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교훈서에서 의서(醫書)까지 뒤져내다
책은 마치 달의 전면과 후면을 다루듯 먼저 남성들의 유교 젠더 규범 세우기 작업을 파고든다. 조선 젠더와 관련된 법과 제도, 병풍에까지 새겨서 사생활까지 파고들게끔 만든 시집살이 지침서를 분석하였다. 유교(성리학) 이상주의자들이 조선 건국 이전부터 시작한 유교 젠더 규범 만들기에 집중한다. 조선 여성의 성적 족쇄가 되었던 재혼 금지법이나, 혼례ㆍ장례ㆍ제사를 유교식으로 전환하여 여성의 권리와 활동 영역을 친가가 아닌 시가로 옮긴 과정을 다룬다. 《동의보감》으로 대표되는 의학서를 통해 여성의 몸에 대한 정의를 파악한다. 그래서 생명 탄생에 적극적이지 못하고 질병에 걸리기 쉬운, 약한 몸이 되었다고 언급한다. 17세기 이후부터 시집살이 문화의 발생으로 시작한 양반 남성들의 여성 교훈서도 살핀다. 예컨대 여성이란 며느리로 살아가야 한다는 출가외인 담론이라든지 시집의 흥망성쇠가 며느리에게 달려 있다고 하는 신념 등을 뽑아냈다.
다양하고 교묘했던 유교 여성들의 대응
이어 남성이 이룩한 유교 젠더 규범에 대응한 여성의 모습을 소개한다. 한국이나 다른 나라의 전근대 역사 기록이 대체로 그러하듯, 조선 여성은 주변부의 사람으로서 스스로 기록을 남기는 경우가 드물었다. 그러나 책은 남성의 기록 속에서도 여성의 목소리를 찾아냈다. 효성스러운 며느리들은 실제로는 유배 중인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봉양하고, 부모님과 가까이 살기 위해 이사하고, 돌아가신 아버지의 묘비명을 만들려고 길쌈하고 이를 며느리에게도 시켰다. 어떤 남편은 친가 선산에 무덤을 만들어달라는 유언을 성실히 따르기까지 하였다. 이처럼 조선 여성들은 유교 젠더 규범에 일정 부분 타협하면서 출신 가문의 ‘나’를 놓치지 않았다고 짚어준다.
발칙한 여성들에 대한 응징, 그리고 실상
그렇다면 과연 유교 젠더 규범에 따르지 않은 여성을 어떻게 응징했을까? 칠거지악으로 시가에서 쫓겨난 신숙녀의 사례를 파고들어 당대를 뛰어넘어 후대에 이르도록 시가를 망하게 한 며느리로서 곱씹어지며 조선판 마녀로서 담론화된 과정을 보여준다. 인조 대의 정치ㆍ사회적 상황에 맞물려 조선판 마녀가 되어버린 신숙녀를 짓밟는 과정은 중세에서 근대에 이르기까지 서양에서의 마녀사냥이나 현대 사회에서 대중들에 의해 일어나는 연예인 마녀사냥과도 사뭇 닮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이 서슴지 않고 젠더에 균열을 내어버린 사실을 포착하였다. 담배가 순식간에 조선 전국에 유행 열풍을 일으킨 와중에 남성은 자기네들만의 흡연문화를 만들려 했지만 아랑곳없이 흡연을 즐기는 여성들에 의해 젠더 질서는 깨어지고 말았던 사실이 그렇다. 이처럼 유교로 만든 단단한 틀에 작은 틈새를 찾아 타협하면서 교섭하고 혹은 균열을 내기도 한 조선 여성들의 모습은 은밀히 전쟁을 수행하는 주도면밀한 전략가와 다름없어 보인다.
21세기 ‘유교 걸’ 신화를 뒤집다
몇 해 전부터 유교와 소녀 혹은 보통 여자를 의미하는 영어 girl을 합친 ‘유교 걸’이라는 신조어가 유행하고 있다. ‘유교 걸’이란 몸매가 드러나지 않는 옷차림을 한다거나 남자를 가까이하지 않는 등, 한국의 전통 여성상을 답습하는 행동을 하는, 보수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여성을 말한다. 저자는 우리들의 머릿속에 있는 한국 전통 여성상은 조선의 ‘이상적’ 유교 젠더 규범의 표본일 뿐이라고 외친다. 이 책은 한국역사연구회가 기획한 ‘금요일엔 역사책’ 시리즈의 12번째 책이다. 시리즈의 다른 책이 그렇듯, 술술 읽히지만 만만찮은 의미가 담겨 우리 역사를 새삼 돌아보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