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로 생생하게 담아낸
‘그 여자’의 얼굴
나혜석은 ‘시대를 앞서간 신여성’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세계일주를 떠난 여성’ ‘파격적인 연애와 이혼’ 등 화려한 수식어로 기억된다. 하지만 그러한 이미지만으로는 그의 삶 전체를 제대로 바라볼 수 없다. 물론 나혜석은 시대를 앞서가는 사고방식을 지닌 사람이었고, 동시에 두려움 없는 삶을 선택한 이였다. 하지만 그 모든 용기와 결단 뒤에는 늘 외로움과 고통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내 마음 하나 잊지 말자는 것이다』는 그러한 삶의 양면을 가감 없이 담아내며, 이제껏 미디어나 여성 서사 재조명을 통해 강렬한 투사의 이미지로만 소비되었던 ‘그 여자’ 나혜석을, 한층 더 깊고 넓은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한다.
『내 마음 하나 잊지 말자는 것이다』는 무엇보다 나혜석의 삶을 생생하게 담아낸다. 기존의 텍스트나 사진 몇장으로는 느낄 수 없었던 표정과 몸짓, 거리의 풍경과 사람들과의 교류가 만화라는 형식 안에서 오롯이 살아나는 것이다. 박서련 소설가가 “이런 표정이었겠구나” 하며 읽었다는 추천사를 보내오기도 한바, 독자들은 책장을 넘길 때마다 한 사람의 삶을 따라가고 있다는 실감과 공감을 동시에 느끼게 된다. 그러면서 나혜석은 더이상 기록 속에 박제된 역사의 인물이 아니라, 우리 곁에서 웃고 울고 고민하는 살아 있는 한 사람으로 다가온다. 고독한 지식인으로서의 나혜석, 사랑과 모성 사이에서 흔들리는 나혜석, 친구들과 함께 웃고 때로는 좌절하는 나혜석. 이 책은 그런 다층적인 모습을 통해 나혜석이라는 이름에 다시 한번 따뜻한 온기를 불어넣는다.
“여자이기 이전에 사람이다”
끝나지 않은 투쟁
한편 여성의 독립과 자유를 외쳤던 나혜석의 투쟁은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끝나지 않은 일이다. 당대 사회가 그를 향해 가했던 비난과 억압, 여성이라는 이유로 자유로운 연애와 직업 활동, 자기표현을 금기시했던 분위기는 오늘날에도 다양한 형태로 반복되고 있다. 결혼과 출산, 육아를 둘러싼 선택을 여성 개인의 삶이 아닌 ‘당연한 의무’처럼 강요하는 사회적 시선, 경력 단절과 임금 격차 같은 구조적 차별, 온라인 공간 등에서 여성을 향한 혐오와 조롱이 일상인 양 반복되는 풍경은 아직도 우리 사회에 만연하다. 또한 여성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자유롭게 내는 일 역시 여전히 쉽지 않다. 다양한 낙인과 조롱이 일상화되어 있고, SNS나 댓글 문화 속에서도 여성의 존재 자체를 폄하하거나 침묵시키려는 시도가 끊이지 않는다.
그렇기에 나혜석의 삶을 다시 살피는 일은 단순히 과거를 복원하거나 기념하기 위한 일이 아니다. 그것은 지금 여기,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서 여성으로 존재한다는 것의 의미를 되돌아보고,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과제를 마주하는 일이자, 그 자체로 현재와 미래를 향한 질문이자 선언이다. 여성도 개인으로서 존중받을 수 있는가. 사랑과 일, 가정과 사회 속에서 여성의 자리는 어디인가. 자신의 목소리를 잃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여자이기 이전에 사람이다”라는 그의 외침은 여전히 우리에게 유효하게 다가오며,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이들에게 묵직한 울림으로 남는다.
최초의 여성 만화가,
선배 작가를 향한 마음을 담아서
『내 마음 하나 잊지 말자는 것이다』 속 나혜석은 만화가 유승하 작가의 손끝에서 새롭게 태어났다. 2014년 단편 만화로 시작해 이번 책까지 세차례에 걸쳐 나혜석을 작품에서 다뤄온 유승하 작가에게 나혜석은 그 무엇보다 ‘최초의 여성 만화가’다. 실제로 나혜석이 1920년 잡지 『신여성』에 발표했던 판화는 지금의 네 컷 만화와 같은 형식에 위트와 해학을 담아 동갑내기 친구 김일엽이 집안 살림과 여성운동을 병행하는 모습을 실감 나게 포착했다. 특히 해당 판화 작품은 스티커로 제작되어 초판 한정으로 만나볼 수 있다.
언젠가는 선배 작가에게 헌정하는 만화를 그리고 싶었다는 유승하 작가의 소망은 이번 작품에 이르러 깊이 있는 연출과 작화로 결실을 맺었다. 누구나 읽을 수 있는 만화라는 매체를 통해, 나혜석이 궁금한 성인 독자뿐 아니라 청소년들도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는 열린 책으로 완성된 것이다. 우리 역사에 지워지지 않은 발자취를 남긴 인물을 다루면서도 무겁고 어려운 느낌을 주기보다 친근하고 다정하게 나혜석의 이야기에 다가설 수 있게 해주는 이 책을 통해 나혜석은 다시, 책장을 넘기는 우리 앞에 살아 있는 얼굴로 돌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