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설 】
상상적인 언어로 모색하는 비망록
『다시 찻물을 데운다』를 읽고
차달숙 시인·수필가
(前 월간 《국보문학》 주간)
▣ 들어가면서
최은복 시인은 경남 김해에서 태어나고 부산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다. 2015년 《문예시대》 신인상으로 등단하여 부산문인협회, 새부산시인협회, 부산문학인협회, 수영구문인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부산문인협회 사무차장, 수영구문인회 이사, 부산문학인협회 사무국장을 역임하고 부회장으로, 계간 《문심》 공동발행인을 맡고 있다.
그는 수영구문인회에서 《수영문예》 작가상과 작품상, 새부산시인협회에서 《부산시단》 작품상, 부산문학인협회에서 동백시화전 최우수 작품상을 받았다. 근무 유공으로 한국문학신문 이사장상과 부산문인협회 회장상을 받는 등 성실성과 실력을 인정받은 시인이다. 이제 독자들은 최은복 시인의 책임성 있는 시 사랑과 역량을 그의 시를 통해 충분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 최은복의 작품세계
1.
시는 인류가 남긴 최고의 정신적 문화 예술이라 할 수 있다. 공자는 이미 오랜 옛날부터 “시 삼백 일언이 폐지 왈 사무사”(詩 三百 一言以蔽之 曰 思無邪)라며 우리가 시 삼백 편 정도를 익히고 읊으면 한마디로 마음의 삿됨을 없애준다고 했다. 다시 말하면 시는 우리의 어지러운 마음을 위무해주고, 인생이 아름다워진다고 했다. 이처럼 시는 어린이로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천진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이끄는 견인차 구실을 한다.
시를 가까이하고 시를 짓는다는 것은 창의적이며 새롭고 경이로운 세계로 확장하는 사고력에서 온다. 이렇게 시인이 자기 경험에서 오는 생각이나 느낌을 시로 옮겨 놓으면 독자는 그 시를 읽고 공감을 더러 가지고 정서적 감응을 하게 된다. 그리하여 눈을 뜨면 날마다 접하게 되는 세계를 새롭게 느끼게 한다. 보아도 느끼지 못한 것들이 들어도 감동으로 와 닿지 않던 소리가 새롭게 보이고, 새롭게 들리고 새로운 맛을 느끼게 되어 그만큼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한다. 따라서 최은복의 여러 시편은 대상을 새롭게 바라보는 눈으로 시적 언어로 그려 내어 주위를 밝히고 있다. 먼저 여러 편의 시 중에서 몇 편을 골라 그의 창작 정신을 살펴본다.
최은복 시인의 첫 시집 『다시 찻물을 데운다』에는 61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제1부 「다시 찻물을 데운다」 외 12편은 삶의 의미를 새기는 소소한 일상, 아주 사소하지만, 재시작을 위한 여백의 시간, 새로이 출발한다는 마음의 의도를 담았다.
제2부 「당신의 바다」 외 12편은 부모님, 조부모님과 함께한 어린 시절 보호받던 기억과 꿈의 힘, 마법 같은 상상과 희망, 무의식적 향수가, 그리고 시아버님의 이별에 대한 슬픔, 시어머니와 함께 한 시간을 회상하고 있다,
제3부 「현의 노래」 외 13편은 진정한 쉼의 의무와 가치를, 쉼표를 통해 여백 있는 예술과 사유의 깊이를 깨달음과 자연과의 교감하고 있다.
제4부 「아우라지 별곡」 외 13편은 관계 속에서의 상처와 책임, 지인의 죽음에 대한 슬픔과 안타까움, 전쟁의 상흔이 남은 아픈 역사를 기억하고, 자연을 통해 회복과 평화를 희망하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제5부 「소리를 유영하다」 외 6편은 무심한 행동 속에 감춰진 본심을 비롯하여 표현하지 못한 감정, 과거 잔재, 시각장애인의 시 낭송 모습을 보고 반성한 일과 일상 질서에서 벗어나 자연 속에서 느껴본 감정의 충만함 등이 아름다운 언어로 직조되어 있다.
2.
시는 문학의 어느 분야보다도 언어의 함축성과 경제성을 추구하는 예술이다. 최은복의 시 중에는 「장날」 「묵언 수행」 「해바라기꽃」 「태풍, 그 후」 등 7행 이내의 짧은 지 몇 편이 있다. 최은복의 짧은 시를 읽을 때 받는 강한 인상은 그의 작품이 갖는 청각 움직임에 따른 경쾌한 문장의 서술성이다. 짧은 시는 때로는 독자의 머릿속에 벼락을 치듯 전율을 안기는 힘이 있다.
