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 민중에게 바치는 인간애와 희망의 헌사
이란에서 금서로 지정된 『떠난 이들과 남은 이들』은 파리누쉬 사니이의 최신작으로 『나의 몫』(2017)과 『목소리를 삼킨 아이』(2020)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번역, 출간된 그녀의 세 번째 작품이다. 『나의 몫』은 주인공 마수메의 파란만장한 삶에 팔라비 왕조 시대를 거쳐 이슬람 혁명 후 현재까지 이란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으며 『목소리를 삼킨 아이』는 이란의 정치적 상황에서 살짝 벗어나 한 아이의 심리에 집중한 성장소설이라 할 수 있다. 이란 혁명 전후의 격동을 고스란히 겪어낸 한 여성의 일생을 파노라마처럼 보여준 대하 소설급 작품 『나의 몫』이 이란의 정치, 사회적 변화가 개인의 삶에 미치는 영향을 그리고 있다면 『떠난 이들과 남은 이들』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해체된 것처럼 보이는 한 가족을 통해 이란 혁명이 가족 관계에 미친 부정적인 결과를 드러내는 가운데 또 다른 한 편으로 화합의 메시지와 함께 이란 민중에게 바치는 인간애와 희망의 헌사를 담고 있다.
지적이며 아름답고 매우 깊이 있는 감성으로
현재 이란 사회의 초상을 섬세하게 그려낸 소설. - 프랑스 서점협회
혁명이 남긴 깊은 상처, 떠난 이들과 남은 이들의 잃어버린 시간
파리누쉬 사니이는 이란에서 벌어지고 있는 가족 해체의 원인을 산업화나 개인주의의 확산 같은 근대화의 일반적인 특성이 아니라 이슬람 혁명으로 상정함으로써 이란 혁명이 개인의 삶뿐만 아니라 가족 관계에 미친 부정적인 영향을 한 가족을 통해 전방위적으로 보여준다. 혁명 후 많은 이란인이 세계 여러 지역으로 이민을 떠났다. 떠난 사람들은 조국에 대한 소속감을 상실한 채 자신의 정체성에 혼란스러워하고 남은 사람들은 해외의 친척들이 누리는 부와 안락함을 부러워한다. 떨어져 지내는 사이 켜켜이 쌓인 오해와 불신으로 인해 이란을 떠난 가족과 이란에 남은 가족 사이에는 도저히 해소할 수 없을 것 같은 거리감이 생겨난다. 『떠난 이들과 남은 이들』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제3의 장소, 모든 가족 구성원이 30년 만에 재회하는 바로 그곳이 저마다 품고 있던 고통과 슬픔의 감정을 토로하는 장이 된다.
근접성은 중요한 요소지만 서로를 가깝거나 비슷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이웃이나 룸메이트도 많다. 같은 나라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 동포가 되는 유일한 기준은 아닌 것 같다. 사실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는 것은 공유된 문화다. 각자 세계의 다른 지역으로 던져져서 우리의 삶이 단절되고 우리 문화가 다른 세계 문화와 뒤섞여 있다 해도, 동포로 남고 싶다면 정서적 유대감을 최대한 유지해야 한다. 지리적 거리감은 어쩔 수 없다 해도 적어도 문화적 차이는 최소화해야 한다. - 저자 서문 중에서(p. 13)
오해와 원망에서 이해와 화합으로 점철된 ‘가족’의 역사
다양한 이유로 낯선 나라에서 새 삶을 시작해야 했던 가족들은 언어와 생활고 문제, 외로움과 정체성 혼란처럼 이란에 남은 사람들이 겪지 못한 어려움과 여러 문제를 겪었다. 반면, 이란에 남은 사람들은 군주정치에서 이슬람 공화국으로 통치 형태가 바뀌는 전환기에 온갖 정치적 혼란과 갈등을 겪었다. 이라크와의 전쟁으로 경제적, 정신적 어려움에 직면했고 히잡 착용을 강요당했으며 도덕 경찰 같은 이슬람 정부의 억압 정책으로 자유를 제한당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이란을 떠난 사람들은 남은 사람들이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 모른 채 이란의 가족이 자신들에게 섭섭하게 했던 것만 기억하고, 이란에 남은 사람들은 떠난 가족들이 부유하고 안락한 삶을 살면서 이란의 가족들이 겪는 고통에 무심하다며 섭섭해한다. 그러나 이야기를 통해 떠난 가족과 남은 가족은 서로에 대해 품었던 오해와 원망을 접고 마침내 이해와 화해에 이르게 된다.
