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발행하며: 서양 철학의 주류 인식론에 대한 혁명적 문제 제기
휴버트 드라이퍼스와 찰스 테일러의 〈실재론 되찾기〉가 이윤일 교수의 번역으로 도서출판 b에서 출간되었다. 이 책의 원제는 Retrieving Realism (Cambridge, MA & London: Harvard UP, 2015)이다. 책의 발간 당시만 해도 영어권 최고의 철학자인 드라이퍼스(〈모든 것은 빛난다〉)와 테일러(〈헤겔〉, 〈불안한 현대 사회〉)가 함께 책을 썼다는 것으로도 화제가 되었지만, 내용적으로는 이 짧은 책이 데카르트 이래 서양 철학의 주류 인식론을 논박하고 무너뜨리면서 새로운 대안적 인식론을 제시하는 시도였다는 점이 더 큰 이슈였다. 한 마디로 이 책은 드라이퍼스와 테일러가 현대 서양 철학의 지배적 전통에 도전하는 획기적인 철학서이다.
그동안 현대 철학과 예술에 관한 양서들을 다수 번역해 온 가톨릭관동대 이윤일 명예교수가 이번에 이 중요한 책을 번역했다. 분량은 짧지만 이 책을 읽기는 사실 호락호락하지 않다. 세계적으로 명망 있는 두 철학자가 철학의 핵심 영역에 대한 논증을 펼쳐내는 ‘하드코어’ 철학서이기 때문이다. 번역자 이윤일 교수는 이 논증이 제대로 전달될 수 있도록, 초역 이후 최소 다섯 번 이상 전체 교정을 보면서 문장 하나하나를 명료하게 번역해 냈다. 읽기에 쉽지는 않다. 하지만 도전한다면, 독자는 현대 철학의 주요한 논쟁 중 하나의 전개에 직접 참여한다는 생생한 느낌을 받을 것이다.
이 책은 데카르트적 유산과 ‘매개적(mediational)’의 관점에 대한 급진적인 비판을 제시하며, 보다 직접적이고, 신체적이며, 공동체적으로 현실에 접속하는 방식으로의 복귀를 제안한다. 데카르트에서 시작되어 현대 철학 전반에 퍼진 이 ‘매개적’ 관점은 지식이란 근본적으로 마음과 세계 사이를 매개하는 정신적 표상(mental representa- tion)에 관한 것이라고 본다. 이 전통에 따르면, 마음은 ‘자연의 거울’과 같으며, 우리의 현실 접근은 항상 관념, 이미지, 개념을 통해 간접적으로 이루어진다. 드라이퍼스와 테일러는 이러한 매개적 관점이 외부 세계에 대한 회의주의, 주체와 객체의 분리 등 철학적 난제를 야기했다고 주장한다. 데카르트를 넘어서려 했던 퀘인, 로티, 데이비슨 같은 철학자들조차도 이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비판하면서 말이다.
쉽게 말하면, 매개적 관점은 나와 세계(혹은 현실/실재)와의 관계가 언제나 정신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말한다. 나는 세계 속에 살면서도 정신이라는 매개를 통해서만 실재를 인식하게 되기에, 그로부터 표상/재현이 우위에 선다. 즉 내 머리에 장착된 틀이 세계의 사실들을 체로 거르고, 사회가 내게 주입한 이데올로기가 세계의 실상을 거기에 맞게 표상하게 되는 것이다. 데카르트의 관념론, 맑스의 이데올로기론, 20세기 중반의 구조주의에 이르기까지 서양 철학에서의 인식론의 기본틀은 ‘매개주의’였다.
드라이퍼스와 테일러는 매개주의 대신 세계와 직접 접촉을 통해 우리는 실재를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세계는 우리 정신을 매개로 존재하는 ‘매트릭스’ 같은 게 아니라 우리와 별개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체다. 인간은 몸을 통해 세계와 접촉함으로써 선개념적(개념 이전의) 세계 이해가 가능하다. 이른바 ‘몸 가진 행위 주체’(embodied agent)가 세계와 직접 부딪히면서 경험을 쌓고, 그 경험을 통해 세계에 대한 앎을 획득해 나갈 수 있다. ‘매개’에서 ‘접촉’으로, ‘정신’에서 ‘몸’으로의 이동. 이 이동을 철학적으로 먼저 탐구했던 이들, 칸트와 헤겔에서부터 본격적으로 하이데거, 메를로-퐁티, 가다머 등 현상학과 해석학의 통찰을 훑으면서 저자들은 매개주의를 넘어선 자신들의 대안을 찾아 나선다.
직접 접촉을 통한 인식의 가능성이라는 저자들의 대안은 ‘다원주의적인 견고한 실재론’(pluralistic robust realism)이라는 이름으로 제시된다. 실재를 탐구하는 방식은 다양하기 때문에 ‘다원주의적’이고, 실재의 진실을 파악하기 위해 우리의 [매개적인] 생각과 관념을 수정하고 개조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견고한 실재론’이다. 저자들은 말한다. “일단 우리가 (…) 매개적 그림을 극복하면, 독립적인 실재와 직접으로 몸 접촉이 이루어지는 우리의 일상 경험은, 우리의 본질적 본성과 우주의 본성을 광범위하게 설명하기 위한 공간을 열” 수 있다고.(312쪽)
드라이퍼스와 테일러의 〈실재론 되찾기〉는 우리가 세계를 어떻게 알고, 어떻게 접속하는지에 대한 강력하고 독창적인 해석을 제시한다. 매개주의의 한계를 넘어, 신체적·실천적·공유적 이해 방식을 포용함으로써, 견고하면서도 다원적인 실재론을 복원하는 이 책은 우리의 세계 파악이 해석과 실천에 깊이 뿌리내리면서도, ‘있는 그대로의’ 현실에 접속할 수 있음을 힘 있게 옹호한다. 난해한 주제에도 불구하고 폭넓은 독자층이 접근할 수 있도록 쓰고 있으며, 지식의 토대, 현실의 본질, 그리고 철학이 일상에 미치는 역할을 근본적으로 재고하는 지식의 장으로 독자들을 초대한다. 이윤일 교수의 명료한 번역으로 한국의 독자들은 이제 동시대 세계 최고의 철학자들이 펼치는 인식론적 논쟁의 대향연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