파장 무렵
떨이로 유혹하는 난전에
버텨낸 하루가 웅크리고 있다
흑백 사진 속으로
울컥울컥
해는 넘어가고
- 「장날」 전문
심연을 향해 걸어가는 길
버려야 할 채움과 허기 속에
말의 고요를 심는다
가슴 짓누르던 천근 무게가
한 잎 풀잎처럼 덧없이 가벼워질 때
가장 맑은
내 목소리 듣는다
- 「묵언수행」 전문
한 생애를 머리에 이고 홀로서기 하는 동안
고고히 태양만을 사모하다
새까맣게 타버린 가슴앓이
풀벌레 우는 시월 어느 날
알알이 맺힌 사연
미주알고주알 쏟아 놓는다
- 「해바라기꽃」 전문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섬이 된 난파선 한 척
닻을 올리며 다시 바다에 기대어
망망대해 향해 불어올 바람을 기다린다
수평선 어디쯤
나를 기다리는 파도가 있을지도 몰라
- 「태풍, 그 후」 전문
위 인용 시 4편은 모두 6행, 7행의 짧은 시다. 그런데도 그녀의 시는 깨어 있는 의식과 언어 속도가 결합해 있다. 따라서 박진감과 입체감을 부여받고 있는 효과를 드러낸다. 감정이나 의식 속도와 경쾌한 서술 형식이 거의 일치하면서 시의 표현 효과를 기대하기란 여간 쉽지 않다. 다시 말하면 작품의 밀도와 의식의 밀도가 괴리되지 않고 형상화를 이루기란 실제로 어려운 일이다.
6행 시 「장날」은 덧없이 사라진 하루. 버텨낸 하루의 고단함을, 7행 시 「묵언 수행」은 침묵으로 마주하는 수행이 깨달음의 시작이었음을 표현하고 있다. 6행 시 「해바라기꽃」은 오직 하나만 바라보고 헌신해 온 외로움. 품어온 슬픔을 토해내듯 해방감을 담아내는 데 손색이 없다. 6행 시 「태풍, 그 후」는 미래에 대한 시작의 기다림. 고난 후 새로운 기회를 향한 희망을 지향하는 시인의 마음을 담았다.
시는 서사의 일종이긴 하지만 그 독특한 서술 양식이 갖는 수사적 전략으로 이야기의 결핍을 채워 넣은 장르이다. 이러한 결핍을 채우는 이야기는 비유, 함축, 생략, 압축 등과 변화를 통해 이루어진다. 이러한 점에서 최은복의 짧은 시에는 속도감이 가세한 현실 의식이 반영된 함축성을 겸비한 시 창작 활동을 하는 점이 돋보인다.
3.
최은복 시인이 쓴 60여 편의 시를 살펴보면 먼저 부모님의 사랑을 떠올리는 사모思母의 어조가 많은 부분을 관류하고 있음을 본다. 지극하고 애틋한 모녀 사이에 오가는 애정이 이 시집을 탄생케 한 계기가 되었을는지도 모른다. 그만큼 시인에게는 사모가思母歌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깊이 있게 다가오며, 모든 생명의 모태인 자연에 관한 관심과 사랑도 비중 있게 다루고 있다.
최은복 시인이 사모가를 부르는 깊은 정한의 시는 「초항아리」 「장날」 「허기를 갈망하다」 「개똥쑥」 「메주를 빚다」 「당신의 바다」 「위대한 순환」 「고구마의 추억」 등이 있다. 먼저 「개똥쑥」과 「메주를 빚다」를 살펴 보기로 한다.
너를 만나면 어머니 향기가 난다
유난히 잔병치레가 많았던
핏기 없는 하얀 얼굴의 아이
들꽃 같은 웃음이 아프게 스민다
혼절하듯 잠들던 순간에도
사라지지 않는 희미한 잔영을 떠올리면
지워도 지워지지 않는
당신의 치마폭 한약 냄새가 기억난다
강인한 향기 감춘 채 일렁이는
너를 만나면
다정하게 아가라 부르는 귀에 익은 목소리
가을 들판에서 환청이 들린다
- 「개똥쑥」 전문
물항아리 채우는 소리로 어머니 행보가 시작된다
굵은 마디에 거친 나뭇결이 배인 손은
부뚜막 앞을 떠날 새 없이
무쇠솥단지 속 콩물이 흘리는 눈물 염원을 담아
자식들에게 나누어 줄 모성의 절절함 빚는다
햇볕보다 먼저 익는 체온으로
한 덩이 겨울을 눌러 담고 바람 한 자락 얹는다
둥글어질 때까지
꾸덕꾸덕 굳어질 때까지
온몸에 푸른곰팡이 돋을 때까지
묵묵히 흐르는 시간
투박한 삶의 무게 내려놓지 못하는
처마 밑 풍경
저물어 가는 노을은
어머니의 세월을 삭히고 있다
- 「메주를 빚다」 전문
여자는 언젠가 어머니의 딸이 되었다가 성장하여 출가하면 자식을 낳아 기르면 누구의 어머니가 되기도 한다. 여자는 약해도 강하다는 말이 있듯이 자식을 기르는 어머니는 저절로 강해지지 않을 수 없다.