“그럴 리가! 그러니까 남아서 전쟁에 나가 끝까지 싸운 사람들은 조국에 대한 사랑을 눈곱만큼도 알지 못하는데, 자기네 돈을 전부 싸 들고 떠난 사람들은 조국을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안다는 말이오?” (p. 105~106)
“떠난 사람들은 우리를 배신했어. 최악의 상황에서 우리를 버리고 떠났으니까. 지금은 안전하고 안정된 곳에 눌러앉아서 우리를 조롱하고 있지. 자기들이 돌아올 수 있게 싸우지 않는다고, 우리 아이들을 보내 길거리에서 죽게 하지 않는다고, 우리를 모욕하고 있어. 아니, 우리는 더 이상 그들을 믿을 수가 없어.” (p. 154~155)
흩어진 삶, 30년의 침묵 끝에 다시 하나가 될 수 있었던 무대 위의 독백
이 소설은 여러 가지 면에서 독특한 구성 양식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등장인물들의 이야기 방식이 독특하다. 작품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정보의 조각들이 모여 각 등장인물에 대한 그림이 완성되는 게 아니라, 등장인물이 모두 한자리에 모여 지난 이야기를 쏟아내며 자신에 대한 정보를 한 번에 대방출한다. 마치 연극배우들이 한곳에 죽 둘러앉아 돌아가며 자기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같다. 이 소설은 등장인물에 대한 심리 묘사나 서술도, 사건도 거의 없이 대부분 대사에 의지해서 등장인물에 대한 정보를 제공한다. 『떠난 이들과 남은 이들』이 한 장소에서 열흘이라는 제한된 시간 동안 벌어진 일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도 연극적인 요소를 발견할 수 있다. 연극에서 하나의 사건(행동의 일치)이 같은 장소(장소의 일치)를 배경으로 하루 안(시간의 일치)에 이루어져야하는 ‘삼일치三一致 법칙’을 따르듯 이 작품은 등장인물들이 이란 접경 국가의 바닷가 작은 도시에서 딱 열흘 동안 같이 지내며 벌어진 일을 그리고 있다. 또한 재회 장소에 오고 가는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을 제외하면 장소의 이동도 일어나지 않는다. 등장인물들이 마음속 상처를 치유하고 극적 화해에 이르는 한 가지 사건으로 모든 이야기가 수렴된다.
