함을 환상이라 주장하는 기술주의자 임윤성과 상반되는 화자의 신념이 팽팽히 맞서지만, 그들의 논쟁은 길게 이어지지 못한다.
어느 날 새벽, 불면의 밤을 견디다 못한 화자는 충동적으로 구도심으로 향하고 폐건물에서 우연히 화장실 파괴범과 여성 노숙자들의 대치 상황을 목격한다. 경찰의 본능으로 사건에 개입한 그녀는 범인이 휘두르는 해머드릴에 심각한 부상을 입고 입원한다. 시장은 검거된 화장실 파괴범을 ‘기억 교정술’의 첫 공식 시험 대상으로 삼겠다고 발표하고, 이를 정당화하기 위한 대대적인 여론전을 시작한다. 임윤성은 공청회에서 기술을 지지하는 거짓 증언을 하라며 그녀를 압박한다. 임윤성과 그의 아내인 최진유에게 이 기술의 도입은 과학적 성과를 넘어 권력을 획득하는 수단인 것이다.
이 작품은 SNS 시대 진실이 어떻게 조작되고 유통되는지 그 과정 또한 생생하게 보여준다. “진실은 선점하지 않으면 안 되는 물건과도 같은 거예요. 게다가 아주 연약한 물건이죠. 다루기가 아주 까다롭다구요”라는 문장은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독자에게 섬뜩한 현실감을 전하는 동시에, 진실은 사실이 아니라 그저 선점되고 가공된 정보의 배열이라는 냉혹한 통찰을 담고 있다.
‘세이프 시티’라는 아이러니
소설의 무대는 극명하게 분열된 도시다. 안전한 구역을 각각의 등급으로 표시하는 ‘세이프 시티’라는 앱까지 상용화된 마당이다. 정부의 통제 아래 재개발이 완료된 신시가지와 정부의 관심에서 소외되어 ‘엑스 구역’이라 불리며 각종 범죄와 혐오가 집중된 구시가지. 설상가상 ‘엑스 구역’에서 여성 화장실만을 표적으로 삼는 기괴한 연쇄 파괴 사건이 발생하고 이는 시민들의 불안과 혐오를 증폭시킨다. 구도심에 걸린 현수막 문구인 “우리는 위험에 처했습니다. 우리를 고쳐주세요”와 “여기를 가만히 내버려둬라! 여기에는 여기의 삶이 있다!”라는 상반된 구호는 도시의 분열상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도시는 거주지일 뿐 아니라 다양한 계층과 집단이 형성하는 권력과 여론의 실험실로서 기능한다. 작가는 이러한 공간의 위계를 통해 권력 구조와 여론 형성의 메커니즘을 예리하게 해부하고 그 안에 놓인 인물들이 겪는 윤리적 혼란과 심리적 균열을 특유의 감각적인 문장으로 그려낸다. 특히 ‘세이프 시티’라는 명명이 품고 있는 아이러니, 즉 안전을 추구할수록 위험해지는 도시의 양상이 품은 역설은 기술과 통제가 만들어내는 디스토피아적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미스터리를 넘어선 철학적 탐구
『세이프 시티』는 장르소설과 본격문학의 경계를 넘나들며 독자에게 지적인 스릴과 윤리적 긴장을 동시에 제공한다. 미스터리와 SF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하지만 그 안에 담긴 질문들은 철저히 현실을 향하고 있다. 불완전하고 상처받은 기억조차도 우리 존재의 일부임을 받아들이는 실존적 각성, 기술 발전이 제기하는 윤리적 딜레마와 젠더화된 폭력의 문제까지, 이 작품이 다루는 주제는 복합적이고 다층적이다. 여성 화장실만을 파괴하는 연쇄 범죄, ‘유산 후 휴직한 여성 경찰’이라는 프레임이 만들어내는 신뢰성의 위기, 구도심에서 더욱 취약해지는 여성 노숙자들의 존재. 작가는 기억과 권력의 문제가 젠더와 교차하는 지점들을 섬세하게 포착하며, 단순한 사회 고발을 넘어 인간 존재의 근본적 조건을 탐구한다. 이러한 묵직한 주제를 섬세하게 다루면서도 서사의 추진력을 잃지 않는 『세이프 시티』는 손보미 문학이 도달한 새로운 경지이자 사회파 소설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다.
기억 조작이 가능한 시대, 우리는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포기해야 하는가. 기술 만능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시급하고도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는 가장 첨예한 문제작을 이제 마주할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