특히 모성적 보호 본능이 일어나면 그 어떤 위험과 고난 속에서도 자식을 지켜내는 힘이 생겨난다. 모든 생을 견디고 품어내고, 조용히 식어간다. 어머니에 대한 절절한 사랑과 헌신의 시간을, 세월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는 모성의 향기에 뒤늦게 깨닫고 가슴에 새기는 시인의 마음에 많은 독자가 공감할 것으로 생각한다. 평자도 화자의 시를 보면서 부모님께 못다 한 불효에 가슴이 미어질 듯 아파하였다.
꿈이 없는 엄마 모습을 본다
수레바퀴처럼 굴러가는 윤회같이
그렇게 싫었던 당신 모습
어느 순간 나도 엄마처럼 하고 있다
등짐이 묵직한 이름의 생
파란으로 남겨진 굴곡의 결
지나온 흔적이 바느질 무늬처럼 새겨진 삶의 천 위에
틈마다 길이 되는 발자국
청춘을 내어준 모정의 뜨거운 기적이다
잇고 푸는 인연 따라
겹겹이 접힌 무게에 하현달이 사위어가고
같은 길 밟지 않을 거란 오기도
조금씩 허물어진다
까맣게 타버린 당신 가슴을 이해하게 되고
언젠가는 이해받게 되리라며 당신처럼 변해가고
딸도 결국은
그렇게 엄마를 닮아간다
- 「위대한 순환」 전문
위 인용 시는 세대를 이어 반복되는 모성의 헌신과 운명을 잘 나타내고 있다. 뒤늦게 깨닫는 엄마에 대한 이해와 닮아감을 어떤 방향의 시적 태도와 시적 진실을 시 형식에 얹어 나타내고 있다.
4.
최은복 시집 제5부 ‘소리를 유영하다’에서 「가면」 8행시를 만난다. 사람은 모두 문명이 진보하면 할수록 점점 더 배우가 되어간다. 시인들의 세계에서는 모두가 ‘퍼소나’라는 가면을 쓴다. 시인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사실은 가면을 쓰고, 타인의 이야기를 하거나 아니면 반대로 타인의 가면을 쓰고 자신을 이야기하고 있다. 시인은 그것을 ‘상대방 패를 다 읽고 있는 자의 여유’라는 문장으로 표현하고 있다.
상대방 패를 다 읽고 있는 자의 여유
그는 천연스럽다
반전을 노리는 서툰 수작은 의뭉스럽고
숨길 수 없는 예감이 스멀거린다
뜬금없는 고백 한 소절
콧노래 속에 미묘하게 감추어 보지만
모든 걸 알아챈 듯
침묵했던 은밀한 실체가 중심을 잃고 흔들린다
- 「가면」 전문
본래 퍼스낼리티personality의 어원은 연기자가 쓰고 다닌 가면이라는 뜻이다. 이러한 가면은 언제나 굳어진 표정을 하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가면은 수시로 움직이는 인간의 성격으로 주목받아 자연히 거짓의 탈처럼 보인다. 눈물을 흘릴 때도 가면은 웃고, 웃고 있을 때 가면은 울고 있어야 한다. 즉 가면은 양면성을 가진다. 화자는 무심한 행동 속에 감춰진 본심. 가볍게 보이지만 치열한 감정의 줄다리기를 잘 나타내고 있다.
늦더위가 제풀에 꺾이는 소리
꿈꾸던 코스모스 빈 가슴 다독이는 소리
종점에서 막차 불빛 꺼지는 소리
붉은 단풍이 아름답게 추락하는 소리
중년의 가을 해가 조금씩 짧아지는 소리
고요한 일상이 반듯하게 오는 소리
다 하지 못한 말 멍 드는 소리
목울대 지나며 머뭇거리는 울림들
그 틈새로
귀 기울이지 않아도 들리는 야윈 곡소리
- 「각인되는 순간」 전문
위 인용 시에도 ‘아무 일 없는 듯 하루를 살지만, 그 속에 들리지 않는 울림의 소리가 묻혀 있다’라고 시인은 말하고 있다. 시는 이야기를 생략하고 암시하지만, 나머지 이야기의 완성은 독자의 몫으로 남는다. 시는 이야기를 생략하면서도 이야기를 전개하는 것이다.
5.
자기가 정한 별로부터 한순간도 눈을 떼지 않는 듯 그저 자석에 쇳가루 끌리듯이 가는 길이 있다. 아무리 멀고 험해도 그것이 표기할 논쟁거리가 될 수 없는 길이 있다. 자연 속에는 우리가 쉬 헤아리기 힘든 자기 길을 찾아가는 걸음들이 있다. 자연 속에서 회귀를 대표하는 것은 아무래도 연어가 아닌가 싶다.
한 바퀴 돌아 제자리로 돌아오거나 돌아감을 뜻하는 희귀라는 말은 돌 회回에 돌아갈 귀歸가 합해진 말이다. 마땅히 돌아갈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사람이 성장하여 고향이나 부모·형제를 그리워하고 유년 시절 기억을 아름답게 바꾸어서 반추하는 일을 문학이나 심리학에서는 ‘퇴행 move back’이라 하고 또 ‘귀소본능 歸巢本能’이니 ‘회귀본능 回歸本能’이라 하기도 한다.