“바로 그 때문에, 내가 괴로워. 함께 있었어야 할 때 함께하지 못한 것 때문에 말이야. 당시 나는 너희들과 함께하지 못한 것에 대한 변명거리를 천 가지쯤 마련해두고 있었어. 휴가 시간도 충분하지 않았고, 직장을 잃었을지도 몰라. 전쟁과 나라 상황도 두려웠어. 그 당시에는 논리적으로 보였던 변명거리가 많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 어떤 것도 말이 안 돼. 내가 너라면 좋겠어. 네가 겪은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네가 지닌 맑은 양심을 위해서라면, 내가 가진 모든 것과 바꿀 거야. 내가 그곳에 있지 않아서 잃어버린 시간, 내가 놓친 애정과 감정을 한순간이라도, 단 일 초라도 가져보길 줄곧 바라왔어. 그리고 나이가 들수록 그렇게 놓친 것이 더 절실해.” (p. 193)
가족 모두가 주인공인, 열흘간 열 개의 이야기를 담은 액자 소설
소설 전체를 아우르는 도키의 서술 속에 열 명의 등장인물이 전하는 이야기는 독립된 각각의 이야기로 일종의 액자식 구성을 보여준다. 미국에서 의사가 되었지만 아내를 여의고 홀로 아들을 키우며 외로운 삶을 산 모하마드, 이란에서 부모를 돌보며 형을 부러워하는 모흐센, 이란 혁명 후 남편이 처형당하고 파리에서 혼자 아이들을 키우며 고생한 마흐나즈, 전쟁의 공포에 시달리며 외국 생활을 동경한 아프사네, 매사 냉소적이고 부정적인 시루스, 형제들이 외국으로 떠난 뒤 종교에서 위안을 찾은 마리암, 탈영 후 스웨덴에서 난민으로 살며 외로움에 시달리는 메흐디, 어지러운 정치 상황 속에서 자식들을 뒷바라지하며 온갖 힘든 일을 견뎌온 할머니, 그리고 어머니가 겪은 고문과 죽음으로 인해 생긴 트라우마로 기억 상실과 호흡곤란을 겪는 도키의 이야기는 한마디로 압축하면 고생담이다. 이란을 떠난 이들은 떠난 이들 나름대로, 남은 이들은 남은 이들 나름대로 온갖 고생을 했고 이 열 개의 이야기는 그런 아픔을 총망라해놓은 한풀이이자 이로써 경험하게 되는 카타르시스를 보여준다.
* 주요 등장인물 소개*
도키 : 20대 중반. 소설 속 화자. 엄마 아빠(막내아들)이 죽고 할머니와 이란에서 산다
"저는 누구인가요? 제가 저 자신에 대해 알고 있는 유일한 사실은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아버지 하비브가 이 집안의 네 번째 자식이었다는 것뿐이에요. 어머니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라요. 제 어머니는 누구였나요?"
모하마드 삼촌 : 큰아들. 50대. 의사. 미국 거주. 미국인 아내(캐롤라인)와 사별.
“너는 해야 할 일 그 이상을 해냈어. 그런데 왜 그렇게 낙담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거야? 자식 일이 전부 네 책임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아니야! … 네가 해준 모든 것에 감사하지 않고 더 많은 걸 기대한다면, 그건 그 애들의 문제야.”
마흐나즈 고모 : 큰딸. 50대. 프랑스 거주. 첫 번째 남편(삿타리 장군)이 처형당하고 두 번째 남편(샤파키 씨)과 산다.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 네가 히잡을 쓰더라도 널 사랑한다는 뜻이야!”
모흐센 삼촌 : 둘째 아들. 40대 후반. 이란 거주.
“안타깝게도 내게는 양심이 있었어요. 책임감을 느꼈어요.”
마리암 고모 : 둘째 딸. 30대. 이란 거주.
“모르겠어요. 잘 살았다는 게 무슨 뜻인지 정말 모르겠어요. 그게 이란에 남아 있었다는 뜻이라면, 네, 그랬어요. 그렇지만 가족이란 그것을 구성하는 구성원이 있어야 해요. 여러분이 떠났을 때 가족이라는 것도 함께 데리고 떠났기 때문에 내게는 빈자리가 생겼고, 내가 아끼고 사랑했던 모든 게 없어져버렸어요.”
메흐디 삼촌 : 막내아들. 30대. 스웨덴 거주. 아내(포루잔)와 헤어짐.
“옛날의 메흐디는 죽었어요. 그는 북극의 추위와 어둠 속에 묻혀 있어요!”
할머니 : 이란 거주. 80대 초반
"내 자식들을 다시는 볼 수 없을 거라고 믿었을 때 겉으로는 호수처럼 평온함을 유지했어. 그러나 이제는 둑이 부서진 걸 알았기 때문에 이 세월 내내 마음속에 가둬뒀던 감정을 억누를 수가 없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