예술이란 근본적으로 사물이나 사건을 아름답게 꾸미는 일이다. 이 아름답다는 것은 감상자의 마음을 정화해 주기 때문이다. 최은복 시인이 오래된 과거 기억을 건져 올려 오늘에 비추는 일이 아름답게 투영되고 있다. 그가 새날 듯이 옛집으로 가는 길. 작품들을 만난다.
오일장이 열리는 날이면
새벽닭 울기도 전 싸리문이 열리고
콩 한 되, 녹두 한 되, 참깨 한 되
한 꾸러미 머리에 이고 집을 나서는 뒷모습
허리춤 꼬깃꼬깃 쌈짓돈은 새 신발이 되고
이미 막대사탕 하나 입에 물은 소녀는
뽀얀 먼지 꼬리 달고 버스가 달려올
미루나무 가로수 한길 끝에 서 있다
그때는 알지 못했다
눈물 감추며 미명의 새벽을 여시던 당신
아버지 방에서 나오는 빈 링거병
뒤꼍 담벼락 아래 쌓여가고
가슴에 묻어야 했던 깊은 신음 감춘 채
생선 비늘같이 달라붙은 간절한 눈빛들로 뒤척이며
끝없는 망망대해를 항해하던
소낙비 쏟아지는 폭풍 속에서도 의연했던 모습
(중략)
수평선 저 멀리 감실거리는 손짓이 말을 건네온다
쌀 한 되박이 무겁다고 투정해 보지만
잔잔한 파도 걸어오는 듯 이내 사라진다
- 「당신의 바다」 일부
(전략)
작은 소망 하나 꼭 쥐고
끈적한 뺨으로 곤히 잠들었던
아버지 등이 그리운 날이면
하늘공원에서 솜사탕 같은 눈이 내린다
앙상한 가지 휘감으며 발틀을 저어가던 자취 따라
온종일 하얗게 번져간다
- 「솜사탕 같은 하루 」 전문
까치발 딛고 별 헤던 아이 도화지 속에
큰 나무 한 그루가 선명하다
세상 흐름에 쫓기어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는
여린 이름이 버거운 날이면
푸른 가지 하나 안겨주던
아련한 얼굴 설핏 떠오른다
크고 작은 상처 몇 개쯤 가졌을 나이 되고
칼바람 견디는 깃발처럼 떠밀려 살았다는 변명 앞에
한 점 흠도 한 점 어긋남도
괜찮아 나 여기 있었다고 말해주듯
해진 옷자락에서 묵은 바람 냄새가 난다
굽은 등을 따라
이름 모를 시간이 주름처럼 흘러내리는
푸른 핏기 다 내어 준 노을 진 나무 한 그루
우주의 뿌리로 서서
작은 마을 하나
천년을 지키고 있다
- 「느티나무」 전문
위 인용 시에서 화자가 회상하는 어린 시절 생활 모습이 잘 그려진다. 연어의 회귀처럼 가슴이 설렌다. 여기서 역증상연逆增上緣이라는 말이 생각된다. “사람이 어려운 일을 겪으면서 고통을 더욱 분발하는 인연으로 삼아라.” 뜻이다. 우리의 마음일랑 연어처럼 영혼에 새겨진 길을 따라 마음의 집을 향해 달려가는 작가는 행복하다고 생각해본다. 이 화자의 심리 속에 모든 지나간 일들이 이미 순수화되어 있고, 아름다워져 있기 때문이다.
「당신의 바다」는 가난을 견뎌야 했던 어머니의 사랑과 헌신을 뒤늦게 깨닫고 가슴에 새기는 회자의 마음을, 「솜사탕 같은 하루」에서는 어린 시절 동심과 소중했던 것을 잃은 후의 쓸쓸함, 아버지에 대한 깊은 그리움을 나타내고 있다. 할아버지의 뜻하지 않은 이별을 노래한 「장마」, 시부모님과 함께한 시간을 회상하며 쓴 「백일홍」과 「낮달」은 묻혀 있는 기억을 되살리며, 따뜻한 가족애와 친밀하고 따뜻한 풍경으로 그득 차 있다.
「느티나무」 는 어린 시절 보호받던 기억과 상처받고 흔들리는 일상에서도 묵묵히 자리를 지켜주는 고향에 대한 추억과 부모·형제에 대한 고마움과 존경을 담아내고 있다. ‘굽은 등을 따라/ 이름 모를 시간이 주름처럼 흘러내리는/ 푸른 핏기 다 내어준 노을 진 나무 한 그루/ 우주의 뿌리로 서서/ 작은 마을 하나/ 천년을 지키고 있다.’라는 구절은 아주 사실적인 고백인 동시에 의미의 폭을 넓게 다의적인 의미망을 이룬다.
6.
최은복의 시는 채리 글로트펠티 Cheryll Glotfelty의 ‘문학의 생태 윤리적 상상력’ 개념을 이론적 틀에서 읽을 수 있다. 글로트펠티에 따르면 문학은 단순한 미적 경험을 넘어, 인간과 자연의 윤리적 관계를 사유하고 실천하는 공간으로 기능한다. 이 시는 봄을 단순한 계절적 변화로 그리지 않고, 회복과 정화의 생태적 상상력의 장으로 그려 낸다. 봄은 자연의 순환 속 한 시기가 아니라, 인간의 내면과 세계가 다시 연결되고 치유되는 윤리적 시간으로 나타난다.
팽팽한 기 싸움
능선을 넘어오던 봄바람이 실랑이가 벌어졌다
함초롬히 스며드는 차가운 유혹에
마음 단단히 다잡아 보지만
어느 틈에 설레였나
올 듯 오는 듯 오지 않는 서투른 고백에
두근거리는 마음만 만지작거린다
톡톡 건드리는 햇살에도
달큼하게 안겨 오는 바람결에도
꿈적 않는 꼭 다문 연둣빛 잎새 하나
온 세상 감싸 안을
묘연히 다가 올 그 순간을 위해
내 안의 적막 하루치씩 비워 가며
혼자 시간을 익히고 있다
- 「꽃샘」 전문
시의 내적 특징은 언어적 감각성에 있다. “능선을 넘어오는 봄바람”, “톡톡 건드는 햇살에도”, “연둣빛 잎새 하나” 같은 표현들은 시각·청각·촉각을 결합한 다 감각적 이미지로 구성된다. 이러한 언어들은 독자에게 자연의 재생력을 직접 감각적으로 체험하도록 유도하며, 자연을 상징이나 배경으로 축소하지 않고 능동적 행위자로 제시한다. 시적 언어는 감각의 복합성을 통해 독자와 자연 사이의 감각적, 정서적 접속을 매개한다.
비평적 해석에서 이 시의 봄은 자연계의 주기적 현상을 넘어선다. 봄과 겨울 사이, 미묘한 긴장감. 자연과 감정의 경계에서 일어나는 설렘. 그것은 심리적 회복의 은유이자, 인간 존재의 윤리적 기회로 작동한다. 시인은 봄의 이미지를 통해 독자에게 자연을 단순히 감상하거나 관조할 대상이 아니라, 참여하고 책임져야 하는 관계적 존재로 인식하게 한다. 자연은 인간으로부터 독립된 타자가 아니라, 인간과 상호 돌봄care의 관계를 이루는 존재로 시 안에 위치한다.
최은복 시의 효용은 생태적 상상력의 윤리적 실천을 자각하게 하는 데 있다. 우리는 시를 읽으며 자신과 자연의 관계가 단순히 관조적, 미적 차원에 그치지 않음을 깨닫는다. 시인은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상호적 책임의 윤리로 재구성하며, 생태 위기의 시대에 자연과 공존하기 위한 실천적 상상력의 필요성을 일깨운다.
표정 없이 흘러가는 구름
부딪혀 오는 먼지바람
몸을 던지듯 지나가는 햇살
메마른 불모지 사막 같은 외로움
각자 섬처럼 걷고 있다
매일 짓는 밥처럼
솥에서 우러나는 마음 한 덩이로
저만치서 오래오래 바라봐주면 울타리 될까
울타리 속 작은 씨앗 하나
제자리인 양 꽃대 올린다
풀꽃 무성한 오래된 기와지붕 위
담쟁이 넝쿨로 뒤덮인 담벼락
하수구 철조망 사이 노란 민들레로
마음 한 덩이 내려앉은 터
모두 꽃이 된다
스쳐 간 한 줌 기억에도
밤하늘 별빛 같은 온기가 스미면
아슴아슴 추억이 돋아날까
- 「어디서든 꽃은 핀다」 전문
시인은 언어가 음성이라는 귀에 닿는 효과라거나 이미지로서 눈에 닿는 시각적 효과라거나 또는 의미로서 마음에 밀착시키는 효과 등을 고려해서 적절한 언어를 찾아 나선다. 그러나 그 가운데 어느 하나만의 이미지로는 시가 되지 않고 다른 이미지들을 겹치지 않으면 안 된다.
최은복 시인이 시에서 구사하고 있는 언어는 조작적인 것이 아니고 일상적으로 쓰는 것들을 자연스럽게 작품 속에 배치하고 있으므로 시의 이해나 해석에 있어서 난해한 인상을 주지 않는다. 언어의 상징적 단계를 밟지 않고 범박한 언어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이 소박한 언어의 쓰임은 안이한 작품을 절대 허용하지 않는다. 그가 쓰는 언어는 그의 깊은 사색과 고뇌하는 심미적 가치를 담고 있다.
7.
한 사람의 시 세계를 따라가다 보면 발을 멈추게 하고 눈을 맞추게 하여 떠날 수 없게 하는 작품이 있다. 그 작품의 시구는 그 시인의 외로움과 의식 지향, 이 세계에 대한 시인의 사랑과 슬픔을 다 품고 있어 쉬이 눈길을 돌리지 못하게 하고 발길마저 얼어붙게 만든다. 시가 사람을 홀리는 순간이다. 이미지로 변신한 시구가 자신을 보는 독자에게 말 건네 일상에서 벗어난 환상의 신비를 느끼게 만든다. 그 찰나 시는 알 수 없는 아우라를 내뿜어 현실마저도 몽롱하게 만드는 기이한 존재가 된다. 시가 발현하는 위의威儀에 사로잡혀서 전율에 떨고만 있어야 하는 때는 고통스럽기도 하지만 참으로 아름다운 의식이 깨어나는 시간이다. 그런 경험을 많이 할수록 우리 영혼은 맑고 고요해진다.
최은복의 이번 시집에 있는 다음 작품이 그런 감정을 들게 한다. 그 시는 시집의 흐름에 따라 무심이 흘러가던 나의 영혼을 죽비 내리치듯 화들짝 깨어나게 하면서 몇 마디 말로는 전달할 수 없는 애절함과 안타까움의 감정을 들게 한다. 불편하면서도 그리움, 서먹하면서도 애틋한 감정을 그 작품은 불러일으키는데 그 복잡한 감정이, 말라붙어가는 나의 영혼을 다시 일깨우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심장한 표현으로 보인다.
젖은 날개 퍼덕이며
종종걸음 걷느라 버거웠을 등짝 무게가
하루 앞에 숨이 가쁘다
잊고 지낸 후회가 함께 돌아오는 시간
항변할 수 없는 나를 굽어볼 때
뿌리 내리지 못한 나무에서
우수수 잎이 떨어진다
밥 한번 먹자
술 한잔하자
노랫말 중얼거리듯 말빚 잊은 지 오래되고
기억조차 듬성듬성 비어 가는 무심한 세월
갇혀있던 그리움이 불쑥 소름 돋듯 돋아난다
나를 토닥여주는 12월의 거룩한 밤
후미진 골목 허름한 식당에는
거창한 말 한마디 없어도 위로가 되는 오랜 벗이 있고
고향마당 비추는 달빛 같은 수다가 쏟아진다
- 「12월의 아다지오」 전문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것으로 남아 있는 것은 인간이 잃어버린 어린 시절의 기억 속에 녹아 있다. 시인이 지향하는 인간상은 자본주의적 현실에 복무하는 인간이라기보다는 생명의 순연한 빛에 닿고자 하는 내적 인간에 가깝다. 그것은 생명의 섭리에 따라 내가 태어난 곳으로 되돌아가려는 순종順從의 의지일 것이다. 그리하여 태초의 숨이 돌고 피가 도는 생명의 기운이 반짝이는 곳에 도달하고자 하는 것이다.
다음은 표제작 시 한 편을 살펴본다.
누군가를
기다려 보기도 잊어보기도 했던
텅 빈 찻집을 서늘하게 적시던 날
창가에는 회색빛 전율이 흐르고
머물던 자리에는
그날처럼 비가 내린다
시월이 지나가고
느티나무가 바람에 흔들리고
밤새 걸었던 지열이 혼자 식어가고
끝이 아닌 다른 시작을 살고
그해 겨울이 멀어지고
문득
그림자 하나 툭 떨어진다
태연한 척
더나간 대답을 들여다본 투명한 오후
한 입 버석거리는 기억을 쓸어내리려
다시 찻물을 데운다
- 「다시 찻물을 데운다」 전문
‘시월이 지나가고/ 느티나무가 바람에 흔들리고/ 밤새 걸었던 지열이 혼자 식어가고/ 끝이 아닌 다른 시작을 살고/ 그해 겨울이 멀어지고/ 문득/ 그림자 하나 툭 떨어진다’(3연) ‘한 입 버석거리는 기억을 쓸어내리려/ 다시 찻물을 데운다.’(5연)
위 인용 시는 화자의 과거 감정과 현재의 마음을 잘 표현하고 있다. 찻물처럼 서서히 어떤 위로와 회복을 찾으려는 화자의 간절한 마음이 담겨 있는 시로 평자의 눈길을 멈추게 한다.
8.
수영강은 기장군 정관읍 용천산 중턱 바위틈새에서 솟아나는 옹달샘에서 발원한다. 회동 수원지를 거치고, 크고 작은 하천들이 합류하여 거대한 물줄기가 되어 수영만에 이른다. 길이가 약 3.3km로, 부산에서는 낙동강 다음으로 긴 강이다.
수영강은 고려 왕국의 수도인 개경에서 멀리 떨어진 유배지로, 임진왜란 소용돌이를 겪은 상흔의 땅이자, 숭어가 뛰어오르는 멋진 강변 산책로의 모습에 이르기까지 격동의 세월을 품어온 강이다.
수영강은 각종 하수로 오염되기도 하고, 간척 및 매립으로 모습이 변형되기도 했지만, 수영강은 묵묵히 흘러 주었다. 서러운 감정도, 전란의 상처도 모두 안고 갔으며, 안락함과 풍요함을 우리에게 안겨주려 변함없이 여전히 흐르고 있다.
한 시절 숱한 이야기 굽이 꺾이는
그곳에는 늘 강이 흐른다
팍팍했던 하루하루 여로가
애끓는 듯한 해금 소리로
죽음보다 용감했던 청춘이 한 생애로
저마다 푸른 꿈 꾸는 대지 위로
아무 일 없다는 듯 유유히 흐른다
시린 기억 품은 구릉 언저리마다
넋이 깃든 곰솔 이야기 둥지를 틀고
몇백 년 시간이 이어지고 있는 오늘도
삶의 터전을 지켜온 유물처럼
전설이 되어 흐른다
- 「수영로에는 강이 흐른다」 전문
위 인용 시 「수영로에는 강이 흐른다」는 수영강의 고마움을 다시 한번 생각하고, 함께 살아온 사람들 서로 감사하는 마음을 나누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며, 수영강을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길 바라는 화자의 뜻이 나타나 있다고 본다. 갈대밭으로 아름다웠던 옛 모습과 고층 빌딩과 산책로로 변한 지금 수영강의 터전이 지닌 시간의 길이를 풍경 그리듯 감정을 잘 표현한 작품이다. 그 세월만큼이나 사람들의 희로애락을 담은 시로 흐르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바라보기만 해도 힐링이 되는 강, 걷고 달리며 활기가 넘치는 강변, 용천산 바위틈 옹달샘이 비로소 시민들의 옹달샘으로 채워지고 있다.
9.
최은복의 시에서 교훈성이 강한 시를 만날 수 있다. 「줄탁동시」가 그러한 시이다. 내적 노력과 외적 자극의 조화가 사물의 생성과 변화의 이치라는 ‘줄탁동시’의 의미를 봄이 와서 꽃이 피는 자연현상과 인간사에까지 확장한 시다.
봄물 들어오는 소리에
하늘과 땅 사이 장막이 팽팽하다
천둥 번개에도
웅크리고 있는 등짝을 햇살이 어루만져도
다문 고요는 깨달음을 위한 수행 중이다
구름의 암시를 해독한 봄비
추적추적 기척을 전한다
젖은 헛기침에 돌진하는 봄 전령들
환시가 전하는 귀엣말에
한순간, 홀쳐맨 모시 적삼 붉게 터지는 소리
생살 찢고 움을 틔운 건
창을 두드린 빗방울 울음이었을까
겨우내 땅심이 품었던 깊은 정이었을까
하늘에는 구름 몇 점 무심이 흘러갈 뿐
- 「줄탁동시」 전문
위 인용 시는 봄비가 내리던 날, 풀꽃 한 송이의 어여쁨에 잠시 마음을 빼앗긴 화자의 모습이 떠오른다. 알에서 깨어나려는 병아리 그림자 위로 어미 닭이 부리로 쪼아 주듯 톡톡 빗방울의 노크가 한 점 살결 위로 봄을 알리는 동시적인 현상을 보고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해독해 보고 싶은 마음을 잘 나타낸 시로, 이미지의 대립적 구성과 상징, 비유, 낯설게 하기를 통해서 예술성 획득에 성공하였다. ‘줄탁동시’는 상호작용의 힘’을 상징적으로 암시하는 표현이다. 관념을 형상화하기는 쉽지 않다. 화자는 사실적 진술을 통해서가 아니라 원형적 이미지들을 통해서 상징적으로 형상화하여 이 시의 예술성을 높이고 있다.
10.
최은복 시에서 생업과 같은 현실 문제를 다룬 시를 만난다. 현실 문제를 다룬 아래 시는 순수서정보다 현실의 삶과 관련된 담론 중심의 시다. 현실에서 대부분 사람은 고된 생업으로 살아가게 된다. 하여 그들의 삶은 늘 팍팍하다. 최은복 시인은 시 「구두 수선공」에서 그런 삶을 주목한다.
구멍 사이로 남의 인생을 들여다본다
길과 걸음 엇박자에
맥없이 갉아 먹힌 뒤 굽
한 평도 안 되는 공간에 앉아
치열했던 발자국 무릎 위에 올려놓고
얼룩진 밑바닥을 쓰다듬는다
내 욕심 때문에 아파했을 날들
아물 것 같지 않던 길 위 상처가
굳은살 박힌 주름진 손에 잠들고
튼튼하게 박음질 된 그 길 따라
새 살이 차오른다
안경 너머 지긋이 바라보는 노인 얼굴에
찬연한 노을빛이 은은하게 내린다
- 「구두 수선공」 전문
위 인용 시는 구두 수선 일을 하는 직업인의 삶을 다룬 시다. 버거운 삶과 그런 현실을 시인은 직시한다. 시 텍스트는 개인의 욕망과 이데올로기적 차원의 담론이 교차하는 장소다. 대다수의 서정시는 이데올로기적 담론보다는 ��인 욕망에서 비롯된 판타지적 측면이 강하다. 하지만 개인의 욕망에서 비롯한 판타지에도 시인의 사회적 역사적 측면이 잠재하게 된다. 연표행위자인 시인은 사회적 역사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판타지를 중심으로 한 순수 서정시라 하더라도 언제나 시 텍스트 안에는 -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 사회적 역사적 측면 즉 이데올로기적 측면이 내재한다. 그러나 판타지가 우세하므로 그런 시는 순수 서정시에 가깝다.
‘한 평도 안 되는 공간에 앉아’(3연), ‘굳은살 박힌 주름진 손에 잠이 들고’(4연)로 고된 삶은 점증된다. ‘안경 너머 지긋이 바라보는 노인 얼굴에/ 찬연한 노을빛이 은은하게 내린다.(5연)는 숙련된 장인의 의지적이고 인생을 달관한 모습이 그려진다. 해피엔딩이다. 시 「구두 수선공」을 보면 최은복 시인은 현실의 문제에도 관심을 두는 시인이다.
11.
끝으로 ‘시각장애인의 낭송 무대를 보고’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소리를 유영하다」라는 특별한 시 한 편을 소개한다.
‘햇살에 눈 부시지 않으면 어떠리/ 꽃 빛이 나를 외면하면 어떠리/ 노을빛이 영영 사라지면 어떠리/ 눈을 뜨고도 어둠만 보이면 또 어떠리’
이 시는 2023년 9월 16일 부산시단 제9회 전국시낭송대회에서 시각장애인 정지인 낭송가의 자작시 「어떠리」라는 낭송시의 일부다. 이날 화자는 사회를 맡아 행사를 진행하면서 느낀 소회를 시로 표현했다.
‘햇살에 눈 부시지 않으면 어떠리
꽃 빛이 나를 외면하면 어떠리
노을빛이 영영 사라지면 어떠리
눈을 뜨고도 어둠만 보이면 또 어떠리’*
소리를 느낌으로 보았을
그녀가 본 걸
난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녀는 알지만 나는 알지 못한다
알지 못하는 아침을 볼 수 없는 바다로
그녀만의 소통법을
타인의 가슴에 실어 나른다
모든 사람이
모양과 빛깔로 꽃을 볼 때
점자에도 없는 아우성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처럼 그려 내는
그녀 앞에서 한 떨기 꽃이 된다
어두운 내면을 헤집어 본다
깊이 귀 기울여보면
시각만 온전할 뿐
장애가 있는 건 외려 나였음을 그제야 알았다
- 「소리를 유영하다」 전문
위 인용 시는 시각장애인의 자작시 「어떠리」 시 낭송을 듣고 보면서 느낀 화자의 감동과 자기 반성문 성격을 지닌 시이다. 그녀는 보지 못하지만 나는 보았다는 걸 인식하게 되면서 내면의 빛을 지닌 존재에 대한 존중과 자각으로 비장애와 장애라는 구분이 얼마나 외형 중심이었는지 말하고 있다.
▣ 닫으면서
지금까지 최은복 시인의 시속에 내재한 특징들을 살펴보았다. 그는 시가 괜스레 어려워야 한다는 데 동의하지 않고, 기교가 중심이 되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하는 시인이다. 현상을 적극적으로 해석하는 것도 삼가고 싶어 한다. 시인으로서의 문명을 날리고자 하는 욕심은 더더욱 없어 보인다. 솔직하고 담백한 그의 시심 때문에 그의 시 이해에 어려움이 없다. 이것이 그의 시의 강점이다. 그러므로 그의 시를 대하면 마치 명주가 아닌 무명 바지저고리를 걸친 듯 편해서 좋다. 용을 주고 긴장하지 않고서도 쉽게 읽힌다.
무엇에도 잘 설레는 사람이 있다. 설렌다는 말은 ‘새로움’이란 말을 끌고 온다. 어디서 누구를 또는 무엇을 어떻게 만나 얼마나 절실하게 설레고 사랑했는가. 그녀의 시는 분명 시작 근원을 이루는 따뜻한 서정의 시심에서 출발한다. 요란하거나 화려하지 않으면서 다른 존재들에게 자신을 내어주며 설레는 마음이다. 홀로 우뚝 서서 과시하려 하지 않는다. 이타적 공생적 삶을 이어가는 태도이다.
첫 시집 『다시 찻물을 데운다』 작품 면면에는 옛것에 대한 그리움이 정신 에너지로 흐른다. 직설적이고 과장된 표현 없이 진정성이 그대로 녹아 있고, 사실적 묘사임에도 불구하고 신선한 노래 리듬을 형성하고 있다. 다양한 방식의 자기표현을 엿보는 것은 잊었던 시를 재음미하는 즐거움을 준다. 최은복 시인이 특히 시적 대상을 개인적, 주변적인 데서 벗어나 공동체적인데 두고 독자에게 일체감을 느끼게 하고 있다는 것은 매우 주목할 만하다.
시는 저 영원에서 울려 퍼지는 존재의 물음에 응답하는 인간의 노래이자 메아리다. 그의 시가 설렘으로 고요와 허공, 사유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도 시인의 사명과 자부심으로 참신한 시를 써나가기를 기대해 본다. 아름다운 서정 시집을 묶어 내시는 최은복 시인의 첫 시집 상재를 축하해 마지않는다.